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2. 2. 12:27ㆍ시네클럽
[시네클럽] 니콜라스 레이의 <실물보다 큰>
지난 11월 28일 시네클럽 행사로 니콜라스 레이의 <실물보다 큰>을 상영하고 상영 후에는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의 진행으로 니콜라스 레이의 작업과 작품 세계를 돌아보는 시네토크가 열렸다. 1956년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통해 진가를 발휘하는 화면과 그 속에서 꿈틀거리는 문제의식은 오늘날까지 현저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실물보다 큰>을 중심으로 살펴본 11월 시네클럽 현장을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방금 보신 니콜라스 레이의 <실물보다 큰>은 굉장히 독특한 영화다. 이 영화는 굉장히 짧은 러닝타임과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지만, 굉장히 밀도가 높고 일종의 실내극 같은 느낌을 준다. 실내극처럼 한정된 공간과 한정된 인물들을 갖고 만들어진 밀도 높은 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이 영화에 거의 모든 것이 들어가 있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멜로드라마지만, 사회극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또한 공포에 가깝고 가족의 문제도 포함되어있다. 이렇듯 장르적으로도 굉장히 다양하게 혼성화 되어있고, 내용 역시 마찬가지다. 멜로드라마라고는 하지만 이 영화의 초중반부터 주인공은 아내와의 관계를 거의 끊어버린다. 몇 가지 상징적인 장면들로 그런 부분이 나타난다. 특히 우유 시퀀스는 잊을 수가 없는데, 그 장면에서 주인공은 ‘당신과는 거의 이혼한 상태’라고 폭발적인 발언을 한다. 이렇듯 이 영화에서 중심적인 것은 아들과의 관계지 일반적 멜로드라마에서의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이것을 일반적인 의미의 멜로드라마, 사랑과 가족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려움이 있다. 그렇다면 약물 남용에 의한 드라마냐. 그러나 사실 그것을 주제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주제는 무엇일까. 거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화의 종반에 갑자기 중심적인 주제로 떠오르는 것은 믿음의 문제다. 그 믿음 덕분에 남편이 깨어났을 때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된다. 보셨다시피 이 영화는 갑작스러운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물론 이것은 당시 할리우드 영화의 필연적인 귀결이기는 하지만, 이 영화에서 결국은 믿음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이렇듯 주제적인 면이 굉장히 다양한 부분에 포진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또한 밀도가 높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 밀도를 만들어내는 레이의 역량 중 상당부분은, 이 사람이 B급영화에서 출발한 사람이라는 데 기인한다. 영화의 시작부터 군더더기가 거의 없다. 표현의 방식, 그리고 이야기와 플롯 모두가 절약적이다. 그리고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가는 데 있어서 플롯이나 인물에만 의존하지 않고, 미장센을 사용하고 있다.
체육 선생님이 등장해서 아들에게 요구르트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는 장면은 CF의 한 장면 같다. 이 영화에 나오는 신약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듯이, 동시에 영화의 전반에는 신약과 거의 대등한 위치에서 새로운 소비상품들이 등장하고 있다. 방금 말씀드린, 요구르트를 만드는 장면은 새로운 소비상품과 그 상품에 의해서 사람들의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 단순히 아들이 아버지에게 무언가를 만들어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비슷한 양상은 이 영화의 도처에 있다. 새로운 세제, 그리고 부엌에 장식되어있는 물품들 같은 것들 모두가 새로운 소비상품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은 감독이 고다르라고 생각한다. <그녀에 대해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 같은 영화에서는 새로운 소비상품들을 굉장히 많이 나열하고 있는데, 그것이 이 영화의 영향이 아닐까 한다. 또한 이 영화에 등장하는 집의 벽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여행 포스터들이다. 그리고 관객들이 제발 이것을 봐 주기를 바라는 식으로 인물을 통해 직접 지칭하기도 한다. 그 포스터의 모든 부분은 대단히 이국적인 다른 나라의 풍경들을 담은 것이다. 