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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내 곁엔 늘 악마가 꿈틀거린다 - 클로드 샤브롤의 <악의 꽃>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에서 첫 번째 시 ‘파괴’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된다. ‘노상 내 곁엔 악마가 꿈틀거린다.’ 보들레르의 시집이 복수로 존재하는 악의 꽃들에 대한 것이라면, 클로드 샤브롤의 은 한 집안에서 대물림 되는 ‘악의 꽃’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화는 이 시에 표현된 ‘언제나’와 ‘내 곁에’에 초점을 맞추어 ‘집’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영화가 시작하면 카메라는 패닝과 줌인으로 집의 바깥에서 집 안으로 들어간다. 제목과 함께 보이는 이미지는 꽃이나 씨앗이 아닌 울퉁불퉁한 열매들이다. 바람에 흔들리고 돌기가 있는 단단한 열매들이다. 카메라가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노래가 들려온다. “기억은 꿈속에 찾아오지만 보이는 것과 같지 않고 당신을 영원히 사로잡는 마법. 당신이 믿고 있는 기.. 더보기
강박증에 따른 이상심리의 비극 - 샤브롤의 <지옥> 은 원래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프로젝트이었다. 클루조 경력 상 가장 큰 야심이 집약됐던 작품인 만큼 그가 가진 모든 걸 쏟아 부었다. 예컨대, 의처증 남편에게 지독한 의심을 받는 부인의 심리를 묘사하기 위해 색색의 조명들을 그녀의 얼굴에 쏘는가 하면, 남편의 비뚤어진 정신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 수십 개의 거울 이미지를 활용하는 등 주로 실험적인 연출을 통한 미스터리를 선보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은 클루조 경력에 가장 큰 오점을 남긴 프로젝트가 되고 말았다. 남편 마르셀 역의 세르주 레지아니가 촬영과 동시에 병에 걸려 자크 갬블링으로 대체됐고 부인 오데트 역의 로미 슈나이더를 못미더워했던 제작사는 베레니체 베조로 일방적인 교체를 감행했다. 이에 따른 압박감으로 불면의 밤을 지새웠던 클루조 감독은 그만.. 더보기
[특별연재]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2 오늘 부터 여섯 번에 걸쳐 연재하는 샤브롤의 회상록은 클로드 샤브롤 감독이 1993년 프랑스 대표 주간지인 ‘텔레라마’에 기고한 것이다. '텔레라마'지는 지난 2010년 9월, 작고한 샤브롤을 기리기 위해 회상록의 여섯 편을 다시 한번 공개했다. 이 회고록은 여전히 미지의 작가로 남아 있는 샤브롤의 삶과 영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12월 14일부터 열리는 ‘클로드 샤브롤 추모전’ 기간에 맞춰 특별히 파리에서 영화, 사진 등의 예술작업을 하고 있는 김량씨의 번역으로 연재해 소개하기로 한다. (김성욱: 편집장) 제 2화 권력에 취한 소년 클로드 ‘온수기 사건’에서 살아남은 나는,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어딘가 문제를 가지고 태어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부모님.. 더보기
거미집의 여인 - <초콜릿 고마워> 영화가 시작되면 일군의 사람들이 미카(이자벨 위페르)와 폴론스키(자크 뒤트롱)의 결혼에 대해 숱한 의심의 말들을 쏟아낸다. 그럴만한 것이, 첫 번째 결혼 실패 이후 이들은 동일한 상대방과 다시 한 번 결합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두 번째 결혼까지 시간 간격이 무려 18년에 이른다. 그러니, 미카와 폴론스키의 재결합에 대한 무수한 말들은 의심의 실타래를 만들어 이렇게 따져 묻는 듯하다. ‘너희들의 관계가 순수하다고? 그걸 우리더러 믿으라는 거야?’ 미카는 스위스에 본사를 둔 유명 초콜릿 회사 사장이다. 그녀는 18년 전 짧게 결혼생활을 했던 유명 피아니스트 폴론스키와 재결합한다. 그동안 폴론스키에게는 아들 기욤(로돌프 파울리)이 생겼는데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지 못한 탓인지 어딘가 모르게 풀이 죽은 모습이.. 더보기
