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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주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Cinetalk

[시네토크] <꼬방동네 사람들> - 배창호 감독, 안성기 배우와의 대화 “보편성이라는 것은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다는 걸 느꼈다.”

“보편성이라는 것은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다는 걸 느꼈다.”

2015년 1월 24일 <꼬방동네 사람들> - 배창호, 안성기 시네토크





김성욱(프로그램 디렉터) 방금 보신 <꼬방동네 사람들>을 만든 배창호 감독님과 주연 배우인 안성기 씨를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다. 이전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배창호 감독 특별전”을 할 때 이 영화를 개막작으로 틀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오늘은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해 극장에서 처음 공개하였다. 이 영화는 1982년, 푸른극장에서 개봉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두 분이 다시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는데 아무래도 특별한 감회가 있을 것 같다. 아마 그때의 관객들과 오늘 관객들의 웃음 포인트가 맞지 않다고 느낀 순간도 있었을 텐데, 오늘 두 분은 이 영화를 어떻게 보았는지 궁금하다.

배창호(영화 감독) 그때 사용했던 카메라가 Arri 2C 였나, 굉장히 오래된 카메라라서 렌즈 상태가 안 좋았다. 그 당시엔 영사시설도 좋지가 않아서 디테일이 잘 안 사는 화면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번에 디지털 기술을 통해 그 디테일들이 선명하게 살아나 무엇보다 반가웠다. 사운드는 모노 녹음이긴 하지만 확실히 디지털의 전달력이 더 나은 것 같다. 기분이 좋다.

이 영화를 상영한 푸른극장이라는 곳은 서울에 있는 재개봉관이었다. 말했다시피 영사시설도 안 좋았고, 개봉을 여름에 했는데 상영관 뒤에 식당용 대형 선풍기를 두 대나 틀었다. 영화 소리가 잘 안 들려서 내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관객이 10만 명이 넘었다. 그리고 오늘 관객 분들이 반응한 장면들은 당시 개봉 때와 똑같다. 보편성이라는 것은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다는 걸 느꼈다.

김성욱 안성기씨는 배창호 감독님과 13편의 영화를 함께 했다. 그 중에서도 이 영화가 배창호 감독님과의 첫 번째 작업이다.

안성기(배우) 당시 배창호 감독님은 20대였고 나는 30살이었다. 이 작품에 출연하기 전 이장호 감독님의 <바람 불어 좋은 날>에서 덕배라는 배역을 맡았었다.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한 중국집 배달부 역할이었는데, 그때 이장호 감독님이 내가 너무 잘생겼다고, 좀 못생기게 나와야 한다고 하셨다(웃음). 그래서 코에다 힘을 줘서 콧방울도 키우고 입도 좀 벌리고 연기를 했었는데, 그 모습이 이 영화에 군데군데 묻어 있다. 오늘 보는데 그게 보여서 민망해 죽는 줄 알았다. 특히 처음 등장할 때 앙각으로 얼굴을 잡는데, 그 코가... 어휴 아쉽다(웃음).

하지만 카메라 앵글이나 그런 것을 의식하지 않고 배역의 감정만을 쫓아간 것은 참 좋았다. 몇 년이 지나 배우로서 카메라 앵글, 소위 얼짱 각도를 알게 되니 그런 걸 염두에 두고 연기를 하게 되더라. 그런게 현실감을 떨어트린 감이 있는데 <꼬방동네 사람들> 속 내 모습은 날 것 같은 젊음이 느껴진다.

상대역인 김보연씨에 대한 기억도 떠오른다. 정말 예뻤다. 또 보연씨는 감독님이 원하는 감정을 그대로 표현을 해 준다. 나는 눈물 흘리는 연기를 못 하는데 김보연씨는 레디, 하면 벌써 눈물이 글썽글썽하다가 액션! 하면 바로 눈물을 흘렸다. 그게 얼마나 부럽던지(웃음). 내가 같이 연기해 본 배우 중에서도 감정이 가장 깊은 배우 중 한 명이었다. 그 모습을 극장에서 다시 볼 수 있어 매우 기뻤다.


