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22. 12:03ㆍ201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시네토크
류승완 감독이 선택한 왕가위 데뷔작 <열혈남아> 시네토크
1월 22일 <열혈남아> 상영이 끝나고 영화전문지 『씨네21』 주성철 기자의 진행 하에 이 영화를 추천한 류승완 감독과의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홍콩영화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두 사람이 만난 만큼, 한 시간 반 동안 상영관 안은 내내 이야기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평소 시네마테크에서 홍콩영화를 함께 보고 싶었다는 류승완 감독은 영화 <열혈남아>에 대한 기억과 새로운 감회를 이야기하면서, 요즘 같은 때일수록 시네마테크에서 함께 영화의 본모습 그대로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시종일관 유쾌하게 진행되었던 이 날의 이야기를 일부 옮겨본다.
주성철(『씨네21』 기자): 예전에 이 영화를 보셨던 분들은 대만버전으로 기억하실 것 같다. 이번 상영에서 튼 홍콩버전은 영화에 쓰인 음악이 다르다. 공중전화 키스씬에서 <탑건> 주제곡을 리메이크한 노래가 나오는데, 큰 화면으로 보니까 좀 당황스럽다(웃음). 대만버전에서 쓰인 왕걸의 음악이 더 좋았다.
류승완(영화감독): 이 영화를 88년 동시상영극장에서 봤다. 등광영과 주윤발이 주연하고 왕가위가 각본을 쓴 <영웅투혼>이란 영화와 동시상영 하고 있었다. 당시 대사와 주제곡 가사의 번역이 아주 멋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던 대사는 장학우가 ‘나한테 너무 잘 해주지마, 이 빚을 갚을 수가 없잖아’라고 말하는 건데 그 대사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의리랄지, 십대들이 한창 좋아할 법한 그런 정서가 있었다. 오늘 <열혈남아>를 보면서 흥미로운 건, 처음 볼 당시에는 이 영화가 어른들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보니, 어른이 아니라 허세부리는 어린애들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에 대한 느낌이 그렇게 바뀌었다는 것에 기분이 묘하다. 그 때는 이 영화가 청춘영화라는 생각을 못했었다.
구룡반도에 와서 얼마나 힘들게 살았을까 싶다 - 주성철
주성철: 란타우섬같은 <열혈남아>의 배경이 된 공간들을 직접 가본 적이 있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재밌기도 했지만 잘 이해가 안됐던 점이, ‘왜 그렇게 유덕화나 장학우 같은 애들을 싫어하나’였다. 서로 조직이 다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너무 심하니까 잘 이해가 안됐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장학우의 고향집으로 나오는 곳이 예전에 대만으로 건너가지 못했던 국민당 사람들이 군락을 이루며 살기 시작한 곳이였다고 한다. 그쪽 사람들이 굉장히 자존심도 강하고 해서 집집마다 대만국기를 걸어 둘 정도였다고 하니 좀 이해가 되더라. 장학우나 유덕화 같은 인물들이 그 곳 출신인 건데, 다른 파 인물들이 장학우한테 ‘고향 가서 농사나 지어라’ 그런 얘기를 하는 장면이 있다. 약간은 홍콩원주민들 입장에서 볼 때 시골에서 온 사람들 같은 그런 느낌이 있는 거다. 그런 것들을 알고 영화를 보니 장학우나 유덕화를 보면서 쟤네들이 구룡반도에 와서 얼마나 힘들게 살았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류승완: 큰 화면으로 다시 보니 저예산으로, 속전속결해서 만들어졌다는 걸 알겠더라. 이를테면 유덕화가 비를 맞으면서 뛰어가는 장면에선, 유덕화 저 뒤 쪽으로는 비가 내리지 않고 사람들도 우산도 없이 그냥 걸어 다닌다(웃음). 당시 얼마나 전투적으로 영화를 찍었을지 생각하게 된다. 장학우가 길에서 맞는 장면 같은 경우 엑스트라를 따로 통제하지 않았다. 인물의 동선을 지킬 수 있는 정도만 확보해 놓고 설정 자체를 사람들이 둘러싸서 인물들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든 거 같다. 당시 이 영화가 크게 각인되었던 건 영화에서 새로운 표현방식으로 나왔던 스텝프린팅 같은 걸 텐데, 그런 효과들이 ‘미리 아주 치밀하게 계산된 건인가 아니면 환경이 만들어낸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이 영화의 촬영은 나중에 <무간도>를 만든 유위강이 했다. 스텝프린팅은 보통 저속촬영을 하는데, 처음 포장마차를 들어가는 부분은 살짝 고속처리가 되어있다. 이 영화가 예산을 크게 쓰지 않는 영화였기 때문에 밤 장면에서 적은 노출 안에서 그런 효과를 찾다보니 장님 문고리 잡듯이 그렇게 방법을 찾아갔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마지막에 경찰서 습격장면은 대낮에 스텝프린팅을 쓴걸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당시엔 스타시스템의 영화로서만 봤었는데, 지금 보니 참 흥미로운 저예산 영화다. 중간에 인물들의 상처 위치도 바뀌고, 옷도 바뀌기도 하고(웃음), 그런 영화의 빈틈들이 귀여웠다.
