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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시네토크

해피엔딩처럼 보이나 불안한 공기가 감도는 영화다

최동훈 감독과 배우 김윤석이 함께한 <바람에 사라지다> 시네토크

눈물 쏙 빼는 더글라스 서크의 멜로드라마를 보고 덩치 큰 세 남자가 한 자리에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잘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실제 벌어졌다. 1월 24일 오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바람에 사라지다> 상영이 끝나고, 월간 『스크린』 편집장이었던 김형석 씨의 진행으로 이 영화를 추천한 최동훈 감독과 영화배우 김윤석 씨의 시네토크가 이어진 것. 이날은 서크 뿐 아니라 평소 멜로드라마 장르를 좋아한다는 최동훈 감독과 배우로서 언젠가 멜로드라마 연기에 욕심이 난다는 김윤식 씨가 함께한 자리였던 만큼, 더글라스 서크와 멜로드라마, 연출과 연기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오갔다. 여기에 그 현장을 전한다.

 

김형석(전 『스크린』 편집장): <타짜>부터 <전우치>까지 콤비를 이루고 계신 최동훈 감독과 배우 김윤석 씨를 모시고 영화에 대한 얘길 해볼 텐데, 먼저 필름으로 <바람에 사라지다>를 다시 보시면서 이전과 다르게 느꼈던 부분이나 새롭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면.

최동훈(영화감독): DVD로 다섯 번은 봤다. 제 아내도 좋아하는 영화이다. 더글라스 서크가 멜로드라마를 찍지만 굉장한 형식주의자이고 그가 구축해놓은 미장센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는데, 필름으로 다시 보니까 DVD로 봤던 건 가짜였구나 싶었다. 더글라스 서크의 문장과도 같은 장면, 이를 테면 바깥의 카메라가 창틀에서 밖을 바라보는 인물을 잡는 장면이랄지, 루시가 아이를 가졌다고 얘기하는 장면에서 독특한 조명설계 같은 것이 있다. 루시가 남편을 향해 걸어갈 때 아주 잠깐 암흑 속에 묻혔다가 다시 빛으로 나오는데, 그 순간에 남편에 대한 신뢰가 이미 무너졌음을 느끼게 된다. 영화전체에 불안감이 존재한다. 호텔 처음 갔을 때, 창밖의 푸른 배경조차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

김형석: 만약 김윤석 씨가 이 영화를 연기한다면 어떤 캐릭터를 하고 싶으신지.

김윤석(영화배우): 글쎄...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사실 미치 역할의 연기가 좀 실망스러웠는데, 엉성한 면이 있고 표정도 세 가지 밖에 없지 않던가(웃음). 카일이 루시와 비행기에 올라탔을 때 미치가 먼저 와있는데, 그 때 미치가 느꼈던 여자에 대한 실망감이 컸을 것 같다. 그 때의 느낌이 감정적으로 제일 컸는데, 비행기 안에서의 미치의 모습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좀 더 밀도 있게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제가 제일 매력적인 캐릭터는 술집에서 메릴리와 술을 마시다 얻어맞는 남자다(웃음).



서크 영화의 특징은 ‘불행한 해피엔딩’에 있다!

 

김형석: 시나리오나 영화의 구조적인 면에서 독특하게 느끼는 점이 있다면.