존 포드 웨스턴의 풍경 ‘존 포드 걸작선’ 마지막 날인 지난 12월 5일 상영 후에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의 강연이 이어졌다. ‘존 포드 웨스턴의 풍경’이란 제목으로 펼쳐진 이날 강연은 웨스턴의 원형적인 특징들이 잘 드러난 를 중심으로 존 포드 서부극에 대한 전반적인 경향과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 현장을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방금 보신 영화는 존 포드 영화중에서 가장 고전적인 웨스턴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고전 웨스턴의 시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인데, 웨스턴의 원형적인 특징들과 모뉴먼트 밸리의 풍경이 가장 적절하게 융합된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굉장히 남성적인 웨스턴이긴 하지만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남성성과 여성성이 가장 적절하게 결합된 영화이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TV.. 더보기
[edtorial] 당신은 샤브롤을 잘 알고 있습니까? 겨울의 누벨바그:클로드 샤브롤 추모전 클로드 샤브롤은 누벨바그의 다른 작가들보다 더 대중적인 흥행영화를 만들었지만 정작 덜 알려진 작가이다. 국내에 소개된 작품도 일부에 불과하고 그 대부분도 최근작들로 한정되어 있다. 극장에서 그의 영화를 만나는 기회도 고다르나 트뤼포, 로메르에 비해 적은 편이고, 이 애매한 작가를 ‘히치콕의 프랑스 후예’ 정도로 취급해 온 것도 그의 작가성에 대한 논의를 협소하게 만들었다. 샤브롤은 그가 비록 히치콕에 관한 저술을 했지만 스스로 프리츠 랑에게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토로한다. 그의 영화는 예술가보다는 장인으로 작업해야했던 랑의 미국시절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샤브롤은 전위적인 작가는 아니었지만 누벨바그 작가들 중에서 가장 발 빠른 감독이었다. 가장 먼저 에릭 로메르.. 더보기
이성이라는 마스크에 가려진 본능의 실체 - <마스크> 세상은 쇼다. 드러난 사실만 가지고는 진위 여부를 파악할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다. 최소한 클로드 샤브롤의 생각은 그렇다. TV쇼 사회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브라운관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 그의 경악할만한 가정사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1987)만 봐도 알 수 있다. 범죄소설가로 활동하는 롤랑(로빈 르누치)은 어쩐 일인지, TV쇼 사회자 크리스티앙(필립 느와레)의 전기를 써보려고 한다. 이에 크리스티앙은 흔쾌히 응하며 자신의 별장으로 롤랑을 끌어들인다. 그곳에서 롤랑이 관심을 갖는 인물은 크리스티앙의 양녀인 카트린(안느 브로쉐)이다. 실내에서도 벗을 줄 모르는 선글라스와 그에 대비되는 창백한 피부는 뭔가 비밀을 감춘 듯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과연, 롤랑은 그녀 주변에서 감지되는 이상한 .. 더보기
비밀의 틈새를 집요하게 파고들기 - <사촌들> 샤브롤의 미스터리는 당시로써 생소한 것이었다. 대개 상황의 급전환을 통한 심리 변화로 눈에 띄는 미스터리를 형성한 것에 반해 데뷔작 는 의식의 서서한 흐름에 이야기를 맡겨 미묘한 분위기로 미스터리를 구축한 까닭이다. 그래서 는 평단의 호평에도 불구, 흥행에 큰 재미를 못 보았지만 두 번째 작품 에 이르러서야 관객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다. 샤를르(제라드 블라인)는 법률 시험을 치르기 위해 파리로 상경, 사촌 폴(장 클로드 브리알리)의 집에 머물며 시험에 대비한다. 모범적인 샤를르와 달리 폴은 음주가무를 즐기는 까닭에 큰 도움을 받지는 못한다. 대신 자유분방한 파리의 환경과 적극적인 폴의 성격에 매료되지만 여인 플로랑스(줄리엣 마뉴엘)를 두고 둘의 사이가 어그러지면서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은 피를 나누었..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