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22. 19:57ㆍ2012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CineTalk
지난 17일, 민규동 감독이 추천한 영화 <토토의 천국> 상영에 이어 시네토크가 진행되었다. 민규동 감독은 내내 차분하고 조근조근한 어투로 이 영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전했고, 이야기는 영화작업에 대한 현재의 고민과 생각들로 이어졌다. 독특한 퍼즐 같은 영화지만, 그러한 면모 자체 보다는 영화가 담고 있는 선택의 문제와 어떤 위안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것이 컸던 시간이었다. 그 날의 대화의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이 영화를 오래전, 지금은 없어진 뤼미에르 극장에서 봤었다. <시네마 천국>이 개봉했을 무렵이어서 아마 이 영화도 <토토의 천국>이란 제목으로 개봉한 것으로 기억한다. 이 영화를 추천해주신 민규동 감독님은 사전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데뷔작인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를 만들 때 영향을 주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이 영화와 본인의 작업 간에 어떤 유사성이 있었을지도 궁금하다.
민규동(영화감독): 이 영화를 극장에서는 못 봤었고, 비디오테이프에 복사해서 아주 여러 번 닳도록 봤었다. 첫 번째 영화를 만든 건 그로부터 4년 정도 뒤인데,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라는 제목만 가지고 이야기를 구상할 때 <토토의 천국>을 다시 꺼내들었었다. 당시 두 편의 영화가 큰 영향을 줬었는데, 하나는 키에슬로프스키의 <블루>라는 영화였다. <블루>에서 주인공이 남편과 아이의 죽음을 놓고 어떻게 남은 생을 살아갈지의 느낌과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서 좋아했던 여자친구를 잃은 한 고등학생의 감정적인 지점을 같이 놓고 많이 얘기했었다. 또 하나는 어떻게 하면 좀 더 드라마나 문학적인 영화가 아니라, 영화적인 것, 영화 고유의 이미지를 찾다가 <토토의 천국>을 다시 떠올렸던 것 같다. 글로 이 영화를 다시 정리하면 이 영화를 이해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영화 이외의 다른 텍스트로는 전달이 굉장히 어려운 이미지들로 구성되어 있고, 영화적 화법과 언어를 갖고 있다고 느껴졌다.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부분도 좀 있다. 이를테면 둘이 침대에 누워서 비밀스런 이야기를 나누는 느낌이나, 과거나 현실을 오가는 방식, 설명적이지 않고 퍼즐처럼 흩뜨려놓은 수수께끼들이 나중에 조합되는 방식과 같은 것들을 많이 영향 받았었던 것 같다.
김성욱: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의 최근작인 <미스터 노바디>도 비슷한 느낌이 있다. <미스터 노바디>는 근본적으로 두 개의 서로 다른 퍼스펙티브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바라보는 미래에 대한 생각과 노인이 거꾸로 과거를 되돌아볼 때, 그것이 동일 인물이라면 중복되거나 플러스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 동시에 <토토의 천국>의 토마라는 인물이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때, ‘미스터 노바디’와 같이 아이덴티티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민규동: <미스터 노바디>는 다 보진 못하고 어느 순간 멈췄던 것 같다. 절반정도 봤을 때까지의 느낌만 기억하고 있는데, 그 때의 인상은 감독이 어떤 긴 방황 끝에 첫 작품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느낌이었다. 이미지를 구성하는 방식이나 성장하지 못한 어떤 순간들을 계속 포착하는 방식에서 첫 작품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성욱: 계속해서 과거로 돌아가고, 특히 유년기 시절의 상처가 중년, 노년이 되어서까지 진행되어가는 것은 영화적으로 보면 <현기증>같은 영화의 느낌도 들기도 한다. 왜 그런 일들이 반복되고, 동시에 어린 시절의 상처에 연연하게 되는가 하는 점들이 문득 생각이 들었다.
