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파웰 & 에머릭 프레스버거 특별전]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가능한가 - <분홍신>



<분홍신>(1948)은 약 17분간의 동명 발레 상연 시퀀스로 이름 높다. 그런데 이 발레극이 실제 무대에서 상연되는 것이라 가정할 때 의아한 부분이 생긴다. 비키가 구두공에게 분홍신을 건네받는 장면은 분홍신이 비키의 발에 저절로 감겨진 것처럼 표현되는데, 이렇게 느껴진 이유는 영화적 기법인 점프컷을 통해 신발 착용 전후가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즉, 발레 시퀀스는 무대극으로서의 발레가 아니라 ‘영화화된 발레’를 보여준다. 날이 어둑해져 집으로 돌아가려던 비키가 분홍신의 마력에 사로잡히는 장면은 더 이상하다. 마력은 사람의 형상을 한 검은 그림자로 표현되는데, 번뜩이는 조명에 의해 드러난 그것의 실체는 발레극의 내적 맥락과는 무관한 발레단의 감독 보리스와 작곡가 겸 지휘자 줄리앙이다. 발레 시퀀스가 오직 이들 간의 묘한 알력 관계를 알고 있는 영화 관객을 위해 마련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극장을 찾은 관람객의 존재는 처음부터 은밀히 배제된다. 박수소리로 드러날 뿐, 관람객 군상을 비추는 장면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카메라가 무대 위에 선 비키와 객석을 동시에 비추는 장면에서조차 객석은 어둠에 잠겨 있고 지휘 중인 줄리앙과 관람 중인 보리스만이 조명을 받아 두드러진다. 이는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객석이 중심이 되던 것과 대조된다. 돌이켜보면 오프닝 시퀀스 역시 순수하게 객석을 스케치했다기보다는 주인공이 될 비키와 줄리앙, 보리스를 관객에게 미리 소개하는 시퀀스에 가까웠다. 순수하게 관람객만을 조명한 숏은 없었던 셈이다.

관람객이 배제된 무대극의 존재는 누구를 위해 춤을 추는가 하는, 예술의 목적에 관한 질문으로 연결된다. 그 대답은 외부의 관객이 아닌 행위자를 위한 예술, 나아가 예술을 위한 예술, 춤을 위한 춤처럼 자기 지시적 내재성으로 향한다. 원작에서 분홍신이 춤의 욕망을 오롯이 담은 장치였다면, 영화에서는 카메라가 춤을 위한 무대를 확장하는 자동기계처럼 표현된다. 카메라를 통해 영화는 무대 바깥의 이야기와 실제 공연을 구분 불가능하게 연결한다. 이를 테면 수석 무용수 이리나의 결혼 발표가 연습 도중 마치 대사처럼 읊어진다든가, 보리스가 연습 중이던 발레단장 크리샤에게 공연 취소를 전달하면서 이뤄진 대화 장면에서 크리샤를 비추던 핀 조명이 마치 공연에서처럼 크리샤를 따라 움직인다. 그러니까 영화가 막이 오른 순간, 발레극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무대가 삶을 반영하는 동시에, 삶의 공간은 곧 무대가 된다.

이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 클로징 시퀀스에서 펼쳐진다. 영화는 매번 공연이 시작하기 직전 포스터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을 알린다. 마지막 시퀀스 역시 발레 『분홍신』의 포스터를 비추면서 시작된다. 이어 대기실 위에 적힌 비키의 이름을 비춰주는 숏은 이번 공연의 유일한 출연자를 소개하는 것이기도 하다. 카메라가 대기실에 들어선 순간, 오직 비키에 의한 비키만의 공연이 시작된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린 채 발코니에서 추락해 피투성이가 된 비키의 마지막 모습은 그녀가 연기했던 발레극 『분홍신』 속 주인공의 최후와 정확히 일치한다. 또한 오직 춤을 위한 삶을 꿈꾼 비키의 욕망과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허영에 대한 단죄로 풀이됐던 『분홍신』의 이야기가 예술을 위한 삶의 섬뜩함과 숭고함으로 뒤바뀌는 순간이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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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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