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5. 16:53ㆍ2012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스탠리 큐브릭은 21세기 들어 재평가의 목소리가 가장 높은 작가 중 한명일 것이다. 좋은 의미로서의 재평가는 아니다. 이를테면 평론가 토니 레인즈는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큐브릭은 작가가 아니었다"고 말한 바 있다. "직접 시나리오를 쓴 적이 없고, 대부분의 영화가 소설 각색물이며, 또한 어떤 이야기가 가장 센세이셔널할 것인가를 고민했기 때문에 오히려 스튜디오 시스템에 가장 적합한 감독이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작가'라는 이름 자체에 거품이 지나치게 낀 시대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큐브릭은 오히려 테크놀로지 미학 자체를 이야기에 융합시키거나, 둘의 불균질함을 영화적 해법으로 이용하는 감독이었다. 그리고 그 큐브릭 특유의 영화적 특징이 가장 먼저 막을 올린 영화가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다.
피터 조지의 소설 <적색 경보>를 느슨하게 영화화한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는 핵에 대한 공포로 지구가 구역질을 해대던 시대의 우화다. 미국의 한 공군장군이 수소폭탄을 싣고 운항중인 모든 폭격기에 소비에트를 공습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폭격기들이 소비에트를 향해 날아가는 동안 패닉 상태가 된 백악관과 국방부는 즉각 철수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테크놀로지에는 문제가 있게 마련이고, 한대의 폭격기가 통신두절로 인해 철수 명령을 듣지 못한 채 모스크바를 향해 날아간다. 미국 대통령은 소비에트 서기장과 통화를 하지만 소비에트의 무인자동시스템은 이미 자동으로 미국을 향해 핵폭탄을 날린 후다.
만약 누군가가 커트 보네커트의 소설을 영화화한다면 그건 아마도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와 가장 닮아있을지도 모른다. 큐브릭은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그리고 싶었던 것이 "인간 특유의 부조리"라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의 부조리는 인간을 멸망시키고 있으며,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 재미있게도 큐브릭이 그려낸 부조리한 지구 멸망의 희극은 냉전시대가 막을 내린 지금도 여전히 지속중인데, 그건 위험천만한 1960년대의 시대정신에 속해있으면서도 세월의 흐름에 빛이 바래지 않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운명과 똑 닮아있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가 오로지 비뚤어진 유머감각 하나만으로 고전의 지위에 오른 건 당연히 아니다. 테크놀로지 미학 자체를 이야기에 융합시키는 큐브릭 특유의 화법은 여기서도 이르게 발현되고 있다. 특히 병사의 시선으로 핸드헬드 촬영한 전투장면이나, 당대의 새로운 영상문체를 창조하던 초창기 TV의 미학을 적극적으로 영화 속에 끌어들인 부분은 유심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 젊고 의기양양하고 아이디어로 넘치던 전성기 큐브릭의 우화를 좀 더 즐기고 싶다면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와 <시계태엽장치 오렌지>를 이어서 감상하시길 권한다.
글|김도훈 씨네21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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