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 가즈오 특별전: 물러서지 않는 카메라]



진술을 기다리는 산파의 시간

<천황군대는 진군한다>




<천황군대는 진군한다>에서 오쿠자키 겐조가 취하는 폭력이라는 수단과 이에 관한 카메라의 방조는 종종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누군가는 ‘폭력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할 것이고, 다른 이들은 ‘정당한 목적을 위해 폭력이라는 수단이 때로는 필요하다’는 입장에 설 것이다. 이는 지극히 단순화한 입장일 뿐, 둘 사이에 수많은 결이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오쿠자키 겐조의 행위를 폭력으로 함축해 그것의 당위성을 따지지는 않을 생각이다. 먼저 그것은 나의 능력치를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단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를 폭력으로 정의해야 할지부터 아득하다. ‘폭력의 단계를 나눌 수 있다면 어느 정도까지 용인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거쳐 ‘이 세상에 폭력이 아닌 것이 있을까’라는 자조 섞인 체념에 이르게 될 공산이 크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보고 주인공의 폭력 행위를 비난하는 건 영화의 폭력에 가담한 채 실컷 즐겨놓고는 슬그머니 발을 빼는 것처럼 개운치 않다. 어떤 것을 폭력이라고 칭하는 이상 판단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면 오쿠자키의 행위에 관해 잠깐 다른 이름을 붙여봐도 괜찮을 것이다. 이를테면 폭력이 되기 이전의 행위나 상태를 지칭하는 ‘에너지’와 같은 단어로 말이다. 그래야 우리가 영화에 매혹되었던 이유를 투명하게 마주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주된 에너지는 오쿠자키 겐조의 퍼스널리티에서 나온다. 천황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그는, 자신의 분노를 약자에게 푸는 속인들의 세상에서 누구보다 용감한 사람처럼 보인다. 영화 속에서 그가 못 견디는 포인트가 몇 군데 보인다. 사람에게 예의 없게 행동하는 것이나, 돈벌이를 강조하거나, 천황을 섬긴다는 발언을 할 때 그는 분을 삭이지 못한다. 참전 중 동료들의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 그는 국가의 체제에 저항하는 운동을 지속해왔다. 천황에게 파친코 구슬을 투척하거나 포르노 전단을 만들어 유포하고 부동산 업자를 폭행해 죽음에 이르게 한 대가로 여러 번 투옥된다. 그의 전적은 전쟁 당시 일본군 내에서 일어난 식인 사건을 파헤치는 영화의 여정이 얼마든지 위험하게 돌변할 수 있음을 인지하게 한다. 실제로 오쿠자키의 험악한 시도로 인해 여정은 끝이 난다. 그런데 오쿠자키의 개성을 논하는 데 있어 상대적으로 간과되어 온 부분이 있다. 이는 오쿠자키가 과격한 행위를 하는 목적의 핵심과 관련된다. 그는 진상규명을 촉구하기 위해 행동하는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는 법적인 처벌이나 보상을 염두에 둔 거라 오해될 소지가 있다. 물론 그가 법적 처벌 너머 신적 처벌을 대리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오쿠자키가 처벌로서의 폭력을 행사하는 건 누군가 자신의 행위를 부정하려 할 때다. 궁극적으로 그는 사람들이 과거의 행위를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게 하려 한다. 그리고 이것이 이 영화가 의도하고 지정한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오쿠자키가 원하는 것은 사람들의 진술, 말이다. 그는 법적인 시비가 아니라 사적이고 내밀한 고백을 원한다. 카메라에 기록되는 한 그것은 결코 사적인 발화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야마다 기치타로 전 중사의 집을 찾아간 장면은 말에 관한 오쿠자키의 집착이 뚜렷이 드러나는 명장면이다. 과거의 기억을 헤집는 오쿠자키에게 야마다는 “그만해”라고 소리친다. 야마다는 자신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추모를 한다고 말하며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언급한다. 순간적으로 분노를 참지 못한 오쿠자키는 야마다에게 달려들어 그에게 상처를 낸다. 일촉즉발의 상황이 겨우 정리되고 오쿠자키는 다시 침착하게 설득을 이어간다. 자신이 경험하고 겪은 일을 숨김없이 후대에 전하는 것이 혼령을 위로하는 유일한 방식이며, 끔찍한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더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여하는 것이 아직까지 살아 있는 유일한 이유라는 것이다. 오쿠자키가 야마다의 집에 찾아가는 에피소드는 약 23분에 달한다. 편집을 거의 하지 않은, 실시간적 체험에 가까운 이 장면을 보면서 문득 오쿠자키의 말이 산파 행위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야마다에게 장광설을 늘어놓는 오쿠자키는 누군가의 기억을 자극하며 그것이 말로 터져 나오기를 말로써 끈질기게 유도하는 기억의 산파 같다. 그만큼 절실하게 말의 탄생을 원한다.


