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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존 포드 걸작선

존 포드 웨스턴의 풍경

‘존 포드 걸작선’ 마지막 날인 지난 12월 5일 <황야의 결투> 상영 후에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의 강연이 이어졌다. ‘존 포드 웨스턴의 풍경’이란 제목으로 펼쳐진 이날 강연은 웨스턴의 원형적인 특징들이 잘 드러난 <황야의 결투>를 중심으로 존 포드 서부극에 대한 전반적인 경향과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 현장을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방금 보신 영화는 존 포드 영화중에서 가장 고전적인 웨스턴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고전 웨스턴의 시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인데, 웨스턴의 원형적인 특징들과 모뉴먼트 밸리의 풍경이 가장 적절하게 융합된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굉장히 남성적인 웨스턴이긴 하지만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남성성과 여성성이 가장 적절하게 결합된 영화이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TV나 비디오로 워낙 많이 접할 수 있었던 영화인데,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다시 보고 다른 느낌을 얻게 되었던 것은 2000년대 초반 파리에서였다. 그 때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했던 장면은 와이어트 어프가 동생의 묘비에 적힌 글귀를 읽으며 ‘내가 이 마을을 떠날 때쯤이면 너 같은 어린아이도 안전하게 살 수 있을 거다’라고 말하는 장면이었다. 워낙 어두운 장면이라 비디오 화면으로 봤을 때는 공간과 배경의 느낌이 와 닿지 않았는데 필름으로 보니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여기에는 첫 번째로 무덤과 폐허라는 죽음의 이미지들이 있고, 어두운 저녁이라는 시간적 측면과, 어린 아이가 삶을 펼치지도 못하고 죽어갔다는 지점이 있다. 이 영화는 188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영화가 개봉된 것은 1946년이다. 포드를 포함해 영화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2차 대전 참전 이후에 첫 번째로 찍은 영화이다. 그래서 무덤 장면에서 와이어트 어프의 다짐은 1946년이라는 특정한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와이어트 어프의 동생 같은 어린 아이들이 가장 많이 죽게 되는 건 전쟁 때문이고, 그래서 그 장면에는 전쟁의 느낌이 깊게 배어있다. 전쟁과 가족적 복수가 연결되면서 가족, 공동체, 국가,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툼스톤이라는 대지와 배경까지, 이 네 가지가 결합되는 것이 묘지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장면에서부터 시작해서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드리려고 한다.

묘지 장면에서 와이어트 어프의 다짐은 몇 가지의 상황들을 떠올리게 하며, 이 영화의 의문은 거기에 있다. 은퇴한 보안관이었던 와이어트 어프가 다시 보안관이 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는 동생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 두 번째로는 그 복수를 좀 더 공적인 차원해서 진행하기 위해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서부개척기의 낭만적인 이야기로 해석하지만, 전후라는 상황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보안관이 다시 총을 든다는 설정이 중요하다. 이 영화 이후에 굉장히 많은 영화들 안에서 은퇴한 보안관, 군인, 형사가 다시 총을 들게 된다는 설정이 있었다. 최근의 예로 <그랜 토리노>, 조금 되돌아가자면 <더티 해리> 같은 영화들이 있다. 50년대에도 이런 영화들이 많다. <하이 눈>이나 <리오 브라보> 등이 그렇다. 떠났던 보안관이 다시 돌아와서 악당과 결투를 벌여야 하는 상황이 등장한다. 이처럼 전후 웨스턴에서는 총을 다시 든다는 설정이 갖는 중요성이 있다. 1946년이라는 상황에서 보자면, 이미 전쟁은 끝났는데 왜 다시 총을 들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남게 되는 것이다.