김성욱 이 영화의 첫 촬영은 부산에서 시작했다고 배창호 감독님께 들었다. 첫 번째 촬영, 첫 번째 만남, 이런 이야기도 궁금하다.

안성기 배창호 감독님과의 인연은 <바람 불어 좋은 날>부터 시작했다. 배창호 감독님은 대학을 졸업하고 케냐에서 대기업 종합상사의 지사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화를 워낙 좋아해서 사표를 낸 뒤 바로 이장호 감독님의 조감독으로 영화 경력을 시작했다. <바람 불어 좋은 날>도 사실 배창호 감독님 덕분에 했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장호 감독님은 그 인물이 나와는 좀 안 맞다고 반대를 했는데 배창호 감독님이 내가 충분히 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해 결국 내가 출연하게 됐다. 그 후 같은 영화 동료이자 친구로서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는 거의 붙어 살았다. 아침에 눈 뜨면 만나서 영화 얘기하고, 영화 찍으면서도 다음 영화 얘기했다. 특히 <꼬방동네 사람들>은 주연에서 단역까지, 그리고 스탭들도 모두 가족 같이 찍었던 그런 영화다.

김성욱 사실 이 영화는 굉장히 사회적인 주제를 갖고 있다. 그런데 다시 보니 원래 배창호 감독님이 갖고 있는 사랑, 정의, 회심, 이런 부분이 전체적으로 잘 느껴진다. 처음에 이 영화를 만들 때는 사회적 문제를 더 드러낼 의도였지만 검열이라든지 여러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제목도 ‘검은 장갑’이 될 뻔 한 걸로 알고 있고,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들었다.

배창호 당시 정부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소외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걸 원치 않았다. <꼬방동네 사람들>의 원작은 이철용씨가 오랫동안 빈민 생활을 하며 겪은 목격담을 드라마 없이 담담하게 써 내려간 이야기다. 처음엔 지금 영화보다 훨씬 사실적인 느낌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그 당시엔 시나리오 심의라는 게 있었다. 시나리오 심의에서 몇 번 꺾이고, 또 만만치 않은 제작비 때문에 대중성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작자의 의사도 물론 존중해야 했다. 그래서 결국 멜로드라마의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 한도 내에서 원작 자체가 얘기하려 했던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여러 가지 일화가 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이야기를 거의 다 찍어놓고 마지막 콘티를 정할 때의 일이다. 1안에서 3안까지 다른 결말을 준비해 놓았다.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몰라 마지막 순간까지 답답함을 느꼈는데 결국 이 영화의 갈피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 보면 교훈적이고 설명적인 장면이 군데군데 있지만 사랑의 시선으로 보니 마지막 시퀀스가 다 풀렸고, 홀가분하게 끝낼 수 있었다.

김성욱 나는 배창호 감독님의 영화를 볼 때마다 언제나 박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 다음에 만든 <철인들>(1982)도 굉장히 박력 있는 남자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다시 보니 이동 촬영도 많고 핸드헬드도 있다. 상당히 많은 드라마를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촬영의 기법도 매우 다양한 것이다. 20대에 만든 데뷔작이라는 점에서 그런 부분이 놀라웠다. 감독의 야심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배창호 인물들의 심리를 표현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기술은 다 활용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예를 들어 처음에 빨간 팬티를 놓고 싸우는 장면은 형식미를 살려서 롱테이크로 찍으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작고하신 제작자께서 ‘이거 다시 찍어야 되겠다, 감정이 너무 부족하다’고 말해서 설전을 벌였던 기억이 난다. 결국 그 분 말씀이 맞았던 것 같다. 감정에 충실하게 연출했던 것이 지금의 관객들도 공감할 수 있는 면을 만들어주지 않았나 싶다. 그 당시에 360도 회전이라든지 핸드헬드라든지, 처음 시도한 형식이 많아서 조명팀도 고생을 많이 했고 특히 정광석 촬영감독이 애를 많이 썼다.



