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웅 없는 스파이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 존 부어맨의 <테일러 오브 파나마>

2012. 1. 27. 03:182012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다수의 ‘007 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 역을 맡았던 피어스 브로스넌이 ‘안티-본드’ 영화에 출연한다면? 첩보 소설의 거장 존 르 카레가 그 영화의 원작과 각색에 참여했다면?  존 부어맨의 <테일러 오브 파나마>(2001)가 그런 작품이다. 이 영화는 파나마를 배경으로 운하운영권을 둘러싼 음모와 거짓을 그린다. 이제 막 파나마로 발령을 받은 영국비밀정보국(MI6)의 요원 앤드류(피어스 브로스넌)는 고위 인사들의 양복을 재단하는 해리(제프리 러쉬)에게 접근한다. 파나마에 정착한 영국인 재단사 해리는 그동안 거짓으로 꾸며낸 자신의 과거 경력을 기반으로 삶을 꾸려왔는데, 그런 해리의 비밀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앤드류는 그 사실을 빌미로 파나마 운영권을 둘러싼 고급 정보들을 캐내올 것을 요구한다. 평범한 재단사가 엉뚱하게 꾸며낸 정보들이 비밀정보국에 전해지면서 상황은 점점 더 커져 해리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존 부어맨은 피어스 브로스넌이 기존에 연기했던 제임스 본드의 이미지를 가져오면서도 이를 노골적으로 조롱한다. 앤드류는 존 르 카레의 인물답게 깊이를 갖지도 선하지도 않은 인물이다. 영화는 스파이를 매력적인 영웅으로 그리는 대신, 이를 비틀어 더없이 비열하고 뻔뻔한 인물로 묘사한다. 빚과 스캔들에 휩싸여 쫓겨나듯 파나마에 오게 된 앤드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변 모든 사람들을 이용한다. 앤드류의 상사를 비롯해 미 정부의 고위 관료들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어리석다. 그들은 자신들이 접한 새로운 정보에 미심쩍어하면서도 순순히 상황에 말려들어간다. 걷잡을 수 없이 일이 커지는 사이, 애꿎은 누군가는 죽음을 맞고, 미 정부는 군사적 개입을 시도한다. 군사 작전에 들어가기 직전, 과거에 파나마에서 사령관을 지냈던 군인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그곳은 우리의 잃어버린 영토입니다.” 이 일촉즉발의 상황은 그야말로 촌극이지만 신랄한 풍자이기도 하다.


해리의 죽은 삼촌 베니 역의 헤롤드 핀터도 이색적이다. 그가 평소에 미국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내왔던 것을 감안할 때 그의 카메오 출연 역시 풍자적인 면을 갖는다. 흥미로운 이는 단연 해리이다. 그는 악의라고는 없는, 그저 몽상가적 기질이 다분한 이야기꾼일 뿐이다. 그가 꾸며내는 거짓 정보들은 계획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것이다. 내뱉는 이야기들 또한 사람들(앤드류, MI6, 미 정부, 그리고 어쩌면 관객)이 기대하는 것이기도 하다.(그가 꾸민 이야기에서 그의 재단 실력은 영국 새빌로우에서 익힌 전통 기술이 되고, 알코올 중독인 그의 친구 미키는 파나마의 앞날을 책임질 반군 지도자로 둔갑한다). 해리와 미키, 마르타는 과거 노리에가의 독재정권 시절 정치적 폭력을 경험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해리는 거짓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현실을 버텨낸다. 이는 미키와 마르타가 신체적 고통(폭행과 수감)을 겪은 후, 그 외상을 몸에 새긴 채 화상과 알코올 중독으로 살아가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해리의 이야기는 그가 보는 베니 삼촌의 환영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일상과 뒤섞여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의도하지 않게 그가 점점 궁지에 몰리는 모습은 연민을 자아낸다.


<테일러 오브 파나마>는 풍자, 조롱, 익살, 블랙코미디와 비극 사이를 오가는 영화다. 코미디의 가벼운 터치와 진지한 톤, 특히 강도 높은 폭력 묘사 등이 공존한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이들이 즐길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개봉당시의 일반적 평가도 썩 좋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묘한 조합은 어떤 이들에게는 꽤 흥미로운 것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장지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