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영화를 만든다는 것: 광화문시네마의 경우]


 

세상에 저항하기, 또는 나만의 세계에 갇히기

- <소공녀>


 

담배 한 모금과 한 잔의 위스키를 위해서라면 집(정확히는 방)은 포기하겠다. 대개의 경우라면 이 문장을 두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겠지만 <소공녀>의 미소(이솜)의 셈법은 완전히 다르다. 그녀는 집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담배와 위스키를 사랑한다. 자신의 취향이 뭔지를 확실히 아는 미소는 가난한 현실을 이유로 들어가며 그 취향을 포기하거나 타협하고 싶지 않다. 오르는 방세를 감당하느니 오른 담뱃값을 감당하는 쪽을 택한다. 최소한의 짐을 챙겨 거리로 나선 그녀는 이 상황을 “갈 데가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이라고 설명한다. 자기변명이나 합리화가 아니다. 미소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또 그 생각대로 살아간다.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로 여행자가 된 미소는 한때 그녀와 밴드를 함께했던 옛 동료들의 집을 하나씩 방문한다. 멤버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가정과 집에 발목 잡혀 살고 있기에 여행자 미소의 방문이 마냥 편치 않다. 세상 앞에서 원하든 원치 않든 변해버린 자신들과는 달리 세파 속에서도 변치 않고 ‘고상한’ 취향이나 지키고 사는 미소가 달가울 수 없다. 혹자는 미소가 세상을 너무 낭만적으로 사는 게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미소라면 ‘낭만이 어때서’라고 답할 것이다.


거칠지만 미소는 2018년 한국영화에 등장한 여성 낭만주의자의 변형된 한 유형이라고 말해보고 싶다. 최근 몇 년간, 특히나 한국 독립영화 속 풍경에는 20, 30대 심지어 10대 여성들이 처한 가난, 집의 부재 상태, 거리를 떠돎,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는 위협과 폭력 등의 문제가 도드라졌다. 이 경우 가난과 폭력이 영화의 전면에 서며 그로 인해 주인공의 삶은 더없이 누추해지거나, 타인과 타협하거나, 아예 다른 방식으로 공동체를 꾸리게 된다. 미소 역시도 가난하고 집(가정)이 없으며 여기저기를 떠돌며 여성이라는 이유로 폭력적인 시선과 대우를 받는다는 점에서 앞선 풍경의 연장선상에 있다. 하지만 미소는 가난과 폭력을 대신해 ‘취향의 사수’를 전면에 세운다. 이때의 취향은 기호를 넘어서는 자기 고집이자 사고방식이며 삶의 태도와 같은 말일 것이다. 자기 자신과 세상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데서 이 취향에는 일종의 반항의 냄새가 난다. 이 반항은 낭만주의자의 그것과 유사해 보인다. 낭만주의의 뿌리를 고찰한 이사야 벌린과 그가 관심을 둔 사학자들의 말을 빌려보자면 낭만주의는 ‘어떤 종류의 보편성에도 강력히 저항하는 것’이자 ‘구속받지 않는 강력한 의지와 개인 신념과 이상의 강조’라고 거칠게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앞서 미소를 낭만주의의 변형적 인물이라고 말했다. 미소가 낭만을 고수하는 방식, 즉 전적으로 저항하기보다는 되레 자신을 희생하는 식으로 보편성에 제동을 거는 것 같기 때문이다. 밴드 멤버들의 집에 갔을 때 미소는 청소 도우미라는 직업인으로서의 자신의 특기를 십분 발휘해 멤버의 가사를 돌봐준다. 이는 애정하는 상대에게 미소가 마음을 쓰는 방식일 테지만 그녀의 이런 너그러움을 보는 게 마냥 편치만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자신의 의사는 무시한 채 자신을 결혼 상대로 바라본 멤버의 집에서 나올 때, 애인 한솔(안재홍)이 자신에게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내세우는 말을 할 때 미소는 강력한 저항 대신 일정 부분 자기 감내를 택한다. 그것은 품위를 잃지 않는 미소만의 방식이었을까, 그것이 그녀에게 더 나은 선택이었을까. 고민이 된다. 낭만을 고수하며 동시에 선하기까지 한 인간, 낭만을 고수하기 위해 선함을 체득한 인간. 뭐가 됐든 미소의 저항과 선함 사이의 관계는 좀 더 면밀히 살펴봐야 할 부분 같다. 좋았던 과거를 잊지 않고 옛 동료들을 먼저 찾아간 건 미소였지만 그 후 멤버들이 다시 모인 자리에 유일하게 없는 이는 미소뿐이다. 그리고 미소는 전에 살던 방보다 더 협소하고 유동적인 곳에 임시로 기거한다. 애인도, 친구도, 심지어 방세를 받으러 오던 주인조차도 없는 완벽한 혼자다. 미소의 여행은 얼마간 계속될 수 있겠지만 그녀의 낭만 고수법은 이대로도 괜찮은 걸까. 미소의 세계가 조금 더 자신만의 세계 안쪽으로 좁혀졌다는 신호는 아닐까. 이 징후는 괜찮은 것일까.


정지혜 영화평론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