김성욱 영화의 마지막 결말에 대한 세 가지 안이 있었다고 했다. 원래 생각했던 결말은 지금보다 더 짧은 버전이었던 걸로 알고 있다.

배창호 김보연씨가 수레를 끌고 가면 동네 어귀에 안성기씨의 차가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김보연씨가 그 차를 그냥 스쳐지나가고, 안성기씨 차가 수레를 천천히 따라가는 장면에서 끝내려 했다. 뒷내용을 너무 자세하게 보여주는 건 군더더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작자가 딱 호출을 해서(웃음), “이건 라스트의 중요한 부분인데 좀 울려야 한다”고 하시더라. 그 말을 듣고 돌이켜보니 이 영화의 톤에는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 분이 바라보신 어떤 성숙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이번에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하면서 차가 따라가는 장면에서 페이드아웃 하며 끝내는 것도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 하나의 ‘자료’가 된 영화를 30년이 지나 마음대로 고칠 수 없었다.

관객1 안성기 선생님께 드리고 싶은 질문이 있다. 오늘 모습이 김기영 감독님의 <하녀>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화면에서 만난 모습 중 가장 젊은 모습이다. 1960년대에 데뷔하신 이후 지금까지 계속 활동하고 계시는데 1960년대 <하녀>를 찍었을 때의 마음가짐과 80년대 <꼬방동네 사람들>을 찍으면서 가졌던 마음가짐, 그리고 최근에 임권택 감독님과 <화장>을 찍으면서 가졌던 마음가짐. 이 세 시기를 거치면서 배우로서 어떤 생각의 변화를 겪었는지 여쭤보고 싶다.

안성기 내가 1957년도부터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으니 <하녀>는 내가 초등학교 2-3학년 때 찍은 영화다. 김기영 감독님은 아버지와 대학 동창이기도 했고, 아버지를 영화판에 끌어들여 제작도 하게 만든 분이다. 애초에 자신의 영화에 배역을 맡길 만한 아이가 마땅하지 않으니 친구 아들을 데려다 출연시킨 것이다(웃음). 그런데 시키는 대로 어떻게 잘하다보니 소문이 났다. 내 뜻을 가질 나이도 아니었지만 내 뜻도, 부모님의 뜻과도 상관없이 연기를 시작했다. 그때 신문광고를 보면 주연 이름을 써놓고 따로 “천재소년 안성기” 이렇게 써있었다. 그때는 좀 개구쟁이여서 그런 칭찬을 즐겼던 것 같기도 하다. 생각 없이, 그냥 잘 한다 소리 들으니 재미있게 했었다.

그리고 1978년에 성인으로 다시 데뷔를 했다. 그런데 70년대가 정치적으로도 어두운 시기였지만 영화 검열이 대단할 때였다. 특히 영화는 직접 보여주는 예술이다보니 강력한 가위질이 들어왔다. 평생 영화를 할 입장으로서 참 암담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80년대에 접어들며 조금씩 틈이 생겼다. <바람 불어 좋은 날>, <꼬방동네 사람들>이 나오면서 영화계의 흐름이 약간씩 바뀔 때였다. 물론 아직 검열이 있지만, 그래도 해보고 싶은 이야기를 어떻게든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의무감도 좀 느꼈던 시기였다.

그리고 작년에는 임권택 감독님의 102번 째 영화 <화장>을 찍었다. 글쎄, 이제 시나리오를 받으면 ‘어떻게 연기를 안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연기를 안 하는 것도 연기라면 연기인데, 그게 참 힘들다. 어떻게 의식을 안 하고, 너무 강조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 나이에 맞는 역할과 그 인물에 맞는 정서를 전달할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하고 있다. 또 이제는 웬만한 현장에서는 내가 나이도 제일 많다. 그러다보니 현장 분위기가 나에게 달려있는 편이다. 내가 말없이 가만있으면 분위기가 아주 가라앉아서 다들 조심조심 다니더라. 그래서 일부러 흰소리도 하고 농담도 하고, 잠깐 쉬자고 먼저 말도 꺼낸다. 요즘은 연기를 하는 배우는 물론, 현장의 분위기 메이커의 역할까지 하고 있는 중이다.

