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8. 12:18ㆍ201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시네토크
홍상수 감독의 선택, 칼 드레이어의 <오데트> 시네토크
2월 6일 토요일 오후, 홍상수 감독의 선택작 <오데트>의 상영 이후 허문영 평론가의 진행 하에 관객과의 대화가 펼쳐졌다. 느린 트래킹으로 시작한 영화는 보는 이를 유혹하기 위해 현란한 재주를 부리는 영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기적의 순간에 가닿기 위해서는 긴 기다림이 필요했다. 하지만 영화가 마지막에 다다르기도 전에 이미 우리 모두는 잉거의 부활을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20년 만에 <오데트>를 다시 보게 되어 너무 좋았다는 홍상수 감독의 애틋한 목소리에서도 마지막 순간의 떨림이 그대로 이어졌다. 허문영 평론가 역시 과도한 설명을 아끼려는 모습이었던 그 현장을 전한다.
홍상수(영화감독): 사실 관객 분들이 어떻게 보셨는지가 더 궁금하다. 이 영화를 꼭 보여드리고 싶어서 추천했고, 같이 볼 수 있게 돼서 좋았다. 스물일곱인가 스물여덟에 처음 봤고, 오늘 두 번째로 봤다. 대학원 다닐 때였는데, 소위 말하는 클래식이란 영화들을 찾아보고 있던 시기였다. 그 때 보자마자 평생 기억하고 있을 만한 영화라고 생각했고, 이후로도 가끔씩 생각했던 영화다.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던 학생으로서 중요한 레퍼런스 포인트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또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내게 이상적 표본이 된 영화 중 하나다. 이후에 가끔 이 영화를 다시 떠올리면 카메라의 수평운동, 계속되는 카메라의 느린 움직임과 긴 기다림이 기억난다. ‘긴 기다림이 있어야만 이 결말이 믿어질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카메라 움직임부터 여기 나오는 인물들, 그들의 성격이나 인품, 단순한 세팅, 이런 것들이 모두 모여서 우리를 자꾸 어떤 믿음으로 몰고 가고 준비시킨다. 그리고는 아주 한참 걸려서 우리는, 물론 만들어진 그림이고 연기한 것이지만, 마지막 장면의 기적이 실제로 일어난 것임을 믿게 된다. 다른 영화에서도 사람을 살리는 정도의 기적은 많이 만들어지지만, 그것을 보고 감동을 받은 적이나 정말 믿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봤을 때는 마지막 장면을 믿고 싶었고, 기적이 일어나길 기다렸고, 실제로 며느리가 다시 살아났을 때는 정말 믿었던 것 같다.
영화의 힘을 느꼈다. 이 영화에는 눈으로 기적을 볼 수 있게 만들고, 그것을 믿게 하는 힘이 있다. 이 영화는 만든 사람의 영악함이나 계산이 아니라, 만든 사람이 영화를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한 사람이었나를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를 통해서 이런 것을 할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영화의 모든 부분들, 리듬이나 대사의 깨끗함, 인물들의 인품을 만들어낸 과정에서 만든 사람의 진지함, 충실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점들이 좋아서 칼 드레이어가 쓴 책을 읽어봤는데, 책은 좀 답답하더라. 좀 답답한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지혜로운 사람이라기보다는 충실함에 대한 바람, 관심, 열정이 있었던 사람인 것 같다. 충실한 마음가짐이 무엇인지, 우리는 그런 충실함으로부터 왜 멀어졌나에 대해 고민했던 것 같다. 그런 진심을 갖고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영화가 나왔다고 생각한다.
이런 영화를 보고나면 내가 믿고 있는 헛된 잡소리들, 내가 쌓아놓은 관념적인 탑들, 사람들한테 잘 통한답시고 습관처럼 하는 제스처들, 과잉된 자의식 같은 것들 때문에 움츠러들어서 제대로 사랑해 주지 않은 내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봐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봐도 이 영화를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가 기독교 영화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이런 진지함과 충실한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영화다. 그런 중요한 문제를 환기시키고 건드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영화라 생각한다.
허문영: 말씀하신 것보다 더 나은 설명을 덧붙이기 어려울 것 같지만 그래도 몇 가지 질문을 드리긴 해야 할 것 같다. 기독교적인 부분들 때문에 얼핏 이 영화는 감독님과 안 어울려 보이기도 한다. 굉장히 경건하고 금욕적인 분위기의 영화처럼 보여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 영화를 종교와 신앙 문제에 관해 고뇌하는 영화로 받아들이고, 잉거의 부활을 종교적 신앙의 실현, 믿음의 실현으로 이해하곤 한다. 기독교 영화로 보지 않으셨다면, 어떤 측면에서 이 영화를 보셨는지 궁금하다.