영화에서 툼스톤이 처음 소개되는 장면은 굉장히 인상적이다. 와이어트 어프는 ‘뭐 이런 마을이 다 있냐’는 말을 수도 없이 반복한다. 이곳은 한마디로 질서가 없는 마을이다. 이 무질서함의 극단적인 표현으로 영화의 초반에 등장하는 것이 술에 취해 횡포를 부리는 인디언이다. 실제로 와이어트 어프에 대한 여러 가지 신화적인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이 인디언 일화라고 한다. 와이어트 어프를 다룬 이전의 영화들에서는 대부분 실질적인 총격전으로 이 부분을 설정했으나, 포드는 와이어트 어프가 인디언을 끌고 나오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 이 장면은 첫 번째로 와이어트 어프가 갖고 있는 굉장한 능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장면이 표현하고 있는 더 중요한 지점이 있다. 이 영화는 전통적인 서부극과는 달리 인디언과의 격돌을 다루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마을 공동체가 혼란에 빠져있는 것은 내부적인 문제에서 기인하는 것이지 외부의 적 때문이 아니며, 영화에서도 인디언과의 격돌이나 그 위협에 의한 마을의 공포가 다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인디언을 추방하는 것은 내부의 질서를 세우기 위한 조치이다. 이 영화는 묘한 이중성을 갖고 있다. 웨스턴이라는 장르는 언제나 충돌적인 이중성을 갖고 있는데, 문명과 야만, 남성과 여성, 외부와 내부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내부적인 이중성을 갖고 있다. 더 이상 내부와 외부 간의 충돌이라는 이중화가 아니라 내부에서의 이중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총격전이나 결투도 두 번에 걸쳐 표현되고 있다. 가장 먼저 문제를 발생시키는 것은 클랜튼 일가다. 그러나 이 영화가 중반부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와이어트 어프와 닥 할리데이의 격돌이다. 사실상 이 영화에서 포드가 중점을 둔 것은 클랜튼이 아니다. 포드가 그려내는 무질서함과 법적인 안정성의 부재는 사실 모두 닥 할리데이 때문에 발생하게 된다. 영화의 초반에서도 와이어트 어프와 닥 할리데이의 격돌은 이중권력적 양상을 취하게 된다. 툼스톤의 정의를 위해 와이어트 어프가 보안관 뱃지를 달고 나타났지만, 닥 할리데이는 마을의 어두운 부분에 자신이 행사하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와이어트 어프를 견제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헨리 폰다가 맡은 와이어트 어프의 캐릭터를 보고 많은 사람들은 <분노의 포도>나 <청년 링컨>에서의 캐릭터를 떠올리겠지만, 다른 측면에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시드니 루멧의 <12명의 성난 사람들>에 나오는 폰다의 이미지다. 이 영화에서 와이어트 어프는 클랜튼과 싸우기 위해 내부적인 연합전선을 구성할 필요가 있었다. 45년부터 50년대에 이르는 미국 영화들이 가장 중요하게 설정했던 것은 내부의 충돌적인 적들을 어떻게 배제 혹은 통합시켜 나가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보자면 냉전 구도 안에서 발생한 질문이었고, 영화적으로 보자면 더 이상 국가적인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가족과 같은 작은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이질적인 충돌들을 어떻게 포섭해나가느냐 하는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 전형적인 웨스턴은 외부의 적들과 격돌해가면서 내부의 공동체를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보자면 교회 건립식의 무도회 장면이 그런 면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동부에서 온 클레멘타인과 서부를 떠돌아다니던 와이어트 어프, 이 두 이방인을 춤을 통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 다음 장면에서 닥 할리데이가 클레멘타인에게 화를 내는 것은 클레멘타인이 떠나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공동체가 클레멘타인과 와이어트 어프를 환영하는 것에 대한 분노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더 이상 툼스톤이라는 마을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지 못하고, 그래서 떠나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할리데이와 와이어트 어프는 더블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하나는 여전히 서부적인 가치와 윤리와 양심을 갖고 있는 인물이고, 또 하나는 동부에서 문명화된 가치를 갖고 서부에 들어왔지만, 서부라는 세계 안에서 이미 퇴락해버린 인물이다. 그 둘 사이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 클레멘타인이다. 그녀는 과거와 미래가 모두 연결된 인물이다. 할리데이가 과거에 버리고 떠난 여자이고, 와이어트 어프가 미래에 다시 만날 여자이다. 그래서 그녀는 중심적인 인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My darling Clementine>이라는 이 영화의 원제를 눈여겨 볼 수 있다.


