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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2015 베니스 인 서울

[2015 베니스 인 서울] 매혹적인 파시즘 -페데리코 펠리니의 <아마코드>

[2015 베니스 인 서울]


매혹적인 파시즘

-페데리코 펠리니의 <아마코드>



페데리코 펠리니의 <아마코드>(1973)는 꽤 역설적인 영화다. 이 영화의 원제 ‘나는 기억한다’라는 말이 정확하게 어떤 기억을 지칭하는 것인지가 일단 불투명하다. 좋았던 옛 시절, 혹은 단지 펠리니의 유년기 경험을 향수하는 것인가? 이런 의문은 펠리니의 정치성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리나 베르트뮐러가 동시대에 했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펠리니는 우리들에게 지난 20년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표정과 흔적을 제공해 주었다. 펠리니가 스스로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말했지만 이것은 고정된 테마와 이데올로기적인 기획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지 최종 분석에서 보자면 그는 가장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리나 베르트뮐러는 펠리니가 <아마코드> 다음에 만든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가장 정치적인 영화라 말한 바 있다.


<아마코드>가 나온 1970년대는 회고영화(리트로 필름)들이 유럽에서 쏟아져 나오던 시절이다. 주로 30-40년대 파시즘 시대를 어떤 식으로든 회고하는 것이다. 여기에 어떤 논란이 있다. 파시즘 시대는 빔 벤더스가 말했듯, 영상과 언어가 가장 혼탁하고 오염된 시절이다. 영화가 파시즘과 밀착했던 그 시절을 작품으로 담고자 한다면 작가는 영화 형식에 새로운 접근을 시도해야만 한다. 파시즘 장치는 영화와 쇼 비즈니스에서 많은 요소들을 차용했고, 정치를 거대한 스펙터클 쇼로 분장하려 했다. 이런 열망은 회고영화가 나오던 70년대에 만연한 소비사회의 욕망과 부합하는 것이다. 가령, <아마코드>의 한 장면에서 펠리니가 묘사한 파시스트 제전은 파시스트들의 휘장, 행렬, 복장, 무솔리니의 거대한 형상, 전체주의적인 체조 등의 스펙터클 세계로 보인다. 영화가 국가의 거대한 미장센으로 동원되던 시기다. 정치는 그러므로 영화의 바깥에 있지 않았다.


이런 관점에서 두 종류의 작가들이 있다. 먼저 극단적으로 시각적 쾌락에 제한을 두는 금욕적 방식을 추구한 작가들이 있다. 다른 한쪽에는 반대로 더 거대한 스펙터클의 세계를 끌어와 이 문제를 내파하려 했던 작가들이 있다. 펠리니는 물론 후자의 대표적 작가다. 그는 일찍이 쇼 비즈니스와 서커스에의 매혹으로 영화에 들어섰다. <아마코드>에서 보여주는 유년기 체험이란 그러므로 파시즘 시대의 스펙터클과 어떤 식으로든 맞물려 있다. 파시즘의 시대를 바깥의 시선으로 파악하는 초연한 시선, 객관적 시선을 유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펠리니가 묘사하는 <아마코드>의 주 무대인 작은 마을은 지극히 평범한 마을이지만, 여기에도 파시즘의 욕망이 거대한 무지와 혼란 사이로 안개처럼(이는 비유가 아니다) 스며들어 있다. 펠리니의 방식은 작은 마을 공동체 내부, 혹은 인물 내부에 존재하는 뒤틀린 심리 정서의 병리학에서 시작한다. 마을 공동체와 유년기는 닫힌 세계라는 폐쇄성을 공유한다. 작은 마을은 자족적인 세계이지만 동시에 외부와 차단되어 있다. 마을 주민들은 반대로 그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힌다. 유년기는 또한 억제와 통제의 시기다. 표현할 수 없고 실현될 수 없는 유년기 아이들의 에너지는 다른 방식으로 비뚤어져 튀어나온다.



펠리니가 <아마코드>에서 보여주는 바, 파시즘은 이런 유년기의 억압, 공동체 내부에 잠복한 억압된 열망과 연결된다. 공통적인 것은 영원히 잔존하는 것으로서 이탈리아인의 철부지 같은 아이성이다. 어른이 되지 않는, 어른이 되지 못하는 아이성.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 혹은 자신을 다른 존재로 바꿔버리는 경험을 얻지 못한 아이들. 언제나 자기를 생각해 주는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아이들의 상황. 한때 아이들은 어머니에, 그 다음엔 아버지에 동일시하고, 때론 신부에게 혹은 마돈나에게 의존한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파시즘 제전에 참여한 한 선생은 파시즘이 우리를 젊게도 만들고 고대적인 것과 연결해 우리 내부의 피를 끓어오르게 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옆에서 뛰던 한 남자가 ‘무솔리니의 성기는 엄청나게 크다'고 거든다. 파시즘에 대한 열광과 성적 욕망이 혼합되는 이런 양상은 유년기 소년이 소녀에게 성적 환상을 품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뚱뚱한 소년은 예쁜 소녀에게 눈짓을 보내지만, 그녀가 잘생긴 다른 소년을 바라보는 것에 좌절한다. 이 뚱뚱한 아이는 파시스트 행렬에 참여하면서 위풍당당한 파시스트의 환상을 품는다.


<아마코드>의 주 에피소드는 크게 네 가지로, 모두 마을에서 벌어지는 의식과 관련된 행사들이다. 마녀 인형을 불태우는 성 조셉 날의 축제, 로마 국경일에 벌어지는 파시스트 사열식, 호화 여객선 렉스가 지나가는 것을 보기 위한 사람들의 행렬, 그리고 결혼식과 장례식 등. 특별히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파시스트 제전이 영화공장 치네치타의 정문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무솔리니 치하, 치네치타에서 제작된 영화의 스펙터클과 파시즘의 정치적 쇼를 연결하는 펠리니의 의도된 연출이다. 펠리니는 스펙터클한 쇼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린 멀티폼 multi-form의 작가다. 하지만, 종종 사람들은 집단을 이루면 모두 같은 옷 uni-form을 입은 어리석은 인간들이 되기도 한다. 군복 입은 남자를 좋아하는 한 여인의 에피소드는 이를 보여준다. 다른 일화도 있다. 영화의 첫 부분, 성 조셉의 날 축제는 짚으로 만든 마녀를 불태우는 마을의 오래된 의식이다. 축제가 벌어지는 가운데 자칫 사람을 불태워 버릴 수도 있는 우스꽝스런 순간이 연출된다. 집단적 군중들의 흥분과 도취, 과도한 열정이 불러오는 위험한 상황이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개별성뿐만 아니라 그들의 병리학적 결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이채롭다. 일견 평범하고 무해한 사람들이 집단성을 이루면 완전히 어리석은 행동을 벌이는 것이다. 함께한다는 구실로 획일화와 균질화가 벌어지고, 혼자일 때 그들은 어리석은 꿈, 미국화의 신화를 꿈꾼다. 이 영화가 나온 70년대에 파솔리니는 욕망에 근거한 소비사회를 얼굴 없는 ‘새로운 파시즘’이라 말했었다. 군사력·경찰력을 동원한 공포정치도 할 수 없던 국민의 획일화·균일화를 성취한 게 소비사회이다. 펠리니의 <아마코드>를 단순한 노스탤지어 영화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