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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시네토크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준 생애의 영화

정성일 평론가가 추천한 루이 푀이야드의 <뱀파이어> 시네토크

2월 10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정성일 영화평론가의 선택작 루이 푀이야드의 <뱀파이어>가 하루 종일 상영되었고, 마지막 에피소드가 끝난 후 정성일 평론가의 강연이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정성일 평론가 “시네마테크는 영화의 박물관이 아니라 현재 진행하는 시간인 동시에 내일을 열어가는 장소라고 생각한다. 영화 자체를 물신화하지 말고 신화화하지 말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멀티플렉스에서 상영되는 <아바타>와 똑같은 관람 기분으로 1915년의 영화 <뱀파이어>를 만나기를 당부했던 그는 거듭해서 시네마테크라는 공간이 우리들에게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단호하게 ‘이 영화는 내 인생의 영화’라고 말하는 정성일 평론가의 강연 내용을 전한다.


정성일(영화평론가):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는 영화를 선택하는 친구들에게 백지수표를 주었고 보통 친구들은 그것에 10편의 영화를 써서 냈다. 이번에 내가 가장 처음으로 상영 희망목록에 작성했던 영화는 루이 푀이야드의 <뱀파이어>였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나에게 ‘생애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유념해서 생각해주시기 바란다. 생애의 영화라는 건 최고의 걸작과 같은 말이 아니다. 생애의 영화라는 건 영화가 나에게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을 말한다. 나는 32세가 될 때까지 이 영화를 보지 못했고 그때까지 <뱀파이어>에 대한 이야기를 정보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1993년 서울단편영화제의 집행위원장으로 있을 때 끌레르몽 페랑 영화제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곳의 대학생들이 주최하는 심야상영에서 <뱀파이어>를 처음 봤다. 그때 영화를 소개하던 학생의 말이 참 인상적이었는데 그대로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여러분들 오신 걸 환영합니다. 우리 모두 이 영화를 1915년 당시 <뱀파이어>가 상영되었던 때와 동일하게 관람해봅시다. 영화를 보며 담배를 피워도 되고 술을 마셔도 되고 자다가 다시 와서 보셔도 되고 1915년의 상영과 같은 방식으로 이 영화를 봅시다.” <뱀파이어>의 첫 번째 에피소드가 끝날 즈음 이건 내 인생의 영화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에도 마음속으로 ‘이건 내 인생의 영화야’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이 영화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이 생겼다. 그러다가 8년 후 키노를 만들던 시절 <뱀파이어>를 마침내 필름으로 다시 보며 나는 비로소 안심했다.

 

<뱀파이어>는 내 생애의 영화

 

푀이야드가 영화를 찍을 때만해도 연출은 기술자의 개념이었지 예술가의 개념이 아니었다. 푀이야드는 작업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을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그가 자서전에서 존경하는 예술가들의 이름을 나열할 때 그의 영화적 비밀을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의젠느 앗제이라는 사진작가를 존경하며 그의 작업을 위대하다 생각한다고 고백했다. 의젠느 앗제는 평생 동안 사진을 기록의 매체로 생각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사진은 발터 벤야민의 말을 빌면, 범행 현장을 미리 답사하는 느낌, 즉 파리라는 도시에 행해진 모더니즘의 비밀을 열어 보여준 느낌을 준다. 푀이야드의 <뱀파이어> 또한 그런 느낌을 준다. 푀이야드는 ‘자신이 만드는 영화는 미래의 관객을 위해 담아놓은 지금의 시간’이라는 말을 했다. 즉 그는 95년 후에 이 영화를 볼 우리를 위해 필름에 당대의 시간을 봉인해서 넘겨준 것이다. 그는 이미지의 개념들을 바쟁이 영화적으로 설명하기 이전에 영화로 인해 실천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푀이야드의 비극은 너무 빠른 속도로 영화를 찍어야했다는 것이다. 처음 이 영화를 볼 때는 잘 몰랐지만 두 번째 보았을 때는 즉각적으로 영화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실 푀이야드에게는 <뱀파이어>의 전체 시나리오가 없었다. 당시의 영화가 거의 그렇듯 첫 상영을 시작한 후 인기가 없으면 빨리 끝내거나 혹은 관객의 반응이 좋으면 2편을 준비하곤 했다. 때문에 푀이야드는 <뱀파이어>의 에피소드를 2주 간격으로 준비했어야 하는데 이건 정말 고역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전체가 가지는 불균질성, 밸런스 감각을 갖지 않고 있다는 것, 이것이 <뱀파이어>를 재밌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푀이야드는 <뱀파이어>를 찍기 전인 1913년까지 매년 80편의 영화를 찍었다. 물론 대부분 단편영화였지만 그래도 80편은 적은 숫자가 아니다. 심지어 디지털 세대가 도래하기 전이었으니 그 고충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실 것이다. 그러던 중 미국영화들이 넘어오기 시작했고 짧던 연쇄극들의 길이가 길어지며 프랑스 영화도 이에 동등한 경쟁력을 갖기 위해 미국의 체제에 돌입했다. 다소 따분하지만 미국영화들과의 경쟁은 전 세계영화들이 피할 수 없던 것이었다. 푀이야드가 <뱀파이어>를 찍고 4년 후에 채플린은 <키드>를 만들었고, 1915년에 그리피스는 <국가의 탄생>을 준비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전 세계적으로 갑자기 영화가 고전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인들은 재빨리 영화의 편집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았고 러시아인들이 영화사에 도착하기 이전에 천재적인 수법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고 이때 톰 거닝의 논쟁 또한 시작되었다. 푀이야드는 이런 영화의 개념들이 동원되기 시작했을 때 그 길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 길은 영화의 길이 아니라 생각했던 거다. 희곡작가 아르토는 이렇게 말했다. ‘영화는 대중적으로 이끌리는 순간 천박해지지만 실험에 이끌리는 순간 부서질 거다.’ 푀이야드는 제3의 길을 믿었다. 그가 이 영화 속에서 사용했던 편집의 방식이나 딥 포커스, 그리고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더블액션을 받는 대목들이었다. 푀이야드는 의도적으로 매치 컷을 피해서 더블액션을 남겼다. 시간을 중복시켜서 중복데드타임을 자체로 활용해서 보여주고 진행하는 방식을 택했다. 다시 말하는 <뱀파이어>의 장점 두 가지. 하나는 리얼리티를 관찰하는 재능, 다른 하나는 스토리텔링에 대한 멈출 수 없는 사랑이다. 종종 두 가지는 병행할 수 없는 것으로 이야기하지만 그는 두 개를 연결시켰다.

