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주앙 세자르 몬테이로와 친구들 - 탁월한 이야기꾼, 미구엘 고메스

2013. 5. 20. 14:12특별전/주앙 세자르 몬테이로와 친구들

탁월한 이야기꾼, 미구엘 고메스


이번주앙 세자르 몬테이로와 친구들" 특별전에서는 현재 가장 주목해야 할 이야기꾼인 미구엘 고메스 감독의 영화 두 편을 만나볼 수 있다. 장편 데뷔작인 <자신에 적합한 얼굴>(2004)지난해 베를린영화제에서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한 <타부>(2012)가 그 작품으로, 이번 기회를 통해 미구엘 고메스의 작품세계뿐 아니라 동시대 영화의 한 경향까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972년에 태어나 지금까지 3편의 장편과 6편의 단편을 발표한 포르투갈의 신예감독 미구엘 고메스는 전혀 다른 이야기들을 과감하게 연결해 각 이야기들의 의미를 더 풍성하게 만드는 독특한 화법의 영화들을 만들고 있다. 나아가 최신작 <타부>에 이르면 서사뿐 아니라 무-유성영화에서 극영화-다큐멘터리의 양식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극의 정서를 조율하는 연출력까지 보여준다. 그의 영화에는 대낮의 유령과 카지노에 빠진 할머니와 식민지 시대의 팝밴드가 다양한 영화적 양식 속에서 자유롭게 등장했다 사라진다. 또한 이토록 많은 이야기와 영화적 요소들을 혼합하면서도 일정한 톤과 리듬을 유지한다는 것도 미구엘 고메스의 이름을 기억해야 할 이유 중 하나이다.

 

<자신에 적합한 얼굴> - 

두 개의 이야기를 통해 경험하는 프란치스코의 내면

먼저 무기력한 우울에 빠진 프란치스코가 스스로 처방하는 우울증 약과 같은 영화인 <자신에 적합한 얼굴>을 보자. 오늘 서른 번째 생일을 맞은 프란치스코는 빨리 퇴근해 아내가 준비한 파티를 즐길 생각뿐이다. 하지만 그는 직장에서 갑자기 쓰러져 코피를 흘리고, 직장동료와의 불륜행위 중 자동차 사고를 당하기까지 한다. 모든 일이 나쁘게 흘러가는 와중에 프란치스코는 결국 발진으로 앓아눕고, 여기까지가 1연극"의 내용이다.

 


프란치스코의 우울한 일상을 유머러스한 태도로 묘사하던 영화가 기묘해지는 건 2풍진부터다. 몸이 아픈 프란치스코는 홀로 숲 속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가더니 작은 오두막에 들어가 모습을 감춰버린다. 대신 그 자리에 일곱 명의 어른이 차례로 등장해 유치한 놀이와 싸움을 반복한다. 어리둥절할지도 모른다.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 안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이빨이 동전으로 바뀌는 마술적 요소들이 튀어나온다. 아무리 봐도 1부와 2부는 별개의 이야기이며, 특히 2부는 현실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같지 않다. 그러다 갑자기 툭 끊어지듯 영화가 끝나면 관객은 이야기 속에서 길을 잃은 채 가벼운 현기증을 느낄지도 모른다.



어쩌면 따로 또 같은 이야기인 1부와 2부의 연결점에 대한 퍼즐을 풀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 영화의 미덕은 굳이 미로의 출구를 찾지 않아도 구불구불한 길을 걷는 산책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답이 없는 이야기 속에서어른 아이'들의 귀여운 행동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프란치스코의 외로운 내면이 슬쩍 드러나는 신기한 순간과 마주칠지도 모른다. 이처럼 서로 다른 층위에서 작동하는 두 개의 이야기가 마술처럼 서로의 의미를 풍성하게 하는 것은 미구엘 고메스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연출이 빛을 발하는 부분이다. 쉽게 따라잡기 힘든 이야기와 복잡한 스토리텔링은 미구엘 고메스의 두 번째 작품인 <우리들의 사랑스러운 8 Our Beloved Month of August>에도 이어진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구분조차 시치미 뚝 떼고 지워버리는 이 영화는 영화양식의 변주에 대한 미구엘 고메스의 관심을 잘 드러낸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이 통속적 멜로드라마의 서사와 만나 만들어진 작품이 바로 <타부>이다.

 

<타부> -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만들어내는 파동

세 개의 시간대와 세 개의 이야기로 구성된 <타부>는 한층 과감한 방식으로 다양한 이질적 요소들을 한자리에 모은다. 이 영화에는 18세기의 신비로운 모험과 21세기 대도시의 고독한 풍경, 식민지 시대의 가슴 아픈 멜로드라마가 있으며, 무성영화와 유성영화, 장르영화의 문법과 다큐멘터리적 촬영 등이 한데 섞여 기이한 영화적 매혹을 만들어낸다.



처음 등장하는 프롤로그는 18세기의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아내를 잃은 슬픔을 가슴에 묻고 모험을 떠난 탐험가는 슬픔을 견디지 못해 악어의 입에 몸을 던지고 만다. 그러자 세상을 떠난 아내의 유령이 악어의 옆에 등장하고, 서로 다른 모습을 한 두 연인은 늦게나마 다시 만난다.1실낙원은 현대의 리스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중년 여성 필라와 고집이 센 백발의 할머니 아우로라는 이웃이다. 어느 날 아우로라는 벤투라라는 남성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나고, 필라는 어렵게 벤투라를 찾아간다. 아우로라의 소식을 전해들은 벤투라가 눈물을 흘리며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자 영화는 2부로 넘어간다. 2낙원" 20세기 초의 아프리카 대륙을 배경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나눈 아우로라와 벤투라의 이야기이다. 낯선 땅에서 만난 젊고 매력적인 두 남녀는 첫눈에 서로 반하지만 아우로라는 유부녀에 임신까지 한 상태이다. 하지만 이들은 앞뒤 재지 않은 채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그 끝에는 가슴 아픈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통속적 줄거리의 멜로드라마는 지금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지만 그중 <타부>가 특별한 건 세 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가 각 에피소드의 맥락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신에 적합한 얼굴>의 두 이야기가 각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주석처럼 작동한다면, <타부>의 세 가지 이야기는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공명하며 예측하기 어려운 감정의 파동을 만들어낸다. 프롤로그는 한 편의 짧은 동화와 같고, 1부는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필라의 일상을 그리는 데 방점을 찍고 있으며, 2부는 가슴 아픈 멜로드라마이다. 따로 보아도 그 자체로 독립적인 세 개의 단편들이 한 영화 안에서 이어지며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빚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타부>가 단순히 새로운 서사 실험에 그치지 않고 멜로드라마의 틀 안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통속적인 감정을 건드린다는 것이다. 어쩌면 낯설게 느낄 수도 있는 서사 진행과 다양한 영화적 양식의 자유로운 결합을 통해진부한' 소재를 진부하지 않게 다룬다는 점만 보더라도 미구엘 고메스의 이야기 솜씨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만나볼 두 편의 영화를 통해 미구엘 고메스가 만들어놓은 이야기의 미궁을 헤매는 즐거움을 느껴보길 바란다.



 

김보년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