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조디악> - 땀으로 다시 쓴 사건 일지

2015. 1. 31. 13:002015 10주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봉준호 감독의 선택 - 조디악 Zodiac


2007│157min│미국│Color│35mm│청소년 관람불가

연출│데이빗 핀처 David Fincher

출연│제이크 질렌할, 마크 러팔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상영일정ㅣ 2/1 18:00(시네토크_봉준호), 2/12 16:40

“고요한 리듬으로 뼛속까지 스며드는 공포와 집착. 헐리웃 장인들의 집착에 가까운 필름메이킹.”


땀으로 다시 쓴 사건 일지


2007년 <조디악>이 개봉했을 때, 감독의 이름을 다시 확인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신이 이 영화에 고개를 갸웃거리든 눈을 반짝이든, <조디악>의 데이빗 핀처는 이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그가 아니다. <세븐>(1995), <파이트 클럽>(1999), <패닉룸>(2002)에서 선보인 그 특유의 현란하고 감각적인 스타일 대신 <조디악>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건조하고 치밀한 리얼리즘의 세계다.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던 스프린터가 갑자기 방향을 선회하며 일대도약을 시도하는 뜻밖의 순간이랄까. 고전적인 어법으로 꾹꾹 눌러쓴 핀처 버전의 수사 일지에는 혈흔 대신 땀으로 얼룩덜룩하다.


그로서는 새로운 소재는 아니다. <조디악>은 1960년대 말 미국 샌프란시스코 인근에서 일어난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수사극이다. 샌프란시스코의 언론사로 배달된 범인의 편지를 시작으로 일명 ‘조디악 킬러’를 잡으려는 주인공들의 실패의 역사가 22년의 세월에 걸쳐 펼쳐진다. 그 과정에서 언론사 기자 에이브리는 알콜과 약물중독으로 폐인이 되고, 시사만평가 그레이스미스의 결혼생활은 깨지고, 강력계 형사 토스키에겐 오명이 따라붙고, 그의 동료 형사 암스트롱은 중도에 포기한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현대도시의 어둠을 무대로 연쇄살인극을 펼쳐놓지만 초점은 살인마나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진실을 알아내려고 매달리는 이들에게 있다. 유혈 신은 최소화되었고 카체이스나 총격전 같은 액션 신은 전혀 없다. 취재, 회의, 탐문, 인터뷰, 통화에 온종일 매달리는 그들은 오로지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할 뿐이다. 신문기자 영화에 스릴러와 수사극을 결합시켰지만 장르적 클리셰는 완고하게 거부한 결과이다. 이러저러한 점에서 <조디악>은 공포영화에 가까운 현대 범죄극에 대한 핀처의 응답이자 동시에 <세븐>의 대척점에서 다시 쓴 연쇄살인사건에 관한 도큐먼트처럼 보인다.



긴 시간 동안 축적된, 미로처럼 복잡하고 출구 없는 정보더미들을 체계적으로 구조화하여 공포와 불안으로 들썩였던 미국의 어느 한 시대를 완벽하게 재현한 데이빗 핀처의 성취는 어쩌면 주인공들에 대한 그의 경의 어린 시선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핀처는 실제 그들이 했을 법한 방식대로 때로는 범죄현장에 입회한 수사관처럼, 때로는 보고 듣고 수집한 정보로 기사를 작성해내는 저널리스트처럼, 꼼꼼하고 성실한 태도로 집요하게 ‘절차’를 밟아간다. 영화의 중반 즈음, 조디악 사건에 모티프를 둔 것으로 알려진 영화 <더티 해리>의 시사회 장면이 소소하지만 깊은 인상을 남긴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영화를 차마 다 보지 못하고 극장 밖으로 나온 토스키에게 누군가가 “더티 해리가 사건을 해결했어”라고 말을 걸어오자 그가 “네, 절차는 무시했겠죠”라고 응수하는 바로 그 장면. 요컨대 ‘절차’는 그들이 프로 직업인임을 환기시키는 표지이면서 이 영화의 서사원칙이기도 하다. 핀처는 주인공 기자와 경찰의 전문가주의에 존중을 표하며 그들의 감정적 붕괴와 실패에 마음을 기울인다. 당연하게도 여기에 신화화된 연쇄살인범의 초상은 끼어들 자리가 없다. 2012년에 세상을 떠난 해리스 사비데즈의 촬영과 주연과 단역을 아우르는 모든 배우들의 연기, 시나리오, 편집, 미술, 음악까지 러닝타임 157분의 매순간을 거의 완벽하게 조율해낸, 데이빗 핀처의 새로운 경지.


강소원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