다시 보니 빈틈이 많아 귀여운 영화였다 - 류승완
주성철: 의사로 나온 사람이 장숙평 미술감독이다. 사실 몽콕 지역에 그런 식의 집이 잘 없다고 한다. 유덕화의 집이나 해변가 모텔도 그렇다. 그래서 사실은 굉장히 현실적인 공간에서 찍혀진 것 같지만, 미술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류승완: 이후 왕가위 영화에서의 공간은 촬영감독인 크리스토퍼 도일의 영향도 크지만 장숙평의 힘도 크다 생각한다. 그리고 이 영화 보면서 흥미로웠던 것이 배우들이다. 개인적으로 유덕화를 유난히 좋아했기 때문에, 영화가 별로였더라도 유덕화 때문에 기억에 남는 영화도 있었다. 특히 <강호정>에서의 유덕화를 정말 좋아했다. 그 또래 분들은 기억하실 텐데, 당시엔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이 이상한 열풍을 일으키면서 홍콩영화가 동시상영관에서 난리가 났었다. 영화를 보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고스란히 몸으로 체화해서 다녔던 시기였다. 유덕화나 주윤발의 의상이나 헤어스타일을 모두들 따라 했으니까. 동시상영관에서 싸구려 취급을 받던 그런 영화들이 당시 십대들에게는 이상할 정도로 열광을 일으켰던 시기였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볼 때 이렇게 멜로 축이 강했던 영화였는지 잘 몰랐다. <열혈남아>가 <천국보다 낯선>의 영향을 받았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천국보다 낯선>같은 감성이 홍콩느와르와 만나서 나오게 된 영화이다. 이 영화로부터 진짜 뒷골목의 세계가 영화에 나오기 시작했다. 영화 속에 리얼리티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무간도>같은 요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영화적 상상과 현실의 세계 사이에서 균형 잡힌 모습의 출발점이 아니었나 싶다.
주성철: 당시 영화에서 유덕화는 항상 마지막에 죽었다. 안 죽었다고 해도 보면 죽을 뻔한다든지, <암전>에서는 죽은 척 한다(웃음). 늘 유덕화는 죽음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다. 당시 홍콩사람들의 심리, 어떤 패배감이나 불안감 같은 것들이 유덕화의 몸을 통해 재현된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예전에 이 영화를 보면서 꽉 짜여진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굉장히 치밀하게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류승완: 나는 오히려 반대인 것 같다. 처음 볼 때는 빈틈없는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는 오히려 감성에 충만한 영화란 생각이다. 그리고 보통 <열혈남아>는 유독 왕가위의 다른 영화와 동떨어졌다고 생각하는데, 스텝프린팅 말고도 왕가위의 인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있다.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장만옥 장면처럼 말이다. 그런 방식의 커팅, 장만옥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 같은 것에서 왕가위스러운 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영화는 제작 당시 통제가 심했던 영화로도 유명한데, 시스템적인 제약과 어느 지점에서 자신의 스타일을 드러낼 것인가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부분들이 흥미롭다.
시네마테크에서 영화의 원체험이 계속되길...
관객1: 감독님이 홍콩영화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와 리메이크 해보고 싶은 영화는 어떤 게 있는지.
류승완: 진짜 좋아하는 건 <폴리스스토리1>이다. 심지어 촬영 현장에서 틀어서 보곤 할 정도다. <폴리스스토리1, 2>를 정말 좋아한다. 미학적으로 충격을 줬던 건 서극이 <독비도>를 리메이크한 <서극의 칼>이었다. 최근에는 두기봉의 <흑사회1> 같은 영화를 좋아한다. 예전엔 리메이크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요즘은 별로 그런 생각을 안 한다. 그래도 만약에 리메이크한다면 약간 완성이 덜된 영화들 일테면 <사망유희>같은 영화가 떠오른다.
