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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이 펼치는 젊은 날의 초상 [영화읽기] 엘리아 카잔의 터키 이민자 출신으로 자신의 영화작업을 지속시키기 위해 ‘밀고자’라는 낙인이 찍힌 엘리아 카잔은 자신을 옹호한 영화 (1954) 이후 끊임없이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는 듯하다. 젊은 날의 초상, 청춘은 아름다웠다고 회고하는 것처럼 말이다. 직후인 1955년에 만든 이 그렇고, 1961년 작 역시 그러하다. 두 영화 모두 당시의 시대가 아닌 1930년대 이전의 시기를 다루고 있고, 풋풋한 젊은이들의 방황하는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편에서 제목을 따온 은 대공황기 직전인 1928년 미국 캔사스의 작은 마을과 고등학교를 무대로 펼쳐지는 비운의 사랑 이야기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기 많은 부잣집 도련님인 버드(이 영화로 데뷔한 워렌 비티)와 가난하지만 아름답고 모범.. 더보기
‘미국 시민’ 카잔이 자유주의 국가 미국에서 꿈꾸는 것 [영화읽기] 엘리아 카잔의 미국의 한 하원의원의 반유대주의 발언과 그에 동조하는 분위기에 충격을 받은 로라 홉슨(Laura Z. Hobson)은 반유대주의 문제를 다룬 「신사협정」을 썼으며, 제작자인 대릴 자눅(Darryl F. Zanuck)은 당시 미국사회의 민감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영화 제작에 나섰다. 영화 (1947)의 내러티브는 원작을 기반으로 유기적이고 탄탄하게 진행된다. 대부분의 시퀀스나 장면에서는 특이한 카메라 앵글이나 편집을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에 유머러스하면서도 진지한 대사, 그리고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가 빛을 발한다. ‘신사협정’이라는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영화는 ‘격렬하고 광적인’ 반유대주의자들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영화에서 반유대주의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백.. 더보기
배우의 감독, 엘리아 카잔 지난 11일 오후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상영 후, ‘배우의 감독, 엘리아 카잔’이란 주제로 영화평론가 김영진 교수의 강연이 있었다. 카잔과 말론 브랜도와 얽힌 재미있는 일화는 물론, 메소드 연기 스타일에 대해 들을 수 있었던 그 시간의 일부를 옮긴다. 김영진(영화 평론가, 명지대 교수): 엘리아 카잔이란 감독과 배우들에 얽힌 얘기를 드리겠다. 는 1954년에 아카데미에서 거의 상을 휩쓴 영화인데, 반미 위원회에서 엘리아 카잔이 동료들을 밀고한, 당대의 맥락에서 자유롭지 않은 영화이다. 권력집단에 맞서는 개인의 운명을 생각할 수 있는데 당시에는 상당히 복잡한 맥락에 있었던 영화이고 카잔의 경력에서는 오점이었던 작품이다. 말론 브랜도는 그런 면에서 이 영화 출현을 꺼려했고, 이런 저런 얘기 끝에 매일 오후 4.. 더보기
엘리아 카잔의 아메리카 지난 8일 오후 7시 시네마테크 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엘리아 카잔의 상영 후, ‘엘리아 카잔의 아메리카’란 제목으로 서울아트시네마 김성욱 프로그래머의 강연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엘리아 카잔의 영화적 세계에 대해 전반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었던 강연의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엘리아 카잔과 관련해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세계다. 1930년대에서 50년대를 거치며 카잔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표현했던 ‘아메리카’라는 사회는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겹치는 곳이었다. 엘리아 카잔은 2003년 9월 28일 사망했다. 1976년에 을 만들고 감독에서 은퇴한 셈이었는데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다. 하지만 1990년대에 「어 라이프」라는 자서전을 출간하면서.. 더보기
7년의 대장정, 그 시간 동안의 거리 두기 의 홍형숙 감독을 만나다! 지난 3, 4일 양일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한국사회가 낳은 영원한 경계인 재독 철학자 송두율 교수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영화 와 의 특별상영이 있었고, 4일 오후 1시 상영 후 이 영화를 만든 홍형숙 감독과 관객과의 대화의 시간이 마련되었다.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은 분단국가, 바로 우리 한국사회의 모습을 다시금 들여다보고 생각해볼 수 있었던지라 많은 질문이 오갔던 그 만남의 시간을 일부 옮겨본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이 작품이 2003년도와 2004년도를 거치면서 2010년도에 모습을 보이게 됐는데 그 과정의 시간들을 잠깐 얘기해주신다면. 홍형숙(영화감독): 2000년에 1편 찍으러 베를린에 갔다. 송두율 교수를 처음 뵙고 그때부터 인연을 맺기 시작했는데 빠른 .. 더보기
세기말에 카잔은 어떻게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나? 엘리아 카잔의 아메리카 [1] 엘리아 카잔은 2003년 9월 28일 사망했다. 1975년작인 으로 사실상 영화계를 은퇴했던 경력을 고려한다면 카잔의 후기의 삶이 비교적 조용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97년에 카잔은 860페이지에 달하는 '나의 삶'이라는 자서전을 출간해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20세기를 마감하는 사건이 있었다. 1999년 3월의 아카데미 수상식, 여기서 카잔은 '평생공헌상'을 수상했다. 곧바로 수상을 반대하는 의견이 나왔다. 카잔이 50년대에 동료들을 밀고했던 것이 문제였다. 1951년 반역행위조사위원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에서 증언을 거부해 16년 동안이나 할리우드에서 추방됐던 의 아브라함 폴란스키가 분명한.. 더보기
배우들의 감독, 엘리아 카잔 「엘리아 카잔: 나의 삶」이라는 자서전에서 보면 카잔은 영화계에서 은퇴한 후에 아침마다 면도용의 작은 거울을 쳐다보며 마치 아이같이 ‘도대체 너는 누구인가’라고 질문했다고 한다. 그는 평생 자신이 어떤 인물인가를 고민했던 인물이다. 카잔은 1909년 터키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그리스인의 부모님 아래서 태어나 그의 나이 네 살 때 부모님과 함께 터키의 압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이주민이었다. 부친의 양탄자 사업으로 어린 시절 카잔은 비교적 유복하게 성장했지만 자신이 터키출신의 이주자였기 때문에 미국에서 깊은 소외감을 경험해야만 했다. 그가 연극과 영화에 몰두한 것도 이른바 소외를 탈피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그는 아메리칸 드림의 체현자였고 동시에 그 꿈이 악몽으로 변하는 순간에 밀고자가 되기도.. 더보기
메소드 연기의 주술사를 만나자 4월6~18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엘리아 카잔 특별전 엘리아 카잔(1909~2003)에 대한 언급 가운데 아마도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것이 새로운 연기 스타일을 스크린에 도입한 영화감독이라는 평가일 것이다. 배우가 극중 인물에 몰입할 것을 요구하는 메소드 연기를 중심 원리로 삼아 배우들로부터 뛰어난 연기를 끌어낸 그와 함께 본격적인 리얼리즘 연기가 미국 영화사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카잔이 영화 카메라를 단순히 자연주의적인 ‘기록’의 도구로 간주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카메라는 오히려 현미경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의 외양 너머로 더 들어갈 수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카잔의 영화 속에 포착된 인물들은 내면에서 타오르는 어떤 ‘불꽃’을 보여주었다. 대개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