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20. 13:24ㆍ특별전/주앙 세자르 몬테이로와 친구들
몬테이로의 '신의 삼부작'에 대하여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의 초기작들이 온전하게 독창적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이미지와 사운드를 다루는 방식은 분명 실험적이고 급진적이다. 하지만 어딘가 프랑스의 누벨바그, 그리고 더 멀리로는 독일 표현주의의 분위기가 느껴지고, 진지하고 사회 비판적인 작품에서는 초기 소련영화의 자세가 감지된다. 사실은, “이것이 몬테이로 영화다”라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인다. 예를 들어 <실베스트르>와 <백설공주>는 한 작가의 손이 빚은 시대극(<백설공주>를 시대극이라 부를 수 있다면)이면서도 외형상으로 보아 전혀 다른 스타일의 영화다. 몬테이로는 전체 작품에 걸쳐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 몬테이로의 것이라고 불리는 스타일의 영화가 무엇인지 밝히는 건 가능하다. 그것은 아마도 <노란 집의 추억>으로 시작해 <신의 결혼식>으로 끝맺는 ‘신의 3부작’일 것이다. <바다의 꽃>에는 “모든 사물에는 특유의 움직임이 있다”는 대사가 나온다. 몬테이로 영화의 특유의 움직임은 ‘신의 3부작’에 깃들어 있다. ‘신의 3부작’은 한 남자의 일상에서 찾아낸 모험의 코미디다. 그는 ‘신’이라는 거창한 성을 지녔다. 삶이란 남은 불행을 달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신, 삶이란 항상 나빠지기 마련이라고 생각하는 신, 죽어 먼지가 되어서도 사랑하는 먼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 ‘신의 3부작’은 신의 발걸음에 관한 영화일까, 아니면 작가로서 영화를 관할하는 신이 창조한 영화일까.
몬테이로는 ‘3부작’의 주인공에게 ‘João de Deus’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전과 달리 주인공으로 전면에 등장하면서 스스로 ‘João de Deus’로 불리게 된다. ‘João de Deus’를 영어로 하면 ‘John of God’이다. 하나, 프랑스의 작가이론은 영화의 작가를 신에 비유한다. 프랑스 누벨바그의 영향을 받은 몬테이로는 창조주이자 신의 자격으로 영화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자신의 세계를 펼치는 데 있어 무한대의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기로 한다. 둘, ‘João de Deus’는 포르투갈 문학을 대표하는 국민적 시인의 이름이기도 하다. 극 중 몬테이로는 그를 흠모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미구엘 고메스는 <우리들의 사랑스러운 8월>에 ‘어머니’라는 시를 삽입해 둘의 존재를 동시에 불러낸다. 셋, 몬테이로는 ‘교권 반대주의’ 성향의 집안에서 성장했다. 3부작이 종교적인 작품은 아닐지라도 종교에 관한 어떤 작품이기는 하다. 몬테이로는 모호한 존재로서의 신을 믿음의 대상이라기보다 신뢰의 대상으로 여긴다. 넷, 존이라는 평범한 이름과 신이라는 성의 결합은 캐릭터의 공허함을 암시한다. 이름대로 극 중 주앙은 고결한 신분의 인물처럼 행동하면서도 종종 길거리를 전전하는 신세로 전락하며 매번 이중의 정체성 사이를 오간다.
<노란 집의 추억>은 자막과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자막은, 어릴 적 몬테이로와 친구들이 ‘노란 집’으로 호칭되던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가련한 새끼’라고 놀렸음을 일깨운다. 내레이션은 늙어서 느리고 비참해진 신세에 대해 읊조린다. 3부작의 주인공 주앙은 중년을 지나 노인의 시간에 진입한 남자다. 그의 몸은 우아하고 느리게 움직이고, 그의 점잖은 목소리는 중간 톤을 벗어나는 법이 없으며, 그의 침착한 성격은 힘든 사태에 임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고결하게 늙어가는 상류층 남자가 아니다. 그는 제대로 된 직업이 없어 궁색한 형편인데, 진짜 문제는 그의 저속한 습성이다. 어린 소녀를 보면 넋을 잃는 소아성애자이고, 여성의 음모를 ‘아리아드네의 실’이라 여겨 수집하며, 머릿속은 사회통념에 어긋나는 욕망으로 가득하다. 그런 남자를 영화라는 우주의 중심에 둔 3부작은 그가 오고 가는 여정을 집요하게 담는다. 그 여정은 사소한 일상으로 채워져 있지만, 때때로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 사건이란 게 참 어처구니가 없어서, 3부작은 찰리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튼이 등장하는 슬랩스틱 코미디를 떠올리게 한다. <시티 라이트>의 떠돌이 찰리가 술에 취한 백만장자의 양면을 경험하는 것처럼, <셜록 주니어>의 버스터가 영화와 현실 사이에서 모험을 벌이는 것처럼, 주앙은 백만장자와 노숙자의 삶 사이를 오가면서도 별로 동요하지 않는다. 삶의 기준이 보통 사람과 다른 까닭에, 그의 행동은 돈이 있으나 없으나 변함이 없다.
