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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주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Cinetalk

[시네토크]<퐁네프의 연인들> 배우 한예리와의 대화 “세월이 흐른 뒤에 봐도 좋은 영화가 좋은 영화”

“세월이 흐른 뒤에 봐도 좋은 영화가 좋은 영화”

2015년 2월 8일<퐁네프의 연인들> - 배우 한예리와의 대화



김성욱(프로그램 디렉터) 한예리씨는 10회 째를 맞은 ‘친구들 영화제’에 참여한 일곱 번째 여배우이다. 직접 출연한 영화가 아니라 좋아하는 작품을 선택해서 상영하는 건 배우에게도 좀 드문 기회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한예리(배우) 사실 이 영화를 다시 보며 <퐁네프의 연인들>이 정말 내가 ‘좋아하는’ 영화였는지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됐다. 스물두 살 때 처음 본 뒤 막연히 다시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최근 재개봉 했을 때 다시 보고 충격을 받았다. 내가 십 년 전엔 정말 젊었구나, 젊어서 이 사랑을 응원하고 공감하고, 감상에 젖고 그렇게 봤었구나 싶었다. 이제는 감당하기엔 너무 힘든 사랑이라는 느낌이 든다(웃음). 영화를 새롭게 볼 수 있었던 재밌는 경험이었다.

김성욱 한국에는 1992년 4월에 처음 개봉했다. 레오 카락스 감독의 사랑 이야기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서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마지막을 장렬히 산화시킨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방금 한예리씨가 말했듯이 남녀의 만남과 사랑을 대단히 격정적인 이야기로 펼쳐내는 작품이다. 배우로서 이런 작품을 만난다는 것이 상당히 부러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출연하셨던 <동창생>, <해무>에서도 물론 로맨스가 있었지만 이 정도로 격렬한 느낌은 아니었다.

한예리 카락스 감독의 강렬한 개성 때문인지 그의 영화에는 ‘정상적’인 인물들이 거의 나오지 않는 것 같다. 순수한 광기라고 할까, 기회가 된다면 배우로서는 굉장히 해보고 싶은 연기다. 굉장히 오랜 기간 찍었고 제작비도 꽤 많이 들어간 작품이기 때문에 특히나 지금의 한국 영화 산업에서는 불가능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여러모로 부러운 작품이다.

김성욱 드니 라방이라는 배우는 원래부터 춤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고, 감독이 그의 몸동작과 제스처들을 민감하게 보고 캐스팅했다고 한다. 한예리 씨도 마찬가지로 춤에서 출발을 했기 때문에 드니 라방이 갖고 있는 몸의 아름다움, 활력 같은 것을 느꼈을 것 같다.

한예리 처음 봤을 때 작은 체구에서 터져 나오는 에너지가 무척 세다고 느꼈다. 좋은 감독을 만나 그 에너지를 영상으로 표출할 수 있어 그에게는 참 다행한 일이라 생각했다. 아니었으면 그걸 어떻게 감당하고 살았을까. 카락스 감독과도 많이 닮아있지 않나 싶다. 감독 본인도 결코 평범하지 않은, 집착적이고 폐쇄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고 들었다. 그런 부분들이 드니 라방에 투사되어 드니 라방이 알렉스로서 그의 영화에 계속 나오게 된 것 아닐까. 한 감독의 영원한 페르소나로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참 부러운 일이다.

김성욱 줄리엣 비노쉬의 매력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예리 부산영화제 때 직접 뵌 적이 있다. 영화에서처럼 아주 호탕하게 웃으시더라. 아이 같고 천진한 그런 모습에 많은 감독들이 매료당할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긍정의 에너지, 밝은 아우라가 넘쳐흐르는 분이었다. <초콜릿>(라세 할스트롬, 2000)을 통해 알게 된 후 그녀의 작품들을 많이 찾아 봤는데 최근작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에서의 퇴락한 여배우 연기도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녀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어떻게 연기가 그렇게 계속 발전할 수 있는지 신기하다.

김성욱 비노쉬의 예전 인터뷰에 이런 얘기가 있다. ‘각본을 읽으면서 언제나 자극과 도발을 받고 싶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영역으로 가고 싶고, 정치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영적으로든 무언가 새로운 일이 일어나야만 한다는 일종의 절박함이 배우로서 언제나 존재한다.’ 그래서 젊을 때는 더, 더 달리고 싶었다고 말하더라. 실제로 여기서도 달리고 싶다는 그 에너지가 아주 간절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 영화 자체가 삼십대 초반의 감독이 이십대 후반의 동년배 배우들을 데리고 찍은 ‘젊은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한국영화에 아쉬움을 느끼는 측면도 있다. 젊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젊음을 폭발시키는 영화가 최근에는 좀 적어진 것 같다.



