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영화 특별전: 세상과 불화하는 인물들]


잃어버린 느린 걸음의 시간

- <린 온 피트>



“뛰지 말고 걸어라.” 조련사 델(스티브 부세미)이 경마장에서 일하게 된 찰리(찰리 플러머)에게 무심하게 건네는 조언 중 하나다. 델은 설명하기 싫어하는 성격인 데다 특별히 중요한 장면도 아니기 때문에 왜 경마장에서 뛰지 않고 걸어야 하는지 이렇다 할 이유가 덧붙여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사소한 대사가 이상하리만치 기억에 남는다. 앤드류 헤이의 <린 온 피트>(2017)는 뛰는 것보다는 걷기를 요청하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리듬에 속하기를 원하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찰리가 거리를 달리는 모습이다. 그런데도 <린 온 피트>가 걸음에 관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건 찰리와 린 온 피트가 공유하는 인상적인 속도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린 온 피트와 찰리가 웅대한 교감이나 우정을 나누는 순간이 묘사되는 것은 아니다. 앤드류 헤이는 우정이 형성되는 과정에 상투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대신 린 온 피트와 찰리는 느릿한 리듬으로 함께 걷는다. 처음으로 경마 경기를 본 찰리는 경주마의 속도에 매혹되지만, 델이 요구하는 건 말을 데리고 좀 걸으라는 것뿐이다. 그건 델이 알려주는 어떤 지식과 규범보다 중요한 가르침이었는지도 모른다. 방 안에서조차 외부의 소리에 노출되면서 쫓겨나듯 바깥으로 달려야만 했던 찰리는 역설적으로 린 온 피트와 함께 걷는 장면들에서 잃어버린 일상의 몸짓을 되찾는다. 반대로 여전히 달리게 되는 순간도 있다. 아버지가 죽었음을 뒤늦게 확인한 뒤에, 우발적으로 노숙자를 공격하고 나서, 그리고 린 온 피트가 죽는 순간에 찰리는 저 너머로 달린다. 그때마다 달리기의 경로는 고통스러운 삶의 흔적으로 프레임에 남는다. 달리고 난 뒤에는 이전과 같은 리듬은 없을 것이다. 달리기 전의 자리로 돌아갈 수도 없을 것이다. 자유로우면서도 반복적인, 차분하면서도 유려한 운율을 형성하는 소년과 말의 걸음이 유독 애틋하게 기억되는 이유이다.


그중에서도 트럭이 고장 나고 찰리와 린 온 피트가 사막을 횡단하게 되는 여정은 특히 감동적이다. 이 여정을 개연성의 논리로 따지는 건 무의미할 것 같다. 소년과 말이 사막을 건너왔다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설정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사막을 건너는 몽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걸음을 내딛으면서 찰리가 걷는다는 몸의 방식을 활성화한다는 사실이 매혹적이다. 인간과 동물의 몸짓이 사막의 풍경과 함께 응축되어 있는 곳에서 찰리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상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몸짓이 통제를 잃고 찰리가 린 온 피트의 속도를 제어하지 못할 때 여정은 끝난다. 이 시퀀스를 두고 인간과 동물의 관계로 다시 쓴 구스 반 산트의 <제리>(2002)라고 말하는 건 과장스럽지만 타당한 수사적 표현일 것이다.



언제까지 걷기만 할 수는 없다는 걸까. 아니면 필연적인 삶의 변화가 그렇듯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시점이 찾아온 걸까. 영화의 마지막에서 찰리는 다시 도로를 뛰어다닌다. 앞서 말한 것처럼 소년은 예전과 같은 걸음의 속도를 되찾을 순 없을 것이다. 그건 임시적이고 영속화할 수 없는 종류의 경험이다. 그러나 찰리는 걸음과 동행의 경험을, 그 경험의 속도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움직임을 서서히 멈추고 뒤를 돌아보는 찰리의 마지막 몸짓에는 낭만적인 회고의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복잡한 심상이 깃들어 있다. 지금의 속도와 리듬이 아니었다면 찰리가 멈춰선 자리도 달라졌을 것이다. 영화를 본다는 일이 일상에서 벗어난다는 걸 뜻한다면 우리가 영화에서 발견해야 할 것은 일상의 리듬으로는 포획되지 않는, 다른 리듬으로 움직이는 몸짓들이다. 유령의 리듬, 동물의 리듬, 자연의 리듬을 형상화하는 영화는 나아가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었지만 발현되지 않은 리듬을 되돌려주기도 한다. <린 온 피트>는 그런 리듬의 변모를 통해 한 소년의 몸짓에 새겨진 궤적을 관측하는 작업이다.  



김병규 영화평론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