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2. 9. 18:35ㆍ특별전/클로드 샤브롤 추모 영화제
오늘 부터 여섯 번에 걸쳐 연재하는 샤브롤의 회상록은 클로드 샤브롤 감독이 1993년 프랑스 대표 주간지인 ‘텔레라마’에 기고한 것이다. '텔레라마'지는 지난 2010년 9월, 작고한 샤브롤을 기리기 위해 회상록의 여섯 편을 다시 한번 공개했다. 이 회고록은 여전히 미지의 작가로 남아 있는 샤브롤의 삶과 영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12월 14일부터 열리는 ‘클로드 샤브롤 추모전’ 기간에 맞춰 특별히 파리에서 영화, 사진 등의 예술작업을 하고 있는 김량씨의 번역으로 연재해 소개하기로 한다. (김성욱: 편집장)
<제1화> 클로드의 어린 시절: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조건에서 태어났다. 왜냐하면, 태어나기도 전에 거의 죽을 뻔 했으니까! 출생하기 6개월 전이라고 한다. 할머니 집에서 목욕을 하던 엄마가 그만 가스 온수기가 터지는 바람에 병원에 실려간 것이다. 나를 임신하고 있던 엄마는 질식한 상태로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고, 의사들은 태아가 이미 사망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산할 것이라 진단했다.
어쨌거나 나는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고, ‘온수기 사건’때문에 나의 부모님은 내가 분명 정신박약아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버지는 파리 10구의 포부르그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온수기 사건’에서 생존한 아들이 손가락을 입안에 집어넣고 아무 말 없이 창문 밖 허공을 응시할 때마다, 아들이 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여기며 혀를 찼다. 나는 가스 냄새에 아주 민감한 아이였고, 아직도 그러하다. 어디서 가스냄새만 나면 현기증이 난다.
내가 만 3살이 넘자 부모님은 그제서야 안심했다. 말이 더딘 아이였던 나는 3살을 겨우 넘어서야 말이 트였기 때문이다. 말이 트이자 나는 뭐든 묘사하며 떠들기 좋아했다. 곧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들뿐만 아니라 이웃들의 행태도 상세히 보고하기 시작했다. 이웃집 아무개가 집에 들어올 때 토마토와 샐러드를 들고 왔으며 엄마가 그걸 보고 동시에 하품을 하더라는 등, 사소한 일들을 상세하게 묘사하는 즐거움에 흠뻑 빠졌고, 부모님은 그런 나를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며 경청했다.
정신박약아가 될 줄 알았던 아들의 탁월한 언어 묘사력에 감탄한 부모님들을 더욱 감탄에 빠뜨린 계기는 축음기가 제공하였다. 당시(1930년대)에 그 귀한 축음기와 LP디스크를 선물 받은 부모님은 허구헌날 유행가를 틀고 즐거워했다. 만 3살에 불과했던 나는 당연히 글을 읽을 줄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노래 제목을 정확하게 찾는데 귀신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이러하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대신 나는 디스크 표지에 적힌 노래 제목들의 색깔과 그림, 그리고 글 모양새를 기억했다. 아버지가 ‘클로드, <양치기야 비가 내린다네>를 틀어주렴’하면 나는 기가 막히게 그 노래가 실린 디스크 위에 바늘을 얹어 아버지를 흡족하게 해주었다. 물론 부모님은 나 스스로 혼자 글을 깨친 것이라고 믿고 자랑스러워했으며 나는 결코 나만의 비법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만 네 살이 되던 해에는 부모님이 애지중지하는 축음기가 그만 고장이 났는데, 그걸 간단히 고쳐서 부모님으로 부터 ‘천재’소리까지 듣게 되었다.
물론 부모님을 내손아귀에 넣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면 나는 누가 뭐래도 ‘독자’니까! 독자, 그건 참으로 대단한 거다. 믿을 수 없는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자아를 형성하니까! 내가 어렸을 때는 모든 주의가 나에게 집중되었고,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세 번의 결혼을 거치며 만난 세 명의 여자들은 내 앞에서 아주 꼼짝을 못했다. 독자로 자랐을 경우에 좋은 조건만 따지게 되는 까다로운 성격을 형성한다고 흔히 말한다. 그렇지만 내가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였다고 상상하지는 말지어다. 나는 사람들에게 늘 친절했으며, 예의가 발랐고, 항상 즐겁게 대했다.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면, 나는 주의가 좀 산만했다. 어딜가든 부모님은 나를 잃어버리기를 밥 먹듯 하였다. 결국 엄마는 외출할 때마다 나를 강아지처럼 끈을 묶고 다녔다. 내게 있어서 그건 참으로 불쾌하고 모욕적인 처사였다. 엄마를 잃어버리는데 도사였던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눈물을 머금고 엄마에게 묶여 다녀야만 했다. 걸작은 바로 백화점 ‘봉마셰’에서 만들어졌다. 엄마를 잃어버리고 난 뒤면 여지없이 나는 쇼윈도에 전시되었다. 그리고는 ‘클로드 샤브롤이 엄마를 기다리고 있어요’라는 안내 방송이 나갔다. 나는 그 순간의 스릴이 너무 재미있어 죽을 지경인데 허겁지겁 달려온 엄마는 가차 없이 내 면상에 귀싸대기를 날렸다. 그 정도면 약과다. 엉덩이를 맞는 날은 최악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체벌이 가장 끔찍했다. 부모님은 손버릇이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어쩌다가 가끔 엉덩이를 때릴 때마다 ‘혈액순환에 좋다!’라고 소리를 칠 때면, 참으로 싫고 증오스러웠다.