관객2 배창호 감독님이 이장호 감독님에게 어떤 것을 배우셨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어떤 감독의 영화에 가장 감동을 많이 느끼는지도 궁금하다. 그리고 <꼬방동네 사람들>은 옛날 이탈리아 영화를 생각나게 한다.



배창호 이장호 감독님한테 배운 점이 참 많다. 내가 현장경험 없이 영화계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장호 감독님의 많은 행동이 그 자체로 텍스트가 됐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서울에 올라온 하류인생들의 이야기였는데 그때 남대문시장에 인력시장이 있었다. 이장호 감독님이 새벽에 거기로 가서 사람들 인터뷰를 하고 현장을 직접 느끼는 모습을 보며 현장은 발로 뛰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래서 <꼬방동네 사람들>을 찍을 때 촬영장 근처 동네에 3개월 정도 지낼 방을 하나 얻어 거기서 살았다. 가급적 인물들의 삶을 체험하려 노력했던 건 이장호 감독님께 배운 것이다. 또 하나, 이장호 감독님이 콘티를 잘 만들어오지 않는다. 감독이 되면 조감독들 힘들지 않게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것도 이장호 감독님께 배웠다(웃음).

이탈리아 영화 중에서는 <자전거 도둑>(비토리오 데 시카), <길>(페데리코 펠리니) 등을 좋아한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는 리얼리즘을 시적으로 승화시키면서 인간을 잘 파악했다는 점에서 데뷔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좋아한다. 특히 <자전거 도둑>은 엑스트라 연출을 생생하게 잘 했다. <꼬방동네 사람들>도 원작자가 현장에 거의 머물다시피 하면서 엑스트라 연출을 도와줬다. 저 뒤에 용변 보고 있는 아이라든지, 고무줄 놀이 하는 아이 등이 그렇게 나온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본보기로 삼은 영화의 스승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다. 인생의 향기, 인생의 품격, 인생의 깊은 것을 다룬 영화라면 다 좋아한다.

관객3 영화 중간에 공옥진 선생님이 춤을 추는데, 그 분을 섭외한 이유를 듣고 싶다. 그리고 영화를 촬영한 장소가 실제로 어느 지역인지도 알고 싶다.

배창호 시나리오에는 ‘짹짹이 아줌마’로 나온 인물이다. 어떤 배우를 섭외할까 고민하던 중 마침 병신춤으로 각광을 받던 여자 춤꾼 한 분이 눈에 띄었다. 그분이 물론 공옥진 여사였다. 그분의 공연을 보며 이분이 짹짹이 아줌마를 연기하면 영화의 특징도 살리고 신선함도 불어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연기도 처음 하는 분을 모시고 동시녹음까지 한 번에 진행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영화의 기록적인 측면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원작의 무대는 서울의 한 마을이었는데 촬영은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에서 진행했다. 이 장소를 찾은 건 정광석 촬영감독의 공이 컸다. 영화를 많이 하신 분이라 다양한 장소를 굉장히 많이 아신다. 그런데 동네 주민들과 갈등이 꽤 많았다. 촬영 중에 동네 한량들이 와서 소주병을 들고 협박을 하기도 하고, 또 밤에는 발전기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잔다며 항의를 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 분들의 협조 때문에 이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관객4 두 분이 배우로서 함께 출연했던 <개그맨>(이명세)을 좋아한다. 특히 배창호 감독님의 공중전화 씬을 굉장히 좋아한다. 그때 서로의 연기를 어떻게 느끼셨는지 궁금하다.

안성기 배창호 감독님이 배우들이랑 얘기를 나눌 때 보면 연기를 굉장히 잘한다. 대학생 때 연극도 했기 때문에 아마 배우의 꿈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개그맨>은 배창호 감독님이 배우로서 하나의 좋은 작품을 남긴 영화라 생각한다. 평소 연기하는 모습을 봤었기 때문에 영화에 함께 출연하면서도 많이 낯설지는 않았다. 그런데 영화가 개봉한 뒤 내 연기에 대한 말은 없고 배창호 감독님 얘기만 계속 나와 좀 서운하기도 했다(웃음). 그런데 배창호 감독님이 연기를 정말 잘 했다. 특히 달걀 깨 먹는 그 장면. 그때 감독님이 달걀을 몇 개나 먹었죠?