민규동: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현실에 대해 불만족스러울 때 그것으로부터 탈출하는 방식을 찾게 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어떤 트라우마나 상처, 기억 같은 것인 것 같다. 사실은 내가 훨씬 더 좋은, 강한 운명에 서있었는데 타인의 방해로 그것이 엇갈려버렸고, 어쩔 수 없이 떠밀렸다고 여기는 자기 열등감에 빠져 자신을 방어하고 보호하는 방식이 있는 것 같다. 지워지지 않는 열등감이나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었다는 상태에서 그를 버티게 할 수 있었던 아주 강한 최면 중의 하나가 알 수 없는 다른 힘으로 인해 내 운명이 바뀌었다는 믿음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명백히 의미에서 결코 성장하지 않은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는 듯하다가, 마지막엔 모든 걸 놓고 이상하게 성장하고, 그리고 죽음을 통해 다시 성장을 멈추는 아이러니컬한 면이 있다.
김성욱: 자크 반 도마엘 감독은 작업을 하는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미스터 노바디>같은 경우는 6년 이상의 시나리오 작업이 걸렸다고 하는데, 이런 종류의 영화는 어떻게 작업이 될까 궁금하다. 영화의 전체적인 것들을 구상해나갈 때 이미지들을 떠올리고 그 이미지들의 배치에 시간이 소여 됐을지, 각각의 장면들이 어떻게 배치되는지를 사전적으로 결정해 놓게 되는지 궁금하다.
민규동: 연출자로서 이 영화를 볼 때, 제일 먼저 그 질문이 떠올랐었다. 과연 이 영화를 완벽하게 구상을 다 하고 본인의 방식대로 한 것인지, 아니면 완벽하지 않은 소스들을 가지고 편집하는 과정 중에 발견한 것인지 궁금했었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의 경우엔 세 달 정도 시나리오를 쓰고 바로 촬영에 들어갔기 때문에, 굉장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들어간 셈이다. 이미지의 배치에 대해서는, 이렇게 반복적으로 씨를 뿌리고 다시 거두고 배치하는 과정은 그것이 미리 자기 안에서 정의되지 않은 상태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드라마와 달리 아주 구체적인 이미지들, 반복되는 미장센 같은 것들은 짧은 시간 안에 구상할 수 없는 것들이다. 아마도 자크 반 도마엘 감독이 영화의 구상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이유는 이야기로 정리하지 않고, 이미지로 압축하고 반복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김성욱: 영화에서 하나의 음악이 여러 가지 효과로서 반복적으로 쓰인 것이 인상적이다. 사실 이런 방식으로 음악을 쓸 때 장단점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이 과거의 기억과 연관지는 점에서 장점일 수 있지만, 지나치게 구조적이거나 너무 설명적일 수도 있다.
민규동: 이 영화의 형식이나 스타일이 아니었다면 그런 지적이 맞았을 것 같다. 영화 자체가 구조적으로 반복과 퍼즐링이 쓰여서 그에 따라 효과적으로 음악이 쓰인 게 아닌가 생각한다. 죽은 자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해서 죽은 자의 내레이션으로 끝나는 방식 역시 이 영화에 어울리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음악감독이 자크 반 도마엘 감독과 형제인데, 항상 함께 작업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김성욱: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민규동: 이 영화가 단지 대단히 감각적이고 재능이 뛰어난 감독의 작품이라는 것 이상의 여운을 남기는 것은 엔딩의 묘한 선택 때문인 것 같다. 주인공 토마는 평생 자기보다 조금 더 뛰어난 사람에게 밀려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뺐기고, 마지막에도 복수의 에너지로 겨우 버티면서 끝까지 정말 빼앗긴 삶을 살다가 어느 순간에 뭔가를 깨닫는다. 상대방의 삶이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 내가 되찾을 수 없는 여인이나 죽은 누이, 그 모든 현실을 인정하고 내가 믿었던 그 남자의 삶을 찾는다. 알프레도로서 죽게 되는데, 그 죽음이 어떻게 보면 가장 비극적 죽음이 될 수 있는 순간에 그가 정말 행복한 것인지, 불행한 것인지 해석하기가 묘하다. 모든 인간에게도 자기 운명을 되찾고 행복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는 작은 위안이 있는 것 같다. 재가 되어서 날아다니며 노래 부르면서 즐거움을 만끽하는 모습이 작은 위안을 준다. 그 여운이 없었다면 그냥 장난 같은 영화가 됐을 수도 있는데, 영화의 지적인 게임들은 다 증발되고서 남는 엔딩의 느낌이 정말 좋고, 인상적이다. 극중 대사처럼, 우리는 어쨌든 혼돈 속에 있고 불안하게 달리고 있지만, 어쨌든 파란불이라고 위안을 주는, 그런 느낌이 있다.