홍상수: 이 분이 어떤 배경에서 이 영화를 만드셨는지는 모르겠다. 기독교적 신앙이 있는 분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전쟁 영화에서는 저 빌딩을 돌아서면 적이 있고, 적들을 죽이려면 오른쪽으로 돌지 왼쪽으로 돌지를 고민한다. 전쟁 얘기면 전쟁가지고 얘기하는 것이고, 연애얘기면 연애가지고 얘기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다루는 문제가 어느 정도의 현실 속 리얼리티를 갖고 있느냐하는 점에 대해서는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이 영화도 기독교와 상관없이 봐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분이 정하신 주제의식과 환경, 재료들이 있는 것이고, 그것들로 만들어낸 인물들과 주어진 상황 속에서 그것들이 부딪히면서 어떤 작용을 일으키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너무 잘 만들어진 영화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마음속의 충실함이란 것에 도달하려는 사람들이 회의를 느끼는 모습들이 여러 인물들에 잘 나뉘어져 있다. 첫째아들과 아버지, 반대편에 있는 재단사, 그 모두를 다 사랑하는 며느리, 미친 사람 취급받는 남자에 잘 나눠져 있다. 그들이 믿음에 관해 하는 얘기도 전혀 교조적이지 않다. 아마 영화를 보시면서 충분히 느끼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허문영: 계속해서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 참여하고 있는데, 작년에는 에리히 본 스트로하임의 <탐욕>, 재작년에는 장 비고의 <라탈랑트>, 그 앞에는 브뉘엘의 <절멸의 천사>를 고른 것으로 기억한다. 최근 추천작들을 보면 <오데트>를 포함해서 모두 무성영화거나 무성영화 시대에 자신의 이력을 시작한 감독들의 영화다. 무성영화의 자장 안에 있는 영화들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본인은 유성영화시대가 시작된 지 한참 지난 뒤에 영화를 시작해서 유성영화를 만드는 감독인데, 무성영화에 대한 남다른 애호가 있는 것 같다.
홍상수: 무성영화를 많이 보지는 못했다. 추천작들이 오래된 영화들이기는 하다. 보신 분들은 어떠실지 몰라도, 그 무렵의 영화들이 좋다. 보고 진짜 훌륭하다고 느끼는 영화들은 이런 옛날 영화들이더라. 자연스럽게 나에게 박힌 영화들이 있다. 굳이 얘기하자면 뤼미에르 형제가 맨 처음에 만든 짧은 단편들을 좋아한다. 영화관에서 틀 수 없을 정도로 짧은 쇼트들인데, 보고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안개 낀 부둣가에서 남자들이 배타고 가는 것을 찍은 쇼트가 있는데, 움직임 자체가 주는 느낌만으로도 예쁘고 아름다웠다. 영화의 원류가 된 분들의 영화에 많이 끌린다. 물론 초기 영화감독들도 전시대의 화가나 소설가에게 영향을 받았겠지만, 그들이 영화적 완성도에 도달하면서 영화의 위치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계속 다시 보고 싶다고 느끼는 영화들은 대부분 그런 분들의 영화다. 그 이후의 감독들은 시기적으로 늦게 태어나서 할 수 없이 그 전의 것들을 흡수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단지 흡수한 것을 여러 가지로 섞을 때 자신의 태도가 반영되고 재능이 표현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허문영: 그런데 이 영화의 제목은 공교롭게도 ‘말’이라는 뜻의 <오데트>다. 이 영화가 말을 다루는 방식은 우리가 보통 접하는 유성영화가 말을 다루는 방식과는 좀 다른 느낌을 준다. 그런 점에서는 감독님의 영화에서 대사를 다루는 방식과도 통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단지 듣기에 아름다운 것뿐만 아니라 조화의 느낌이 있다. 대사가 정보 전달이나 의미 전달의 기능을 한다기보다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육체로, 혹은 배우라는 육체에 부착된 물질적 음성으로서 감각된다. 듣고 있으면, 저 음성과 저 방식으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말의 물질성, 육체성을 중시하는 점이 공통적으로 느껴진다. 실제로 드레이어는 영화를 찍을 때 현장에서 음성을 매치시켜 보고 잘 안 맞다 싶으면 대사들을 빼버렸다고 한다. 감독님은 이 영화가 말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셨는지.
홍상수: 개인적으로는 말들이 듣기에 너무 좋았다. 귀가 편했다. 내용은 자막을 통해서 이해했지만, 말들 한 마디 한 마디가 딱 있을 것만 있는 느낌이다. 인물들의 인품 때문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하나도 거슬리는 것이 없다. 상투적인 표현으로 음악 같다고 할까. 쓸데없는 것이 붙은 곳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인물들도 무척 좋았다. 저런 시대나 장소가 실재했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하나의 가치관 속에 묶여 살면서 그 속에서 서로 더 충실하려고 애쓰고, 가끔은 서로 다른 의견 때문에 부닥치기도 하는 커뮤니티의 존재를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오즈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도 현실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예쁘지 않나. 하나의 큰 가치관 속에 묶여 있으면서 서로 충실하려는 사람들이고, 어떤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그걸 극복하려는 애씀 자체가 예쁜 인물들이라고 생각한다.