그것이 왜 붙어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용상으로는 이 사람들이 여행을 가고 싶은 욕구가 그것을 통해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다르의 <그녀에 대해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에서는 파리 근교 신도시의 주택에 거주하는 여자들이 주택의 상환금 때문에 매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이 영화에서 에드가 하는 부업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매춘을 하는 공간은 여행사로 위장되어있고, 그곳에 그런 여행 포스터가 붙어있다. 개인적으로는 고다르가 이 영화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용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 영화의 굉장히 다양한 부분들이 정확한 의미로는 포착되지 않더라도 기능적으로 활용되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도 상당히 밀도가 높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한 번 봐서는 놓치는 부분도 많을 것 같다. 큰 화면에서 보았을 때 그런 밀도들을 느낄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는 통설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아메리칸 드림이 악몽이 되는 영화이다. 50년대 이전의 영화들은 현실이 어떤 방식으로든 아메리칸 드림으로 봉합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전쟁과 냉전과 매카시즘의 광풍을 거치며 꿈이 현실화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꿈의 현실화가 불가능해질 때, 그 꿈을 버리지 않는 이상 그것은 망상이나 악몽이 되어버린다. 그것이 50년대 이후의 미국 영화의 기본적인 특징이다. 대표적으로 니콜라스 레이나 사무엘 풀러 같은 작가들이 그런 영화를 만들었다. 풀러의 <충격의 복도>역시 그런 편집증적인 영화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충격의 복도>처럼 예외적인 상황을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가장 일상적이고 평범한 중산층 가정 안에서 얼마나 끔찍한 악몽이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악몽이나 잠복해있던 불안감이 외부로 드러날 때 그 촉매로 활용되는 것이 기적의 신약이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을 드러내게 하기 때문에 치유가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그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굉장히 물리적인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색채, 공간, 그리고 인간에 대해 다룰 때까지 굉장히 물리적인 지점에서 접근한다. 심지어 에드의 주변 인물로 체육 선생을 설정하고 있고, 검진을 받는 장면들 역시 굉장히 물리적인 방식으로 묘사되고 있다. 공간에서도 그런데, 사실 니콜라스 레이는 원래 건축을 하던 사람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건축적 공간을 만들어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계단이 대단히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계단은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의 벽면에는 여행 포스터들이 있다. 여행 포스터는 일상의 삶을 다른 휴양이나 레저의 목적지와 연결시키며 그곳들을 상기시킨다. 이 사람들이 그 목적지에 가려면 집을 떠나야 하는데, 이 영화는 집이라는 덫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그 덫처럼 구성되는 건축적 공간을 만들어나갈 때 1층은 모든 사람이 모이는 공간으로, 2층은 모든 사람이 각자 분리되는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둘을 연결하는 계단은 일종의 떠있는 공간이다. 떠있다는 느낌은 집을 다른 휴양지들과 연결시키는 포스터들로 인해 더해지고 있다. 그것이 깨어지는 부분이 이 영화의 마지막 액션시퀀스다. 액션이 벌어지는 것이 계단이고, 그 계단이 파괴되어져 가면서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라인 자체가 파괴되는 것이다. 그것은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다. 어떤 망상들이 물리적으로 깨어져버렸기 때문에 대지나 지평에 도달할 수 있지만, 그 깨어짐이 불행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처럼 레이의 영화는 양가적이고 모순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이유 없는 반항>에서 아들은 아버지에게 반항하지만, 거기에는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부분도 있다. 그것은 B급 영화로 시작한 레이라는 감독이 갖는 작가적인 모순이기도 하다. 오손 웰즈도 마찬가지다. 이 사람들은 고전적인 할리우드 시스템에 반발했지만 동시에 할리우드가 자기를 품어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부분들이 건축적인 공간의 배치나 색상의 배치에서도 부각되고 있다.