한예리 공감한다. 시대의 흐름 때문인지 몰라도 그런 영화를 제안 받은 경우도 없고 시나리오 자체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김성욱 개인적으로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가 촛불로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한예리 씨는 어떤 장면이 기억에 남았는지 궁금하다.

한예리 오늘은 앞부분에 많이 몰입했던 것 같다. 초반에 드니 라방이 자동차에 다리를 다치는 장면부터 시작해 처음부터 뭔가 부러진, 부서진 사랑을 암시한다. ‘우리는 조각난 채로 시작한다’라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김성욱 나도 그 장면은 참 수수께끼 같다. 손 잡은 두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다. 그리고 미셸이 처음 알렉스를 보는 순간도 강렬했다. 이런 영화 같은 경우는 처음 만났을 때 남녀가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확인하는지가 중요한데, 처음에는 줄리엣 비노쉬가 드니 라방이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고, 그 다음에는 반대로 드니 라방이 잠들어있는 비노쉬를 본다. 그렇게 서로를 처음 인식하면서 어떤 감정을 갖게 되는가 하는 것이 이 영화에서 상세히 설명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두 남녀의 밀접한 관계를 잘 연결해 보여준다.

한예리 의외로 매우 로맨틱하기까지 하다.

김성욱 하나를 더하자면 그 바닷가 장면. 뛰어가다가 손을 잡는 줄 알았는데 손이 아니라...(웃음).

한예리 깜짝 놀랐다. 스무 살 때는 그게 기억이 안 났는데(웃음).

김성욱 나도 예전에 볼 때는 몰랐다. 아마 편집이 돼서 없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다시 보면서 그 장면이 너무 재밌기도 하고 무척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한예리 굉장히 자연스러워서 그게 또 놀랍더라.

관객1 이 작품을 다섯 번 정도 봤다. 첫 번째 볼 때는 “네가 하늘이 하얗다고 말하면 나는 구름이 검다고 할 거야”라는 대사만 기억났다. 그렇게 낭만적인 영화로 기억했었다. 그런데 그 뒤로 영화를 보면서 점차 알렉스의 캐릭터가 무섭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야기를 해보니 많은 사람들이 <퐁네프의 연인들>을 각자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 같더라. 한예리씨는 어떤 영화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한예리 예전에는 그냥 맹목적으로 흡수하며 봤었다. 두 연인의 사랑에 취해서 대단히 감성적, 감상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사실 ‘죽을 만큼’ 사랑한다는 자체가 굉장히 힘든 일 아닌가. 지금은 오히려 한 걸음 물러서서 ‘과연 저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라고 새롭게 생각하게 됐다. 세월이 흐른 뒤에 봐도 좋은 영화가 역시 좋은 영화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지난 영화들을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관객2 최근 “세기의 사랑을 기억한다”는 광고 문구에 이끌려 보고서는 충격을 받았다. 영화 속 두 사람이 사랑하는 모습이 아름답긴 하지만 사실 육체적, 심리적으로 너무 큰 고통을 겪는다. 저런 사랑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한예리 미셸에게 그림이 전부라면 나에겐 춤이 전부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미셸이 시력을 잃고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 것처럼, 내가 더 이상 팔이나 다리를 사용하지 못 해 춤을 출 수 없게 된다면 어떨까란 생각을 해 본 적 있다. 아마 나도 스스로를 저렇게 밀어붙였을 것 같다. 한동안은 정신을 못 차리지 않았을까. 그 와중에 누군가가 나타나 그냥 지금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주고, 나도 거기에 모든 걸 의존하게 되는 상황이라면 충분히 저런 사랑도 가능하지 않을까. 또 당연히 그걸 사랑이라고 믿을 것 같다.

김성욱 카락스의 전작인 <소년, 소녀를 만나다>, <나쁜 피>가 사랑의 첫 순간을 다룬 영화라면 <퐁네프의 연인들>은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들이 만나 그 상처를 극복해가는 이야기에 가깝다. 이 영화는 낭만적인 사랑이야기로 포장되었지만 막상 영화를 보면 어 이게 아닌데, 생각하게 만드는 갭이 오히려 흥미롭다.