관객1: 마지막에서 자신과 화해하면서, 자신이 부러워했던 삶이 자신을 부러워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나름대로 자기의 문제를 풀었다고 생각된다. 블랙코미디 같으면서도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이 영화와 감독님의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이 어떤 연결점을 갖는지 궁금하다.
민규동: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를 만들 때 성장을 강요하는 그 틀 자체가 공포가 아닐까 라는 생각했기 때문에 주인공이 자살하는 것의 의미를 성장을 거부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사회화를 거부하고 어른이 되기를 멈춘 아이의 메시지를 모티브로 취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토토의 천국>을 떠올렸던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자기 삶을 한 번도 인정하지 않은, 성장할 기회를 놓치고 퇴행상태에 있는 한 남자가 그것을 스스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성장하는지는지, 그런 것들에 대한 연관이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당시에 'N세대식 네트워크'라는 표현을 어느 평론가가 썼었는데, 마구 흩어져있는 이미지들이 서로 네트워크 되어서 하나의 의미로 통합될 수 있는지에 대한 것, 이미지의 교차로 의미의 교차를 찾는 것과 같은 방식에서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서 소녀의 감성과 귀신이 접합되는 방식을 찾았던 것 같다.
관객2: 마치 자신이 알프레도가 된 것처럼 행동하는 토마의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민규동: 토마한테는 마지막 카운터펀치가 필요했던 것 같다. 어떻게 해도 알프레도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했고, 그 순간에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서 원했던 자리가 바로 알프레도로 죽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오히려 자신의 인생으로 되돌아와 죽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행복해 했던 것 같다. 상대가 자신을 부러워했다고는 하지만 그건 말로 위안이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의 속성이다. 그는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이제 무엇을 찾을 것인가. 지금까지 증오로 버텨왔는데, 그리워할 여자도 없고 내 삶의 모티브와 에너지가 없으니 그 순간에 카운터를 날리는 그 선택이 기묘하고 재밌다.
김성욱: 작가의 경우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느꼈던 민감한 부분들을 자신의 작품 안에 계속 반복해서 표현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잘 모르다가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그걸 알면서 계속 변주해가는 경우도 있을 것 같다. 이 작가를 봤을 때도 그런 민감한 느낌이 있을 것 같다.
민규동: 이 감독이 많은 작품을 만든 편이 아니다. 다큐멘터리 작업도 하고 워낙 재능이 다양한 사람이어서, 극영화와는 다른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새로운 작품을 들고 나타나서 아주 오랫동안 준비했다고 하니까, 이 감독이 좀 더 쉬운 길이 아니라 자기 자신, 그 소용돌이 안에서 무언가 다시 찾으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영화 작업에서의 괴로움과 고통이 어디서부터 잘못 됐을까, 어떻게 풀어야할까를 오늘 영화를 다시 보면서 계속 생각했다. 내가 원했던 나의 궤도에 서있다는 느낌을 받고 싶다. 분명 다른 가능성이 있을 텐데, 내가 노력으로 그것을 찾을 수 있을까, 운명적으로 정해져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최근에 친구에게서 위로의 문자를 받았다. ‘네가 하는 일에 대한 불만족을 멈추지는 말되,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라’고 하더라. 마음엔 들지 않지만, 계속 사랑해야만 어떤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더 뜨겁게 안아야하지 않을까.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정리: 장지혜(관객 에디터) 사진: 최용혁(자원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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