배창호 백 개 정도?

안성기 맞다. NG까지 포함해서 목이 멜 정도로 많이 먹었는데 프로 배우 이상의 집중력을 갖고 몰두를 하더라. 나도 <개그맨>을 매우 좋아한다.

배창호 과찬이다. 학창시절 연기자의 꿈을 가졌던 건 사실이지만 감독이 된 후 다 잊어버렸었다. 그런데 <개그맨>의 시나리오를 이명세 감독과 같이 쓰던 중 이감독이 ‘형은 어때?’라고 묻더라. 연기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빨리 기획이 돼서 빨리 찍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내가 출연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나에게도 좋은 필모그래피로 남았다.

관객5 감독님의 다음 작품을 보고 싶다.

배창호 앞으로 영화, 해야지. <여행>이라는 영화를 한 지 벌써 5년이 됐다. 준비하고 있다. 이제 시간적으로 많은 영화를 할 수 없을 것 같고, 정말 총력을 다 할 수 있는 그런 영화를 만들려고 끊임없이 준비하고 있다.



김성욱 80년대에 새로운 유형의 영화들이 등장을 했고, 또 이 영화들의 등장이 90년대의 새로운 영화들의 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다시 돌아보면 확실히 80년대에 한국 영화의 변화가 시작됐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 변화에 대해, 그리고 지금 과거의 영화를 보며 드는 생각에 대해 두 분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안성기 80년대는 자유롭지 못 했던 시기다. 감독들이 자신의 소리를 마음껏 표현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울타리 속에서 눈치를 봐 가며 영화를 만들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그리고 영화에도 거대 산업 자본이 들어오면서 판이 커지고, 결국 영화가 엔터테인먼트로 자리를 잡았다. 80년대에는 흥행과 예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그래도 그때는 흥행 보다는 영화의 주제를 잡는데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썼던 것 같다. 배창호 감독님, 이명세 감독님, 그리고 몇 분의 감독들은 70년대에 못했던 이야기들을 어떻게든 영화로 풀어보자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영화라는 것은 그 시대의 거울이다. 너무 직접적이고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남부군>(정지영)처럼 빨치산이 주인공인 영화는 당시에도 만들기 매우 힘들었다. 그래도 정지영 감독은 회사를 하나 만든 다음 <남부군> 한 편 찍고 바로 회사를 없애는 식으로 어떻게든 영화를 만들었다. 거시적인 기류 때문에 못 하는 이야기들을 어떻게든 제작자들을 꼬셔서(웃음), 영화화하겠다는 의지가 굉장히 강한 시기였다.

배창호 80년대에서 90년대 중반까지는 결국 감독 중심의 영화계였다는 생각이 든다. 감독이라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지금은 그런 말이 잘 안 나오지만 ‘감독은 작가의식을 가져야 돼’라는 둥, ‘작가의식’이라는 말이 대포집에서든 어디서든 손쉽게 나오던 때다. 그 다음에 기업이 들어오고 영화가 큰 사업의 프로젝트가 되면서 어쩔 수 없이 감독의 힘보다는 프로듀서와 제작사의 힘이 세질 수 밖에 없어졌다. 이 새로운 시스템은 영화의 질을 월등히 높이는 데 기여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감독의 창작열, 작가의식, 인생에 대한 고찰을 제도권 내에서 펼치기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김성욱 <꼬방동네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보편성을 가지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디지털로 복원이 됐기 때문에 작품 자체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또 오리라 생각한다. 두 분의 앞으로의 영화 작업에 대해 관객 분들의 많은 성원과 기대를 부탁한다.


정리ㅣ 이상현 자원활동가

사진ㅣ 장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