최동훈: 서크는 제가 보기에는 굉장히 똑똑한 연출을 한다. 표면상 영화의 주인공은 미치와 루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해들리 남매가 진짜 주인공인 것 같다. 록 허드슨는 서크의 영화를 통해 스타가 되었다. 록 허드슨이 연기한 미치는 주변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격동 속에 빨려 들어가지 않는다. 노동자계급의 삶을 살아가길 바라고, 루시 역시 소박한 삶을 꿈꿨다. 미치가 루시에게 ‘우리는 어쩌면 같은 종류의 인간일지 모른다’고 하는 장면이 있다. 루시가 원했던 건 심리적으로 결혼이었을 거다. 그녀가 처음에 카일에게 ‘이 회전목마에서 내려주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회전목마’라고 하는 건 서크 영화의 특징이다. 인물들의 관계가 끊임없이 맴돈다. 미치는 로렌을 사랑하고 로렌은 카일을 사랑하고. 미치가 과연 이 집 안의 구원자일 수도 있지만 침입자일 수도 있다. 당대의 관객들은 영화의 표면, 멜로드라마적 요소들을 좋아했겠지만, 감독이 설치한 장치들을 자세히 보게 되면 영화의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 테면, 서크 영화에서 보여지는 ‘불행한 해피엔딩’ 같은 것이 있다. 이 영화에서도 결말은 갑작스럽고 당혹스럽다. 영화에는 세 자루의 총이 등장하는데, 카일과 술집주인, 아버지의 총이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카일이 술집의 총을 들고 가나 싶었는데, 서크는 기어이 그가 집 안에서 아버지의 총을 집게 만든다. 원래 멜로드라마를 좋아하지만, 특히 총이 나오는 멜로드라마를 좋아한다(웃음). 블랙멜로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 것들, 이 영화에서처럼 의처증, 알콜중독증 같은 어두운 면들이 드라마를 구성하는 그런 멜로드라마를 좋아한다.

 

양식화된 연기에서 오히려 입체감이 느껴진다!

 

김형석: 50년대 영화다보니까, 고전배우들의 뛰어나지만 한편으로는 규격화된 연기를 볼 수 있다. 배우들의 연기스타일도 변화하면서 많은 진화를 해왔는데, 김윤석 씨는 이런 고전적 연기를 보시면서 어떤 느낌이셨는지.

김윤석: <무간도3>에 중국에서 온 비밀 수사요원으로 진도명이라는 배우가 나온다. 그 배우를 <영웅>에서 진시황제 역할을 맡았을 때 봤는데, 그 분의 연기가 굉장히 ‘연극적이다, 고전적이다’라고들 한다. 하지만 그가 <무간도3>에 나와서 양조위 같은 배우와 앙상블을 이룰 때, 전혀 튀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때로 조각 작품 보다 회화가 입체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저런 양식화된 고전적 연기, 배우의 모습과 등장인물의 모습이 약간 겹쳐지는 듯한 그런 연기가 오히려 입체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언뜻 평면적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조각처럼 튀어나오는 느낌을 줄 때가 있다. 지금도 영화는 잘 모르겠으나 연극을 볼 때마다 그런 것이 주는 힘이라는 것, 여운이라는 것이, 연기가 밖으로 튀어나와 관계와 관계사이의 통로를 형성해서 울룩불룩 조각 같은 느낌을 줄 때 놀랍다는 느낌을 받는다. 굉장히 매력적이고 자양분 같은 느낌이 든다.

 

관객1: 록 허드슨의 성정체성 때문인지 자꾸 이 영화를 볼 때 동성애적인 느낌을 받게 된다. 미치가 질투하는 게 로렌인지 카일인지도 모호하고 메릴리를 루시를 질투하고 마치 루시를 침입자처럼 받아들이는 부분에서 근친상간적인 느낌도 받았다.

김형석: 분명 그런 지점이 있다. 그런 해석이 직간접적으로 깊게 녹아든 영화도 있다. 일례로 토드 헤인즈의 <파 프롬 헤븐> 같은 경우 좀 더 직접적으로 동성애를 끌어오면서 서크에게 오마주를 보낸 영화고, 파스빈더가 서크를 재해석한 경우도 있다. 동성애를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없는 시대였기 때문에 암시적으로 표현했을 수도 있다 본다. 감독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최동훈: 저도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 근친상간은 냄새는 나지만 확증은 없기 때문에 정확히 얘기하긴 힘들다. 서크는 그러한 감정들을 분명히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암시한다. 영화 밑에 스물 스물 스며있는 어떤 공기가 있다.

 

관객2: 재판장면에서의 메릴리가 증언하는 장면에서, 사실 그녀가 ‘미치가 범인이다’고 말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 같다.

김형석: 저도 왜 갑자기 메릴리가 말을 바꾸는지 궁금했었고,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장면에서 미치의 표정이랄지 하는 것에서 어떤 상상을 해 볼 여지가 있는 것 같다.

