2015. 1. 21. 17:43ㆍ2015 10주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박찬욱 감독의 선택 - 천국의 문 (디렉터스 컷) Heaven’s Gate (Director’s Cut) 1980│216min│미국│Color│DCP│청소년 관람불가 연출│마이클 치미노 Michael Cimino 출연│크리스 크리스토퍼슨, 크리스토퍼 월켄, 존 허트 상영일정ㅣ 1/22 15:40, 2/8 16:40(시네토크 박찬욱) |
- “꼭 극장에서 보고 싶어서, 그리고 새로운 복원판이 나왔길래 친구들과 함께 보고 싶어 선택했다. <천국의 문>은 마이클 치미노의 작가적 욕심이 가장 왕성할 때 스튜디오의 간섭이 배제된 상황에서 가장 큰 돈을 들여 만든, 역사에서 딱 한 번 있었던 이벤트 같은 영화다.” |
3시간 36분, 그 절망과 무력의 시간
3시간 36분이라는 <천국의 문>의 상영 시간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다양하게 펼쳐놓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을 최대한 길게 늘이기 위한 것이다. 마이클 치미노는 소위 ‘서부 개척’이 황무지를 개척한 선구자들의 성공 서사가 아니라 한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를 파괴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려 했다. 그리고 <천국의 문>은 그 비참한 풍경을 거의 3시간에 걸쳐 천천히 묘사함으로써 단순히 서사를 전달하는 역할을 넘어 강렬한 정서적 파장을 남긴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도 쉽게 멎지 않는 이 파장이 <천국의 문>을 계속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가 시작한 지 40분쯤 지나면 동부의 부유한 사업가들이 125명의 ‘범죄자’들에게 자기 마음대로 거액의 현상금을 건다. 그리고 이때부터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제임스(크리스 크리스토퍼슨)를 중심으로 한 서부의 작은 공동체는 서서히, 그리고 완전히 무너져 간다. 마지막에 이르면 혐의가 없던 사람들도 사냥을 당하는 짐승처럼 죽어가고,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눈앞의 끔찍한 현실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런데 이때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참혹한 결말 자체가 아니라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 걸리는 물리적 시간이다.
마지막 전투 장면을 보자. 영화는 비슷비슷한 숏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총싸움 장면들을 계속 이어붙이며 상영 시간을 하염없이 연장시킨다. 이때 이 시퀀스의 역할은 이야기를 진전시키거나 장르적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게 아니라 먼지와 피, 그리고 시체를 반복해서 보여주는 데 있다. 마이클 치미노가 제작사의 압력을 받으며 편집했던 149분 버전의 영화(‘디렉터스 컷’과 비교해 무려 67분이 짧다)에서 이 시퀀스는 원래 이 정도로 길지 않았다고 한다. 제작사는 화면을 가득 채운 먼지로 인해 시각적 스펙타클조차 차단된 이 전투 장면이 필요 이상으로 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강조하자면,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시간의 지속 그 자체이다. 그 시간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영화 속 현실의 끔찍함이 제대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결국 <천국의 문>은 어떻게 해도 이 공동체의 붕괴를 막을 수 없다는 불안을 긴 시간에 걸쳐 쌓아올린 뒤 패배의 절망감을 스크린에 가득 채우고 만다. 챔피언(크리스토퍼 월켄)이 수십 발의 총알을 한몸에 받아내는 장면, 125명의 범죄자 명단을 힘들여 하나하나 읽는 장면, 적에게 닿지도 않는 폭탄을 무작정 계속 던지는 장면 등, 명백한 과잉의 장면들은 과잉 그 자체를 통해 붕괴 중인 공동체가 느끼는 무력함과 절망을 뚜렷하게 형상화한다.
비록 마지막 에필로그가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이야기를 액자 속에 넣어 ‘과거의 비극’으로 박제시킨다는 의심이 들기는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에필로그는 그 강렬한 파장과 직접 마주하지 않기 위해 설치한 최소한의 보호장치로 보인다. 그만큼 <천국의 문>이 빚어내는 절망의 정서는 치명적이다. <천국의 문>을 다시 기억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보년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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