부모님은 독실하고도 엄격한 가톨릭 신자들이었고, 나는 그 영향아래 교육을 받고 자랐다. 인간의 추악한 면이 자주 등장하는 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쉽게 인정하지 않겠지만, 나는 선과 악을 믿으며 선에 더 민감하다.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슬퍼서 견딜 수가 없다. 나의 감정선은 이렇게 가톨릭 교육과 연관되어 있다. 내 부모님은 프랑스 지방의 전형적인 부르주아 가문 출신들이고 파리로 가는 기차 안에서 만났다고 한다. 친가는 대대로 이어진 약사 집안이었고, 나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약국에서 놀았다. 파리 10구 포부르그에서 약국을 운영했던 아버지는 내가 만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사업을 넓히려고 오를레앙에 큰 약국을 열면서 우리 가족은 파리를 떠나게 되었다. 사업 자금을 많이 융통했었는지, 형편이 줄어들어 오를레앙의 자택은 조그마한 아파트였다.
아버지와 나는 손발이 잘 맞는 친구 사이였지만 엄마와는 그저 애교를 잘 떠는 아들에 불과했다. 엄마는 늘 내게 심부름을 시켰다. 살림이 쪼들리자 엄마가 경제권을 쥐락펴락했다. 하여 나는 엄마가 아버지보다 더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집안에서 호령하는 사람도 엄마였다. 나는 그래서 엄마와 친구가 될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왕이라고 생각했는데 왕에게 밀가루를 사와라, 치즈를 사오라고 명령하는 엄마와 친밀하게 지낼 이유가 없었다. 부모님을 제외하고 내가 제일 좋아한 사람은 파리에서 극장을 운영하던 삼촌이었다. 덕분에 나는 만 네 살 때 처음으로 영화를 보았고, 그 영화제목은 아직도 기억한다: <안소니 에드버즈 Anthony Adverse>(1936). 영화와 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이나 다름없었다. 만 다섯 살 때, 나는 집안에서 뒹구는 별의별 책을 다 주어 읽었는데, 그 중에 ’세갱 아저씨네 염소’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책 덕분에 나는 늑대에게 갈갈이 뜯겨 먹히는 염소에 관한 악몽을 꾸기 시작했고, ‘불쌍한 염소야! 불쌍한 염소야!’ 라고 소리치며 잠꼬대를 하기도 했다. 책에는 염소가 뜯어 먹히는 장면이 참으로 끔찍한데, 지금 떠올려도 끔찍하면서도 멋있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나는 나이와 맞지 않는 책들을 읽어대곤 했었다. 만 여섯 살 때, 이미 세익스피어의 <맥베드>, 그리고 코르네이유의 <르 시드>, <오라스> 등등을 읽었으니 할 말 다했다. <맥베드>의 마녀 셋은 정말 무서웠지만, 코르네이유는 참으로 멋졌다. 부모님은 내가 무얼 읽던지 전혀 관여하지 않고 사달라는 책은 모두 구해주었다. 왜냐면 나는…독자니까!
그렇지만 나는 참으로 못생긴 아이였다. 게다가 사팔뜨기였으니! 나는 안경을 쓰고 세익스피어를 읽는 다섯 살짜리 늙은 소년이었다. 못생긴 얼굴이 내게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외모는 내게 콤플렉스를 안겨주던 동시에 나를 감추는 가면이 되었다. 나의 못난 얼굴은 나를 즐겁게 해주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 못생긴 외모 덕분에 나는 연극 단체가 주관한 ‘인상 찡그리기 대회’에서 늘 일등을 차지할 수 있었으니까! 결론적으로 나는 좀 특별한 구석이 많았던 소년이었다. 또래 아이들보다 조숙했고, 그래서 고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른 아이들을 눈꼽만큼도 부러워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나의 친구들은 오히려 성인들이었다. 특히 나는 우리 집 건물의 관리인 부부와 친하게 지냈다. 그리고 장폴. 그는 나의 유일한 친구였다. 나는 단박에 그에게 흥미를 느꼈는데 그건 그의 아버지가 딴 여자와 결혼을 하기위해 이혼을 했다는 엉뚱한 이유 때문이었다. 1930년대 프랑스에서 이혼은 금기 사항이었고, 금기를 깨뜨린 아버지를 둔 장폴은 내게 색다른 존재로 다가왔다. 우리는 매일 아침 만나서 단어를 가지고 이야기를 만드는 게임을 즐겼다. 아홉 살 때까지 장폴은 내게 우정을 가르쳐준 유일한 동무였지만,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그와 헤어지고야 만다. 이유는 칼슘 결핍증에 걸린 나의 대퇴골 때문이었다. 나는 학교도 그만두고 집에 틀어박혀 지내야 한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는데, 슬픈 일은 아니었다. 그때부터 나는 집에서 권력을 독점하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으니까….!
[특별연재]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 보러가기 <제6화> 명성에 속지 않는 영화감독이 되다 <제5화> 영화를 향한 꿈과 방탕했던 20대 시절 <제4화> 괴짜 영화광의 기억 <제3화> 시네클럽과 첫 사랑 <제2화> 권력에 취한 소년 클로드 <제1화> 클로드의 어린시절: 나는 왕이로소이다 해당 회차를 클릭하시면 연재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에서 출처>
김 량 번역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영화 예술의 다양성을 꿈꾸는 아티스트
http://blog.naver.com/image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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