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무기력한 슬픔 - 김홍준 감독의 선택작 <두 연인>

2014. 2. 5. 15:412014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 김홍준 감독의 선택 <두 연인>


“1973년, 그러니까 딱 40년 전에 만들어졌고, <사운드 오브 뮤직>의 로버트 와이즈 감독, <이지 라이더>의 피터 폰다, 그리고 '소머즈'로 유명해지기 전의 린지 와그너가 주연. 결코 걸작이거나 명작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 때문임. 1970년대 초 우리나라에 개봉되었는데, 무엇에 끌렸는지 여러 번 보았고, 세월이 지나 다시 보려 해도 비디오나 디브디로 출시되지 않아 볼 수 없었던 영화, 그 기억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어 선택했음.”



[리뷰]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무기력한 슬픔 - <두 연인>






(*영화의 결말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있습니다.)


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두 연인>은 명확하게 드러나는 사건이나 이야기보다는 그 사이에 스며든 정서를 통해 더 많은 것을 전달하는 영화이다. 모로코에서 우연히 만난 두 남녀가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가는 도중 서로 사랑을 느낀다는, 매우 간단한 줄거리를 갖고 있는 이 영화는 그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쉽게 규정하기 힘든 복잡한 정서를 길어 올린다. 그 지배적인 정서를 뭉뚱그려서 ‘슬픔’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 슬픔의 근원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파악하기가 힘들다.

물론 드러난 이유를 찾으려면 몇 가지를 간단히 생각해볼 수 있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헤어지기 때문일 수도 있고, 불확실한 남자의 미래와 다시 혼자 남겨질 여자의 상황 때문일 수도 있다. 특히 남자 주인공 에반은 탈영병으로서 현재 숨어살고 있는 중이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4년 전, 자발적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지만 사람을 죽인 뒤 그때 받은 충격으로 결국 탈영을 결심한다. 그 후 도망만 다니는 삶에 지쳐 다시 자수를 결심하지만 여전히 마음 속에는 갈등이 있다. 기차에서 혼자 눈물을 흘리는 에반의 뒷모습은 그의 여린 감수성과 함께 그가 느끼는 슬픔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여자 주인공 데아드르도 슬픈 사연을 갖고 있다. 그녀는 화려한 모델의 삶을 살지만 남편 없이 혼자 아들을 키우며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잠깐 등장하는 그의 애인은 데아드르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쉽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채 한 번씩 비치는 공허한 눈빛은 그녀가 얼마나 메마른 삶을 살고 있는지를 암시한다. 이처럼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두 남녀가 서로 짧은 사랑을 나누면서 정해진 이별을 맞는 이야기이니, <두 연인>의 지배적 정서가 슬픔인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지 상황이나 인물들의 대사로 밝혀진 사실들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는 <두 연인>의 슬픔을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다. 100분에 가까운 상영 시간 중 인물들의 사연을 직접 설명하는 부분은 다 합쳐도 20분을 넘지 않는다. 나머지는 두 남녀의 일상적인 대화와 행동, 그리고 여행과 함께 바뀌는 이국적인 풍경을 반복해서 보여줄 뿐이다. 이를테면 기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우연히 들른 장터에서 옷을 고른다든가, 뛰다가 부러진 구두굽을 고친다든가, 하염없이 밤거리를 걷는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그리고 영화가 다 끝난 다음, 다시 말해 어떤 극적인 사건도 일어나지 않은 채 에반이 자수를 하러 떠나고, 데아드르가 아들과 함께 놀이터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장면에 이르면 이 영화에 깊게 배인 슬픔의 정서가 다름 아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순간들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두 연인>의 슬픔은 인물들의 행동보다는 행동하지 않음, 즉 무기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에반과 데아드르는 정해진 결말 앞에서 어떤 적극적인 행동도 취하지 않고 그저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만 본다. 단지 에반이 자수하는 것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데아드르는 인권단체에 연락을 하거나 변호사를 구하면서 에반을 도와주려 한다. 하지만 에반은 체념의 표정과 함께 이를 거부하고 홀로 길을 떠난다. 데아드르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더 이상 에반의 마음을 돌리려 하지 않는다. 마지막 작별의 순간에 데아드르는 말한다. “어떤 약속도 하지 않을 거예요.” 이들은 자기 앞에 놓인 현실이 마치 운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한다. 에반은 자수하는 이유를 “내 삶을 되찾기 위해서”라고 설명하지만 이는 오히려 그나마 자신의 의지로 이끌어오던 삶까지 완전히 포기하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그때 에반의 축 처진 어깨와 이를 보면서도 쫓아가지 못하는 데아드르의 모습은 자신의 삶 앞에서조차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슬픔을 포착한다.

그리고 이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것은 마지막 장면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두 인물은 어떤 적극적인 행동도 취하지 않고 단지 이별의 순간만을 기다리지만, 동시에 그 결말을 한없이 유예시키려 한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영화가 그 이별의 순간을 한없이 늘리려 한다. 영화가 끝나기 5분 전, 에반과 데아드르가 놀이터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낼 때의 촬영과 편집은 이들의 행동을 거의 미분하다시피 잘게 나누고, 그 작은 행동들을 하나하나 꾹꾹 눌러 보여주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이별의 순간을 실제 영화 속 시간보다 훨씬 길게 느끼게 만든다. 전체적인 흐름에서 보면 이질적이기까지 한 이 마지막 장면의 연출은 주어진 현실 앞에 아무 행동도 취하지 못하는 인물들을 대신해 영화가 직접 나서 이들의 이별을 지연시키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결국 밀도 높은 슬픔의 감정을 이끌어낸다. 만약 영화가 끝난 후에도 이 슬픔이 계속 마음에 머문다면 이는 느리게 흘렀던 시간의 속도가 아직 제 속도를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보년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팀


두 연인 Two People

1973100min미국Color│DigiBeta│청소년 관람불가

연출로버트 와이즈 Robert Wise

출연피터 폰다, 린지 와그너

상영일시 ㅣ 2/6(목) 19:30, 2/15(토) 15:30, 2/21(금) 1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