한예리 관객들에게도 ‘이게 진짜 사랑일 것 같아?’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것 같다. 두 사람이 삼 년 만에 다시 만났을 때도 계속 불안감이 조성된다. 다리 위에서 위태롭게 걷다가 끝내 함께 물에 빠진다. 사실 그렇게 영화가 비극으로 끝나는 줄 알았다(웃음).


김성욱 물에 빠져봐야 서로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랑이랄까.

한예리 그런 것 같다. 끝까지 가 봐야 알게 되는 사랑.


관객3 연기자 지망생인데 이 작품을 오늘 처음 관람하면서 너무 어렵게 느껴졌다. 이해를 위한 조언을 해주실 수 있는지.

한예리 꼭 그 순간이 아니더라도 시간이 지나 다시 봤을 때 소화가 되는 영화들이 있다. 그 이해되지 않고 소화되지 않는 상태를 느끼는 것도 영화를 보는 재미가 아닐까. 뚜렷한 취향이 있는 건 좋지만 다양한 영화를 접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김성욱 아직 잘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건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뭔가를 더 느끼거나 발견하게 될 여지가 여전히 남아있으니까.

관객4 이 영화를 찍으면서 레오 카락스 감독이 처음으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그만큼 많은 위기를 거치며 힘들게 만든 작품이었다고 하더라. 그래도 배우들이 끝까지 감독을 믿고 따라줬기 때문에 영화사에 오래 남는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한예리 씨는 연출자가 이렇게 ‘힘든’ 영화에 출연을 부탁하면 어떻게 하실지 듣고 싶다.

한예리 강진아 감독님도 그렇고 한창 영화를 시작할 때 만났던 이종필, 허정 감독님 등이 모두 자리를 잘 잡으셔서 내심 뿌듯하다. 이들이 언제 나를 부를지 기대하고 있다. 젊은 나이에 그런 분들을 만났다는 게 행운인 것 같다. 그들과 함께 보냈던 시간과 추억들이 있기 때문에 힘든 영화라 하더라도 나를 부른다면 거절할 수 없을 거다. 같이 현장에 있는 것만으로도 참 좋다. 그런 기회가 이제 또 생기겠지? 그러기를 바란다.

김성욱 줄리엣 비노쉬가 이 영화 때문에 제작기간 삼 년 동안 무수한 다른 영화들에 출연하기를 거절했다고 한다. 결과를 떠나 배우로서도 그런 작품은 굉장히 부담일 것 같은데 <해무> 때도 비슷한 상황이지 않았나.

한예리 지금 한국영화계에서 6개월 이상 촬영을 하는 게 드문 경우다. 백 편에 한 편 정도 있을까 말까하다. 배우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쉽지 않은 작업이었고 그만큼 감독님과 작품에 대한 믿음, 그리고 배우들 상호간의 신뢰가 확실히 있었다.

김성욱 사랑을 하는 사람들도 어쨌든 불안의 느낌이 있지 않나. 돌아갈 곳이 있는 미셸과 돌아갈 곳이 없는 알렉스의 불균등함이 영화 속에서 불안을 가중시키는 것 같다.

한예리 미셸은 계속 언젠가는 자기의 다른 삶에 대해 얘기해 주겠다고 하면서 결국 끝까지 털어놓지 않는다. 너를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다는 말만 남긴 채 떠나 버리기도 하고, 정말 이기적인 모습이 있다.

김성욱 누구에게든 여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곳에 있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 그리고 그런 욕구를 채우는 방법 중 하나가 영화를 보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런 욕구를 가장 완전하게 해결할 수 있는 직업 중 하나가 배우다. 여러 개의 삶을 여러 방식으로 연기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한예리 정말 좋아하는 인물을 연기할 때는 이게 끝나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걸 밀어내고 그 다음 작품의 인물을 채워 넣고, 또 새로이 그와 대화를 해야하는 작업들이 쉽지 않다. 편협하게 특정 인물에 너무 빠져들거나 좋아하게 되면 힘들어지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완전히 나 아닌 누군가가 되어서 연기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에 나에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조금씩 그런 마음의 균열들이 일어나는 느낌이 든다.

김성욱 개인적으로는 한예리 씨가 레오 카락스 영화처럼 몸의 아름다움을 살리는, 몸을 역동적으로 많이 움직이는 영화에 출연한 걸 보고 싶다.

한예리 오늘 너무 즐거웠다. 다음에도 내가 본 다른 영화들을 큰 화면에서 함께 보면 좋겠다. 곧 구정인데 새해 잘 맞으시면 좋겠다.


정리ㅣ장윤정 자원활동가

사진ㅣ장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