관객2: 한국영화에서 <킬리만자로>나 <파이란> 같은 영화를 보면 <열혈남아>와 비슷한 점들이 있는데, 그런 내용적인 유사성이 이 영화의 영향인지, 장르적인 특성인지 알고 싶다.
류승완: 홍콩느와르의 영향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은 장현수의 <게임의 법칙>, 김성수의 <비트>같다. <게임의 법칙>은 캐릭터의 배치 같은 것에서 홍콩느와르의 영향이 분명히 드러난다. 박중훈은 홍콩느와르의 캐릭터를 한국식으로 완벽히 토착화 했다. <비트>는 촬영방식에 있어서 홍콩느와르와 한국적 스타일이 맞물려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낸 경우다. 송해성 감독이 <게임의 법칙> 조감독이었는데, 그 당시 홍콩느와르에서의 무너지는 청춘 같은 것들을 보면서 열광하고, 감정이입했던 세대들이 감독으로 데뷔 하면서 그런 영향이 분명히 드러난 듯하다. 송해성 감독은 지금 <영웅본색>의 한국식 리메이크버전을 만들고 있는데, 그 영화에는 <영웅본색> 뿐 아니라 당시의 홍콩영화들의 영향이 들어 있다. 그 세대의 감독들 중 홍콩영화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감독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주성철: 예전에 『필름2.0』에 있을 때 감독들에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면’을 물었던 적이 있는데, 거의 많이 꼽혔던 게 홍콩영화였고, 특히 <열혈남아>가 최고였다. 개인적으로 한국남성감독들이 영화에서 홍콩영화적인 영향이나 스타일을 무의식중에 담아내는 점들이 흥미롭다.
관객3: 홍콩영화에서 특정한 공간이나 장소가 나왔을 때 특별히 관심 가는 것이 있는지.
주성철: 사실 제가 그런 주제로 책을 쓰고 있다(웃음). 두기봉의 <흑사회>가 주는 공간적인 의미가 특히 흥미롭다. <흑사회>에서 사람들은 원숭이들이 뛰어다니는 야산에서 싸운다. 홍콩에 본래 원숭이가 많다고 한다. 싸우는 장면과 야생의 원숭이들이 겹쳐질 때 정말 지옥 같은 모습이라 공포스러웠다. <열혈남아>의 공간들도 인상 깊다.
류승완: 딱히 장소에 흥분하는 건 별로 없는 것 같고, 골든하베스트 로고에는 좀 흥분한다(웃음). 로케이션의 해석이 가장 흥미로웠던 건 <무간도>였다. <무간도>에서 보면 인물들이 자꾸만 옥상으로 올라가는데, 홍콩이란 공간에서 인물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 피해서 갈 수 있는 곳이 옥상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도심촬영이 힘든 촬영 여건상의 문제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공간적 맥락이 영화의 드라마에 다른 기능을 해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홍콩의 재해석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너무나 홍콩스러운 로케이션과 홍콩의 액션팀 만이 할 수 있는 액션연출로는 두기봉의 <대사건>과 서극의 <순류역류>를 꼽고 싶다.
주성철: 영화를 다시 보며 느꼈는데, 영화라는 게 원체험이 중요하구나 생각했다. 지금 시네마테크가 힘들지만, 시네마테크에서의 체험이 그런 원체험이지 않을까 싶었고, 그런 의미에서 전용관 문제가 잘 해결됐으면 좋겠다.
류승완: 전부터 시네마테크에서 홍콩영화를 같이 보고 싶었다. 그런데 홍콩이 프린트수급이 굉장히 까다로운 편이다. 개막식 때 조희문 영진위원장이 “DVD로도 영화를 볼 수 있는 요즘 같은 때에, 필름 상영과 관람을 고집하는 시네마테크와 관객들이 갑갑하다”는 얘기를 했는데, 오히려 그런 시대이기 때문에 함께 모여 필름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체험이 더욱 필요하다고 본다. 영화의 원판은 여전히 프린트이다. 단순히 화면의 크기 문제가 아니다. 마치 명화를 화집으로 보느냐 미술관에서 보느냐의 차이 같은 거다. 오히려 디지털 시대, 영화가 정보가 되는 시대일수록 시네마테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시네마테크가 어려운 상황에 있는데, 여러분들이 많이 관심을 가져주시고 자주 찾아주셔야 할 것 같다. 결국 관객들이 지켜낼 수 있는 것 같다. 시네마테크를 지키려는 관객들의 결집력이 중요하다. 불씨만 살아있으면 언제든 다시 지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장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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