최동훈: 서크의 영화를 보면 그는 절대 두 남녀가 헤어지는 걸로 끝을 맺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위장된 해피엔딩 같은 거다. 처음에 루시를 좋아했던 건 미치였고, 그래서 영화의 결말은 결국 원래 사랑했던 여자를 되찾는 설정이기에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남겨진 메릴리를 보여줌으로써 해피엔딩과는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연기를 보는 것에서 인간에 대한 흥미 느껴

 

관객3: 최동훈 감독님 영화를 보면 레퍼런스가 많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만들 때 자신 안에서 나오는 창조성과 외부에서 자신에게 들어온 것들, 영향 받은 것들이 어떤 식으로 어우러지는지 궁금하다.

최동훈: 영화를 많이 보고, 많이 기억하는 편이다. 그런데 <범죄의 재구성>을 쓸 때는 레퍼런스로 삼을 만한 영화가 별로 없었다. 언젠가 <범죄의 재구성>을 가지고 해외영화제에 갔을 때 ‘<리피피>라는 영화를 봤냐, 큐브릭의 <킬링>을 봤냐, <아스팔트 정글>을 봤냐’하는 식의 질문을 들었다. 모두 안 봤다고 하더니 깜짝 놀라더라(웃음). 범죄 영화를 만들기 위해 범죄영화를 보진 않는다. 영화를 많이 보지만 직접적으로 그것을 가져오기 보다는 다른 종류의 것에서 가져오거나, 현장에서 배우들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는 편이다. <타짜> 때는 서부극을 많이 봤다. <전우치>를 찍을 땐 판타지를 안 봤다.

김형석: 연기에도 그런 부분이 있다고 여겨지는데, 다른 사람들의 연기를 많이 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김윤석: 영화광은 아니다. 저 뿐만 아니라 저 주변의 배우들도 보면 그렇다. 영화를 그렇게 많이 보지 않는다. 이런 경우는 있다. 하정우씨는 영화를 굉장히 많이 보는 편인데, <비열한 거리>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우체통에 폭탄을 집어넣고 길에서 열 몇 번을 돌아보는 장면에서의 연기를 얘기한 적이 있다. 인물의 불안감을 그렇게 끊임없이 돌아보는 것으로 표현한 건데, 놀라웠다. 타인의 연기를 보는 것이 연기에 절대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타인이 어떻게 연기하는가, 인물의 감정을 표현해내는가를 보는 것에서 인간에 대한 어떤 흥미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

 

초심으로 돌아가 꽉 짜여진 영화 만들고파!

 

관객4: 최동훈 감독님만의 연기연출의 방법과 김윤식 씨의 놀라운 연기 비법이 궁금하다.

최동훈: 데뷔할 때는 배우들이 무서웠다. 감독 말을 안들을 때도 많고, 걱정이 많았다. 영화연출법과 관련한 어떤 책을 읽었는데, 다 읽고서 느낀 건 간단하다. 칭찬하라. 그리고 연기주문을 어렵게 하지마라. 그 외엔 잘 모르겠다. 배우와 감독 사이의 작품에 대한 공유가 중요한 것 같다. 그리고 캐스팅이 중요하다. 그 외에 현장에선 별 말이 없는 편이다.

김윤석: 연기에 너무 예민해서, 무대에서 한걸음도 못 걷는 후배 배우를 보면, 어떻게 하면 그가 자의식을 잃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기도 한다. 저 같은 경우는 단순해지려고 한다. 너무 많은 것을 표현하려고 신경쓰다보면 의도했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일단 시작한 이상 그대로 두라는 얘기를 한다. 감정의 흐름이 내 의도대로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거고,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흥미롭게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거부하지 말고 맡겨보라는 것이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관객5: 마스무라 야스조와 감독님 외모가 닮으신 것 같다.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다음 영화 계획은.

최동훈: 마스무라 야스조 영화 좋아한다. 그렇지 않아도 마지막 멘트로 <아내가 고백한다>를 추천하려고 했는데, 신기하다(웃음). 여러분들도 기회가 되시면 그 영화를 꼭 한번 보셨으면 좋겠다. 다음 영화는 초심으로 돌아가서 꽉 짜여진 그런 영화를 해보고 싶다. (정리: 장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