 

‘파리’라는 도시의 기록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영화

 

무엇보다 <뱀파이어>가 훌륭한 결정적 이유는 1915년 파리를 고스란히 찍고 있다는 것이다. 기술을 동원하지 않고 고스란히 말이다. 이 정신은 다소 맥락은 다르지만 한참 후에 갑자기 장 르누아르의 영화에서 재현되어 보여지는 것, 그리고 다시 르누아르의 연출부였던 이탈리아감독들의 네오리얼리즘으로 확장된 개념을 갖고 체계화되어 발전한 것, 또 그것이 누벨바그 세대들로 이어지고 디지털카메라가 도착했을 때 중국이 그의 정신을 재조명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푀이야드는 표면을 잡으면 내부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와 함께 시대를 살던 사람들은 대부분 인상주의화가들이었고 푀이야드는 그들과 어울리며 같은 시대정신을 가지고 살았던 것이다. 여하튼 <뱀파이어>로 푀이야드가 찍어 보여준 ‘20세기 파리’의 의미는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모더니즘’을 찍는 것이다. <뱀파이어>의 핵심은 도시 그 자체에 있다. 그 안에서 이야기는 어떻게 작동하기 시작하는가.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에서 무엇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보여주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감독이 푀이야드다. 그는 그리피스가 영화의 길을 잘못 들어섰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사적으로 푀이야드는 틀렸고 그리피스는 맞았다. 영화에서 어떤 이의 천재적인 방법을 받아들이고 발전한 후 그 방법은 시간이 지나서 돌아볼 때 올드패션한 느낌을 준다. 푀이야드는 역사 속에서 저주받는 것이 꼭 역사 속에서 미학적 패배인가는 질문도 던진다. 그는 고유한 자기의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며 이미지를 부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졌다.

 

‘왜 나는 <뱀파이어>를 보면 영화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는가’하는 질문을 이 영화를 보면서 종종 가져왔다. 나는 가끔 영화가 언제부터 영화답게 된 것일까라는 질문 또한 종종 던진다. 이 영화는 정말 영화다운가. 사실 웃겼던 건 생전영화의 미래를 고민하지지 않던 천만 명이 어느 날 갑자기 <아바타>를 보고 영화의 미래를 근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맙고 참 심금을 울리는 행동이었다. (웃음) 우리는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영화를 보며 질문해보자. 무엇이 영화다운 것이고 어디서부터 영화다움이 이루어졌는가. 나는 거슬러 올라가고 싶었다. 그리고 <뱀파이어>에 도착하는 순간 이 영화가 어느 지점에서는 연극, 어느 지점에서는 사진,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는 소설의 방식을 취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부서지기 쉬운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걸친 채 영화다움의 정체성을 찾고 있는 영화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혹적이었다. 어느 날 문득 이 영화를 보며 ‘아, 영화는 교양으로 보는 것이구나, 상식으로 보는 것이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1차 세계대전과 온전하게 겹치는 <뱀파이어>에는 전쟁이야기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전쟁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불안의 공기를 온전히 영화 안에 끌어안고 활동하는 느낌을 전달받았을 때 바로 이것이 영화가 할 수 있는 최상의 표현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바로 이런 영화들이 보고 싶은 거다.

 

결정적으로 나는 왜 이 영화에 매혹되었을까. 첫 번째, 영화 전체의 경계들 사이로 사진이 절반정도 들어와 있었고 폐쇄된 공간에서 문을 열면 다른 세계가 나온다는 소설과 연극이 뒤섞인 공간이 존재했기 때문. 두 번째, 가장 놀라웠던 지점은 이르마 베프의 존재였다. 이게 거의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이르마 베프의 동선 자체가 영화의 존재론을 알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푀이야드의 <뱀파이어> 이후 이런 경이적인 체험을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이건 고다르도 불가능하다. 주인공 자체가 사라지고 불투명하고 비가시적이었다가 가시적이고 또 그것이 유동적인 존재. (요즘은 조금 지났지만)유행어로, 그러니까 들뢰즈식으로 말하면 운동이미지 안에서 활동을 개시하는 시간이미지인 셈이다. 두 가지가 완벽하게 공존하고 있다. 이르마 베프라는 존재는 영화를 보기 위해서 절대적인 독해기호가 되었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야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혹은 <뱀파이어>를 보고 나서 ‘이 영화가 참 훌륭했구나’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런데 내 생애의 영화는 뭐지?’라고 의문을 가졌으면 좋겠다. 최고 걸작을 뽑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게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집어던지는 작품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그걸 껴안을 수 있을 때, 내게 질문을 던지는 영화를 껴안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정리: 강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