활자, 구술과 오쿠자키 간의 친연성은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이미 강조되었다. 그의 전파사 건물 셔터에는 ‘전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를 처단하자’를 비롯해 누군가를 선동하는 글자로 빼곡하다. 작은 밴은 이동수단이기보다는 홍보용 특수차다. 글자로도 부족해 오쿠자키는 확성기를 통해 말을 뱉어낸다. SNS가 지금처럼 활발한 시기였다면 그는 논쟁적인 발언을 쉼 없이 쏟아내는 인터넷 논객이 되었을 것이다. 마이크를 잡은 채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오쿠자키의 모습에서 그가 말과 글을 애용하는 선동가임이 드러난다. 그에게 말과 글은 곧 행동이요, 행동은 곧 말과 글이다. 오쿠자키가 글씨로 뒤덮인 밴을 타고 확성기를 사용해 1인 방송을 시작하자 경찰들이 나타나 그를 제지한다. 이때 그의 말은 곧 행위다. 영화 말미, 오쿠자키는 상관 무라모토 마사오를 죽이려고 하다 무라모토의 아들에게 중상을 입히고 도주해 지명수배자가 된다. 오쿠자키의 사진과 범행이 기록된 신문의 헤드라인이 리드미컬한 편집으로 드러날 때 그의 행위는 곧 글이 된다. 말이 행위가 되고, 행위가 다시 글이 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하라 가즈오는 오쿠자키의 행위를 말과 글에 적극적으로 연결한다. 소극적이라고 인식된 감독의 위치를 다시 생각해보고 싶은 이유다. 오쿠자키의 열정이 종종 유족의 간절함을 초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라 가즈오의 영화가 오쿠자키의 존재감에 잡아먹히는 것처럼 보이곤 한다. 오쿠자키는 단지 영화의 대상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연출한다. 하라 가즈오의 역할은 카메라맨 정도로 보일 뿐이다. 오쿠자키는 때때로 카메라를 향해 ‘컷’을 외친다. 자신을 적대하며 자리를 피하려 하는 세오 유키오를 폭행하다 제지당한 뒤 반대로 폭행을 당할 때, 오쿠자키는 자신이 맞는 것을 찍지 말고 카메라를 끄라고 지시한다. 야마다를 폭행하다가 제지당할 때는 동요하지 말고 촬영할 것을 요구한다. 오쿠자키의 말에 따라 상황은 종료되거나 지속된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명백하게 하라 가즈오의 영화다. 감독에게 주인공을 통제하거나 넘어서려는 생각일랑 애초에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인물로부터 거리를 두고 지켜보거나 관망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도 아니다. 자막과 편집, 특히 사운드 편집을 통해서 하라 가즈오는 오쿠자키의 여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동조한다. 인물의 요구에 성실히 응하고, 그와의 동행을 거두지 않는 것, 그것은 하나의 적극적인 표현이다. 하라 가즈오의 카메라는 오쿠자키가 유족들을 대동하고 관련자들을 찾아내 그들에게 진술을 강요할 수 있게 한다. 하라 가즈오가 동행을 거절하자, 그것은 다큐멘터리 영화이기를 그치고 사건이 된다. 오쿠자키가 무라모토를 죽이러 가겠다며 하라 가즈오에게 동행을 요청했던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무섭다’고 말하는 하라 가즈오에게 오쿠자키는 불같이 화를 냈다고 전한다. 하라 가즈오가 오쿠자키와 동행하지 않고 이를 무라모토에게 알린 것은 윤리적인 선택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만드는 다큐멘터리의 성립 조건을 생각할 때도 타당하다. 오쿠자키의 시도는 ‘말’을 요구하기 위한 연출이라는 영화의 암묵적 규칙을 깨고,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사건으로서의 행위를 카메라에 담고자 한 것이기 때문이다.



적극적으로 카메라를 내어준 하라 가즈오의 행위는 오쿠자키라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틀을 생성한 것과 같다. 돈키호테에게 산초가 필요하듯, 하라 가즈오의 카메라가 없었다면 오쿠자키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망상증 환자나 과격한 이상주의자, 혹은 너무도 외로운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라 가즈오는 오쿠자키에게 힘을 실어주는 적극적인 동조자였다. 대역을 내세워서라도 필요했던 유족처럼 말이다. ‘결과가 좋으면 목적이 정당화된다’는 오쿠자키의 말에 동의를 한다고 해도, 나쁜 결과를 초래한 오쿠자키의 행위는 정당화될 수는 없겠다. 다만 한편으로는 오쿠자키의 극단적인 폭력 행위가 진실을 구하는 행위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돌아보게 한다는 것 역시 마땅히 강조되어야 한다. 누군가가 말하게 만드는 것의 어려움은 카메라를 든 자들의 공통된 고민과 맞닿는 것이기도 하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