슬랩스틱 코미디의 주인공이 웃음을 주는 것과 비교해, 주앙은 웃음과 조롱의 대상이다. 그 웃음과 조롱은 여성에 대한 끊임없는 집착 탓이다. 주앙은 일상의 행위 속에 성적 환상을 풀어놓는다. 그의 메마른 몸은 육체가 유한한 존재임을 절감하게 만들고, 대상을 갈망하고 집착하는 몸짓은 유한성에 대한 저항으로 읽힌다. 사디즘에 바탕을 둔 위트가 영화의 에너지를 낳는다는 점에서, 줄기찬 집착은 역설적으로 그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노란 집의 추억>의 주앙은 하숙집 여주인의 젊은 딸을 범하기를 꿈꾼다. 그녀가 몸을 씻은 욕실에 들어간 그는 거품과 물을 들이마시다 이빨 사이에 낀 음모를 발견한다. 그렇게 시작된 집착의 여정은 <신의 결혼식>이 매듭을 지을 때까지 계속된다. 모든 것을 잃은 주앙은 감옥에 면회 온 여인에게 가슴을 보여 달라고 주문한다. 경비원이 보는데 어떻게 그러냐는 질문에, 그는 겨드랑이를 긁는 척하며 단추를 푸는 기법을 알려준다. 연작의 가운데 위치한 <신의 코미디>에서 주앙의 집착은 정점에 달한다. 정육점 주인의 딸을 보고 [3] 한눈에 반한 주앙은 15살 소녀를 저녁식사에 초대한다. 우유로 채운 탕에 그녀를 앉히고 스펀지로 마사지해주던 그는 흥분을 가누지 못하고 탕에 빠진다. 그녀가 배가 아프다고 말하자, 백여 개의 계란이 그득한 요상한 기구로 배탈을 치료하겠다고 나선다. 계란은 알알이 부서지고 그는 기구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어 욕망을 달랜다. 계란이 눈에 들어가 눈이 따갑다. 소녀가 떠난 뒤, 그녀의 작은 팬티를 입어보다 한 가닥 음모를 손에 쥔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그녀가 목욕한 우유를 걸러내 음모의 뭉치를 구하고, 남은 우유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특유의 맛을 내는 데 사용한다. 성적이기는커녕 역효과마저 우려되는 기이한 장면의 연속을 통해, 주앙이라는 인물은 역겹고 반사회적인 인물로 화한다. 그러나 몬테이로라는 감독과 그의 영화에 다가서려면 그 거북함, 그 불편함의 심미적 영토를 수용해야만 한다.
