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장률 영화의 원형 - <당시>

2014. 2. 6. 15:232014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리뷰] <당시> - 장률 영화의 원형




<당시 唐詩>(2004)는 장률 감독의 첫 장편영화다. 이 영화는 장률의 가장 자기 반영적인 영화이자, 장률식 미니멀리즘의 원형이 담겨있는 작품이다. 영화의 공간은 인물들이 거주하는 아파트 실내(방, 복도, 엘리베이터)로 한정되어 있고, 카메라는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 극단적인 미니멀리즘, 또는 영화 형식에 대한 엄격한 자기 제한은, 단순한 미학적 형식주의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삶과 영화에 대한 장률의 윤리적 태도의 표현이다. 장률에게 미학과 윤리는 분리 불가능한 하나의 문제를 이루고 있다.

전직 소매치기였던 (영화를 만들 때의 장률과 비슷한) 42살의 한 남자(왕시앙)가 있다. 그는 세상과 단절한 채 집안일(요리, 설거지, 세탁)을 하거나, TV 보기(‘당시(唐詩)’에 대한 방송), 화초에 물 주기, 뜨개질하기 등으로 소일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가끔 필요한 물건(가령, 뜨개실)을 사기 위해 밖에 나갔다 오는 것을 제외하면, 가끔 찾아오는 관리실 직원이나 보험 외판원에게 문을 열어주는 것, 벽을 통해 들려오는 이웃 할아버지 집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것, 가끔 아파트 복도를 빗자루로 쓰는 것 등이, 세상의 ‘현재’와 소통하는 그의 유일한 행위이다. 이 남자를 ‘스승’이라 부르며 찾아오는 한 여자(최월매)가 있다. 그녀는 그에게 필요한 물건을 사다주기도 하고, 씻거나 자고 가기도 한다. 춤을 추는 여자이면서 여전히 소매치기를 하고 있는 그녀는, 남자에게 크게 한탕하는 것을 도와주면 자신도 손을 씻겠다고 한다.

그는 그녀를 밀어내려 애쓰지만(자물쇠 바꾸기), 찾아온 그녀를 강제로 밀어내지도 않는다. 그녀의 제안에 응답하지 않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갈등을 한다. 여자가 그의 ‘과거’라면, 옆집에 홀로 살고 있는 할아버지는 그가 상상하고 있는 그의 ‘미래’일 것이다. 그는 ‘과거’로부터 벗어나려 하지만, ‘미래’의 불안으로부터 자유롭지도 못하다(옆집 할아버지와 공유하고 있는 ‘수전증’은 그 불안과 유예의 신체적 징후일 것이다). 말하자면, <당시>는 과거를 청산하고 싶은 의지와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 사이에서 주저하고 있는 한 남자의 초상을 그려내고 있는 영화다. 그가 유령처럼 부유하고 있는 그 방은 곧 그가 살아내고 있는 한없이 유예된 현재의 다른 이름이다. <당시>는 깊은 영혼의 동요를 오로지 인물의 몸짓을 통해 그려내고 있는 ‘신체의 영화’이고, 느린 리듬 속에 폭발 직전의 에너지를 품고서 끝까지 숨 막히는 긴장을 유지해 가고 있는 영화다.



장률은 <당시>에 대해, “내 그림자가 많이 들어 있는 영화”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이 영화의 주인공 남자처럼 10년 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낸 적이 있었고, 영화 속 남자의 모습은 그 10년 동안 자신의 일상생활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당시>는 장률이 자신의 실존적이고 예술적인 인생의 전환기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영화다. 놀라운 것은, 그 자기 반영성에 일말의 나르시시즘도 없다는 것이다. 장률은 자신의 가장 자기 반영적인 이 영화를 가장 엄격한 형식(고정 쇼트와 최소한의 대사)으로 찍었다. 장률의 영화에서 카메라가 움직일 때, 그것은 대개 타자의 고통에 대한 관음증적 응시의 위험을 피하려는 윤리적 태도의 표현이다. <당시>에 그런 카메라의 움직임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영화가 철저한 자기 응시(반성)의 영화라는 반증일 것이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관음증적 재현을 피하고자 하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자신을 응시하는 완고한 고정 쇼트라는 이 미학적 선택은, 결국 장률이 지니고 있는 삶에 대한 동일한 윤리적 태도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영화에는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당시(唐詩)’ 9편이 인용되고 있지만, 그 시의 내용은 영화의 서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장률이 소설가에서 영화감독으로 전향하면서 가져오려 한 것은, ‘당시(唐詩)’의 문학성(또는, 서사성)이 아니라 그것의 엄격한 형식이다. 말하자면, ‘당시(唐詩)’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이 영화는, 역설적이게도 통상적인 문학성(서사성)과의 철저한 결별 선언이자, 자신이 만들어 갈 영화의 미학적, 윤리적 원칙에 대한 선언문과도 같은 영화다. <당시>의 주인공은 끝내 유보된 현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영화는 그가 총을 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보여주지 않은 채 끝이 난다), 이후의 그의 영화를 보건대, 장률은 이 영화를 통해 과거와 분명하게 단절하고 유예된 현재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야기를 장르적 외피(전직 소매치기라는 다소 누아르적인 설정) 속에 담아 넣은 후 그 장르적 외피를 새로운 형식을 통해 해체시키는 방식, 그 황량한 세계에 살짝 들어와 있는 맹랑한 유머(남자와 여자의 소매치기 대결), 이것 또한 그의 이후의 영화를 예감하게 하는 요소들이다.



변성찬 / 영화평론가


당시 詩 / Tang Poetry

2003│88min│중국,한국│Color│35mm│12세 관람가

연출│장률 Zhang Lu

출연│왕시앙, 최월매

상영일시ㅣ 2/8(토) 19:10 (영화 상영 후 장률 감독 마스터 클래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