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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아듀 파라다이스

[비평좌담] "냉소주의가 위험하다" - 장 뤽 고다르의 <경멸>(이용철, 유운성, 김성욱)

“냉소주의가 위험하다”

-이용철, 유운성, 김성욱 비평좌담


3월 22일(일), 낙원에서 진행한 마지막 비평좌담의 테마는 ‘비평’이었다. 장 뤽 고다르의 <경멸>을 함께 본 후 이용철, 유운성, 김성욱 평론가가 비평의 현실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솔직하게 들려 주었고, 그 문제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오늘 대담에 “비평의 욕망”이란 제목을 붙여 보았다. 고다르의 <경멸>에는 두 가지 유명한 말이 있다. 처음에는 바쟁의 “영화는 우리의 시선을 우리가 욕망하는 세계로 대치한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이 영화를 보는 시사실의 스크린 밑에는 뤼미에르가 한 유명한 말이 적혀있다. “영화는 미래가 없는 발명이다.” 이 말은 영화를 둘러싼 모든 것이 끝났다는 말 같기도 하지만 반대로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다는 말 같기도 하다. 아오야마 신지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일본에서는 누벨바그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한국의 비평 역시 마찬가지다. 비평이 몰락했다고 했을 때, 사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게 아니냐고 질문할 수밖에 없다.

이용철(영화평론가)│평론가로서 변명을 하자면, 한국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비평은 지금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 못하다. 유명 평론가도 매체에서 잘리고 있다. 영화 비평으로 밥을 먹고 사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비평이 중요했던 시기는 한국에도 있었다. 다만 그 시간이 너무 짧았다. 비평은 일기와는 다른 것이어서 매체가 존재해야 하고 그걸 읽어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는 둘 다 찾아보기 어렵다. 긴 글을 써도 거의 피드백을 받지 못하며, 인터넷은 비평이 아니라 한 줄짜리 ‘감상문’으로 채워지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감독 중 폴 W. S. 앤더슨이 있다. 여러분들은 그 감독을 경멸할 수 있겠지만 최근 그가 만든 <폼페이 : 최후의 날> 같은 영화는 대선배인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이탈리아 여행>에 보내는 자신만의 고민, 응답이 들어 있는 영화이다. 비평의 끝자락에 서 있는 사람으로서 폴 W. S. 앤더슨이 보여준 것처럼 용감하고 명쾌한 비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무식해 보이는 영화를 찍지만 적어도 주제에 대해서는 매우 충실하다.




유운성(영화평론가)│비평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논리적으로 파헤치는 것이다. 이유를 하나하나 따져가며 어떤 영화, 감독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강령, 마니페스토의 형식으로 주장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폴 W. S. 앤더슨을 싫어하는 사람들과는 말도 섞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쨌든 레토릭이나 논리를 동원해서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자신의 생각을 주장할 때 비로소 비평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거의 십 년 동안 전반적인 냉소주의가 커져 가고 있다. 이 냉소주의가 위험하다. “나는 폴 W. S. 앤더슨을 좋아해”라고 말했을 때 “그래? 나도 한 번 볼게” 라고 반응하는 것이 바로 냉소주의다. 또는 “나는 폴 W. S. 앤더슨을 좋아해. 그런데 네가 그걸 인정해 줄 필요는 없어” 이것도 냉소주의다. 여기에는 레토릭도 이론도 없고 그냥 서로 다른 취향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공존 아닌 공존의 상태와 냉소주의가 문화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


비평은 서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몰락을 할 수도 없다. 또는 ‘평론가’가 흥한 적은 있지만 평론이 흥한 적은 없다고도 말할 수 있다. 나아가 비평이 위기라기보다는 비평이 잘못한 게 없다고 본다. 요즘 자꾸 ‘응답하라’고 하면서 90년대를 특권화시킨다. 어떤 이들은 90년대가 영화를 비롯한 문화적인 것들이 주목을 받았던 시대라고도 이야기하는데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90년대의 비평과 지금 나오는 비평을 같이 읽으면 당연히 지금 평론가들의 글이 훨씬 수준이 높다. 대학생, 또는 일반인들의 글만 읽어도 그렇다. 글을 쓰는 방식은 훨씬 발전했는데 그 글을 둘러싼 문화적 냉소주의가 비평이 받아들여지는 방식에 변화를 줬다. 어떤 영화에 대한 논리적인 평은 학술지에만 실리고, 레토릭을 주장하면 작은 모임 안에서 2, 3일간 잠깐 화제가 될 뿐이다.


영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평론가 중 한 명인 제임스 에이지 James Agee 는 영화에 대해 두세 줄짜리 짧은 평도 많이 썼다. 하지만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 안에서 자신이 좋아한 영화에 대해 남을 설득하려 했다. 그리고 그때 영화에 대한 자신의 태도와 철학을 분명히 드러냈다. 앙드레 바쟁, 세르주 다네, 조나단 로젠봄 같은 평론가들은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그리고 영화와 우리가 만나는 ‘무언가’의 정체를 계속 자문하면서 영화 철학이라 부를 만한 것을 생산해냈다. 그게 비평이며 그것이 감동을 준다.

오늘 <경멸>을 보고 영화의 미래를 논하며 우울하다는 얘기를 나눴다. 그런데 영화가 우리에게서 떠나고 있다는 사실을 수긍하면서 영화와 우리가 어떤 관계를 맺을지 다시 정직하게 고민한 것이 고다르의 강함이다. 우리도 그 강함을 간직하면서 영화와의 관계를 어떻게 회복하고 수립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김성욱│읽을 거리는 지금이 더 많고 흥미로운 글도 지금이 더 많다. 글이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냉소주의와 관련해서, 비평의 지반이 불분명해진다는 느낌이다. “그 영화가 좋은데, 그래서 뭐?”, “그 영화가 별로라고? 네가 별로면 그만이지” 이런 식이다. 간혹 SNS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져도 사회적인 것으로 확장되지 못한다.

십 년 전과 비교했을 때 영화의 개봉 편수는 엄청나게 늘었지만 그에 비해 관객 자체는 크게 늘지 않았다. 즉 한 편의 영화가 관객과 만나는 수 자체가 줄어든 것이다. 이때 관람의 패턴이 취향주의로 빠지고 만다. 서로 날을 세우고 전투를 벌일 필요가 없어졌다. 오늘은 이 영화를 보고 내일은 저 영화를 본다. 자기 취향 안에서 재미있는 영화를 골라 보고 다른 취향으로는 넘어가지 않는다. 취향을 세분화시킨 다음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것, 이건 멀티플렉스의 전략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시네필들 역시 서로에게 귀 기울이지 않는 경향이 생기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더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정리│김보년 프로그램팀

사진│장미화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