포르투갈에서 ‘노란 집’은 정신병원을 의미한다. 극 중 주앙은 여러 차례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는데, “포르투갈에서 태어난 것이 비극이다”라는 대사는 감독 자신의 말이기도 하다. 좌익 지식인으로서 몬테이로는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환멸, 포스트 살라자르 시대의 반 군국주의, 비생산적인 활동을 빌린 반 자본주의’ 등의 정서를 주앙 드 데우스라는 인물에 반영했다. <노란 집의 추억>의 엔딩에서 주앙은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에서 튀어나온 모습의 뱀파이어로 변신한다. 몬테이로는 초기작 <나는 이 검으로 무엇을 하는가?>에서 이미 <노스페라투>의 장면들을 삽입한 바 있다. <나는 이 검으로 무엇을 하는가?>에서 뱀파이어가 노동자들을 억압하는 악으로서 나토 세력을 은유한다면, <노란 집의 추억>의 뱀파이어는 현실의 균열을 초래하는 유령의 역할을 맡는다. 실제로 몬테이로의 외모는 노스페라투를 연기한 막스 슈렉이란 배우를 빼닮았다. 비쩍 마른 몸, 해골 같은 큰 머리, 움푹 들어간 눈, 기다란 코와 뾰족한 귀는 주앙, 즉 몬테이로를 살아있는 흡혈귀로 받아들이도록 이끈다. 성적으로 별 매력이 없는 몬테이로의 외모는 흡혈귀와 동일시되면서 호색한의 지위를 습득하고, 극 중 수많은 여성들이 그의 기이한 성적 의식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이유를 제공한다(몬테이로의 영화에 출연했던 평론가 장 두셰는 현장에서 여배우들이 몬테이로의 매력에 빠지는 걸 보았다고 했는데, 아마도 인물의 매력이 현실 밖으로 삐져나온 게 아닌가 싶다).
캐릭터의 표현에 막대한 자유를 부여한 반면, 몬테이로는 현장에서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특히 촬영감독은 일과 관련해 조금의 자유도 누리지 못했다고 한다. <신의 코미디>를 찍을 때 가진 인터뷰에서, 몬테이로는 카메라가 절대로 드라마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독립된 관찰자로서 기록할 뿐인 카메라는 피사체로부터 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며 (대부분의 경우) 움직이면 안 된다(그래서 캐릭터의 움직임을 놓칠 때도 있다). 촬영 도중 구름이 햇빛을 가려 어두워지거나 다시 해가 나와 밝아져도 상관없이 카메라는 멈추지 않고 피사체를 바라보고 기록한다. 지루할 정도의 롱 쇼트가 영화를 채우는 것은, 그러니까 몬테이로의 의지다. 그 밖에, 특별한 경우 외에는 자연 조명을 사용해야 하고, 대사는 물론 음악도 종종 현장에서 촬영 도중 녹음되었다. 클로즈업을 절제한 결과, 몇 번 나오는 클로즈업은 거대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연작의 마지막 편인 <신의 결혼식>의 끝 장면이 대표적인 예다. 물경 7시간을 넘기는 연작이 막을 내릴 때, 강가에 선 여인이 “이렇게 이 코미디는 끝을 맺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은 거의 종교적 환희를 안겨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겨운 장면을 중화하는 이러한 순간은 몬테이로 영화의 변증법적이고 대위법적인 측면을 드러낸다.
몬테이로의 영화는 문학, 회화, 고전음악, 영화를 인용하는 데 인색한 법이 없다.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시로도 모자라 철학적이고 비평적인 견해까지 더해지면, 몬테이로의 영화는 난공불락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신곡』과 『아라비안 나이트』 너머로 휠덜린이나 세나의 시에 대한 교양까지 요구되는 지경에 이르면, 이 말썽꾼에 대한 다른 인식이 절실함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몬테이로는 극단의 예술가다. 신성함과 천박함의 양극단에 선 그를 완벽하게 뒤따르는 건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다(사실 그럴 필요조차 없다). 지적 속물이자 염세주의자로서의 그와 성적인 환상에 집착하는 추잡한 노인으로서의 그가 전면에 나선 건 <노란 집의 추억> 이후부터다. 영화 역사상 전무후무한 악동인 그의 진면목을 확인하려면 ‘신의 3부작’, 그중에서도 가장 시적이고 독창적인 <노란 집의 추억>에 우선 접근해야 할 것이다. 모차르트의 음악이 얼마나 슬픈지 깨달으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다. <노란 집의 추억>의 생일파티 장면에서, 주앙이 사랑하는 여자가 모차르트 클라리넷협주곡의 아다지오를 연주한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모든 사람이 떠나고, 홀로 남은 여자는 연주를 중단하지 않는다. 그 장면은 (곧 이어지는 창녀의 죽음을 아는듯) 아주 짧은 순간에 모차르트 음악의 정수로 길을 튼다. 그러한 불가해함이 문득 말을 건넬 때, 나는 머뭇거리게 된다. “당신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용철 / 영화평론가
* 참고
Lucia Nagib, 「João de Deus Trilogy」, 『The Cinema of Spain and Portugal』, Alberto Mira, Wallflower Press(June 8,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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