말씀드렸듯 포드가 이 영화에서 그리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내부적 충돌의 문제다. 6, 70년대에 본격적으로 정치영화가 등장하기 전까지 웨스턴은 정치영화의 한 틀이었다. 그래서 헐리우드 영화라는 영역 내에서 웨스턴은 미국적인 사회 질서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 전후 아메리칸 시네마를 분석했던 사람들의 공통적 견해는, 웨스턴을 포함해 4, 50년대 급격하게 변화되는 미국영화들에서 내부적인 충돌을 어떻게 담아내고 극복해 가느냐 하는 문제가 공통적으로 대두되었다는 것이었다. 실제 정치적 질서는 3, 40년대를 거치며 많이 변화했다고 한다. 30년대, 그리고 40년대 초반까지 진보진영의 인사들에게 가장 큰 원칙은 대중주의였으며 그 무렵에는 오히려 보수주의자들이 개인주의를 주창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쟁을 거치며 완전히 반전되어 보수진영에서 대중주의를, 진보진영에서 개인주의를 외치게 되었다. 이는 영화에도 똑같이 반영되었다. 그래서 50년대 영화의 진보성과 보수성을 구분할 때 가장 큰 틀은 개인주의를 강조하느냐, 아니면 공동체를 강조하느냐 하는 부분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영화는 굉장히 보수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진보적 부분도 내포하고 있는 애매한 영화다. 툼스톤의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아니라 할리데이로부터 비롯한다. 그래서 이 영화를 굉장히 보수적인 영화로 보는 사람들은 할리데이를 동부에서 온 진보적인 인물로 해석한다. 그와 대조되는 와이어트 어프는 과거의 가치를 체현하는 보수적인 영웅이다. 동시에 등장하는 것은 극단적인 우파성을 갖고 있는 클랜튼이다. 정치적 노선으로 보자면 진보와 보수와 극우가 툼스톤이라는 마을에 동시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포드는 보수적인 가치를 중심으로 진보를 포섭해나가는 과정에서 극우와 격돌을 벌이게 된다는 설정을 만들고 있다. 이런 면에서 할리데이와 와이어트 어프 간의 결합은 보수와 진보의 가치를 체현하는 사람들의 연합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당대를 바라보고 있는 포드의 정치적 시선이 이 영화에 드러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와이어트 어프가 집합적인 의지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순수한 의미에서 보자면 와이어트 어프의 행보는 개인적 복수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라스트가 사람들에게 언제나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왜 서부사나이는 마을을 떠나는가. 이 질문은 모든 웨스턴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질문이며,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나 <역마차>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그 질문에 대한 특정한 대답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될지 모르는 모호함의 가치로 끝맺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포드가 다음에 만들었던 <아파치 요새>에서 드러나는 서부세계의 몰락 때문에 더욱 그런 느낌이 강조된다. 달리 말하자면 와이어트 어프는 다시 돌아오기에는 너무 많은 트라우마, 즉 동생의 죽음이나 닥 할리데이의 죽음 등을 안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전적 웨스턴의 원형으로 이 영화를 이야기하지만, 내부적으로 들어가보면 오히려 이 영화의 훨씬 더 많은 부분은 고전적 웨스턴이 궤멸되고 무너지고 있는 현상을 그리고 있다는 느낌이 있다. 서두에 말씀드렸지만 이 영화 초반의 묘지장면에서 드러나는 어둡고 절망적이고 멜랑콜리한 분위기가 이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존 포드의 웨스턴 안에서 하나의 매개적인 영화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한편으로는 굉장히 긍정적이지만, <아파치 요새>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나 <수색자>에서 드러나는 비관적인 느낌 역시 이어지고 있다. 보통 존 포드 영화를 이야기 할 때, 노스텔지어적인 영화라기보다는 프론티어의 개방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는 영화로 해석하는데, 이 영화는 훨씬 더 비관적인 것 같다. (정리: 박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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