허문영: 말하셨듯이, 물결이 조용히 흐르는 것 같은 카메라의 수평 트래킹과 롱테이크가 특히 인상적이다. 물론 롱테이크나 트래킹이 새로울 것은 없지만, 이 영화에서는 각별한 느낌을 자아낸다. 드레이어는 영화사상 가장 격렬한 몽타주 영화 중 한 편인 <잔 다르크의 수난>을 만든 사람이지만, 전체 필모그래피에서 <잔 다르크의 수난>은 좀 예외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그는 이 영화에서와 유사한 카메라 워크와 롱테이크를 더 선호했었던 것 같다. 드레이어 본인도 인터뷰에서 “나는 롱테이크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다”고 밝힌 바가 있다. 감독님이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던 청년시절에 이 영화를 봤을 때는 트래킹과 롱테이크가 어떻게 다가왔을지 궁금하다.
홍상수: 처음 봤을 때는 답답함이 있었다. 그러다 마지막에 가서, 그 답답함도 필요했었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늘 보면서는 훨씬 편했다. 나이 탓도 있겠고, 생각이 달라진 탓도 있을 것 같다. 그 때 놓친 것이 많았던 것 같다. 오늘은 인물들도 구경하고, 인물들이 만들어나가는 관계도 봤다. 사이사이에 구경하고 쳐다볼 게 너무 많아서 답답함을 못 느꼈다.
관객1: 영화를 본다는 체험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해 주는 위대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신이 있나 없나를 따지기 보다는, 감독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를 어떻게 관객이 체험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트래킹과 긴 호흡을 통해 보여준 좋은 영화인 것 같다. 보면서 베르히만의 <처녀의 샘>이 계속 떠오르더라. 그 영화도 굉장히 호흡이 길면서 마지막에 큰 울림을 주는 영화였는데, 보셨다면 어떤 느낌이셨는지.
홍상수: 그 영화도 봤지만, 이 영화를 훨씬 좋아한다.
허문영: 실제로 드레이어가 좋아했던 영화 중 한 편이 <처녀의 샘>이었다.
관객2: 작년에 필름포럼에서 <오데트>로 강연하실 때 마지막 키스가 주는 육체적 느낌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오늘 보니 훨씬 더 이상하고, 훨씬 더 육체적인 느낌이 든다. 마지막에 신을 부르는 대신 삶이라고 말하는 장면도 이상하게 다가온다.
허문영: 마지막에 나오는 잉거의 키스 장면은 너무 외설적일 정도로 적극적이다. 아기가 네 동강이 나서 죽었다는 끔찍한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다시 애라도 만들어야 할 것 같은 동물적인 느낌을 준다. 그런 느낌까지 드레이어가 계산했는지 여부를 떠나서, 이 영화에는 관능적이고 외설적이면서 육체적인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3: 진심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한데, 믿음은 이성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의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순수한 상태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이 일어나야 가능한 것 같다. 공통의 염원이 이루어지는 방식도 비슷한 것 같다. 영화에서 어린 딸이 신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단지 엄마가 살아 돌아오기만을 바라는데, 그런 순수함이 기적을 가능케 한 것 고, 거기서 오는 감동이 있다.
홍상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세상에서 제일 가치 있고, 그렇지만 잡으려면 잡을 수 없고, 또 있으면 엄청난 힘을 얻고 너무 편안해 지는 것이 믿음인 것 같다. 믿음은 특권 같다. 특권은 권리가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분석을 통해 믿음을 확보하는 방법을 찾거나, 증거가 있으니까 믿음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이 제일 온전한 상태일 때 자기가 느낀 것, 본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 아닌가 한다. 내가 본 것과 느낀 것을 통해서 이미 생각하기도 전에 내가 그것을 믿고 있는 거다. 하지만 내가 불안하고 흐트러져 있을 때는 온갖 잡것들이 낀다. 그러면 온전한 상태에서 느끼고 본 것을 자꾸 분석하려고 든다. 증거를 대야 믿을 수 있다는 목소리가 있어서 결국 못 믿게 만드는 거다. 믿음은 확고하거나 자물쇠로 채워놓은 것도 아니고, 내가 딴 생각이나 딴 짓거리 하고 다녀도 그대로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번 믿으면 끝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온전한 상태를 유지해야만 내 속에 계속 믿음이 있을 수 있다. 믿음은 너무 많은 것을 주는 큰 행복이기 때문에 그것에 증거를 댈 필요도 없고, 그것을 남에게 자랑하고 팔고 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정리: 이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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