이 영화는 컬러에서 시작해서 점점 더 흑백으로, 표현주의적인 요소들로 향하는 영화다. 영화의 서두에서 파티가 끝나고 에드는 집안의 모든 불을 하나씩 꺼나간다. 그것은 어둠이라는 세계의 하나의 전조적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나중에 가면 이것은 굉장히 과장된 형태의 조명과 어둠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 어둠이라는 것은 물리적인 조명술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인간에게 내재되어있는 어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내재된 어둠을 대표하는 것은 폭력의 충동들이다. 잘 따져보면 이 영화에서는 아내 역시 대단히 폭력적이다. 갑작스럽게 화를 내는 순간들이 있다. 심지어 아들 역시 마찬가지다. 레이나 풀러, 엘리야 카잔의 영화를 보면 인물이 순간적으로 끓어오르는 순간이 있다. 레이는 그런 부분을 대단히 좋아했던 감독인 것 같다. 모든 사람이 양가적인 부분을 갖고 있으며, 그것들 중의 하나가 어떤 상황에서 확 돌출되어 나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어둠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인물 내부의 폭력적 경향들이 갑자기 드러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 중요하게 봐야할 것은 이것이 <이유 없는 반항>과는 좀 다르다는 젓이다. 그 영화에서는 기성세대나 사회 등 외부적인 면들에 반발하여 충동적이고 폭력적인 부분들이 발생하게 되는데, 거기에 비하면 이 영화의 충동과 폭력은 내부로부터 기인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레이의 <고독한 거리에서>라는 영화와 비슷하다. 그 영화에는 소설가로 험프리 보가트가 등장하는데, 그는 종종 급작스럽게 화를 내며, 과잉적인 폭력을 행사한다. 이 영화상에서도 아무리 약물을 복용했다고는 하지만 과잉된 폭력들이 있다. 그 과잉이 <이유없는 반항>에서는 외부의 영향에 의해 반발적이고 반사적으로 만들어졌다면, 이 영화에서는 이미 누적되어진 것들이 폭발하는 경향으로 표현되고 있다. 일종의 내적 폭력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이유 없는 반항>에 비해 도대체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해 들어가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 감독 역시 저 남자의 폭발적인 분노와 충동적인 폭력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이 영화상에서 정확하게 고찰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대신 이 영화에서는 그런 분출과 그 분출이 갖는 효과가 다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대부분 왜 저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원인에 대한 부분을 생각해보실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원제는 <Bigger Than Life>, ‘삶 보다 큰’이다. 여기서 ‘보다than’라는 것은 통상적인 것보다 큰 것, 곧 과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과잉에 대한 부분이 중요한 것 같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건 약물 과잉, 초과 노동, 그리고 집에서 새로운 소비상품을 사는 것과 관련된 소비적 과잉의 문제도 있다. 행위의 과잉도 있다. 공을 너무 세게 던지는 것, 그것이 나중에는 과잉 폭력으로, 과잉 해석으로, 과잉 지위로 확대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시네마스코프 화면 자체도 과잉이다. ‘TV보다 큰’ 것 이다. TV보다 큰 영화 안에서 레이는 현미경처럼 디테일들을 보여준다. 시네마스코프다 TV보다 크기 때문에, 그 디테일들 역시 TV에서보다 더 크게 보여진다. 모든 사물과 인물이 더 크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다른 한 편으로 보면 ‘실물보다 큰’, ‘삶 보다 큰’ 것이다. 레이가 미국영화에서 이루어낸 혁신 중에 하나는 마이크로한 세계를 매크로하게 풀어낸 것이다. 중요한 점을 하나 더 꼽자면, 이 영화는 삶을 그리는 영화다. 약물 과용이나 가족 멜로, 아버지나 아들의 관계로도 다 말해질 수 없는 삶 그 자체를 그리는 영화이다. 영화에 어떻게 삶을 담아낼 것인가. 여기에 대해 고다르가 한 유명한 말이 있다. “모든 것을 영화에 넣으면 된다.” 처음에 말씀 드렸던 것처럼 밀도를 높게 만들어가는 여러 가지 요소들, 혹은 이 영화를 연극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장치를 쓰는 것들 모두가 삶에 근접해가기 위한 방법이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이 영화가 통상적인 삶의 이야기보다 훨씬 더 과장된 형태로 일상적인 삶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보다 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니콜라스 레이의 영화적 예술이 갖는 특별함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정리: 박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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