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토마스 앤더슨 35mm 필름 투어]


말씀의 탄생

- <데어 윌 비 블러드>

 

1898년에 시작한 영화는 1927년 대공황의 시기에서 멈춘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라는 시대 배경은 역사적 맥락 외에 영화사적 맥락을 환기하는 측면이 있다. 말소리가 소거된 채 숨소리와 비명, 과잉된 음향으로 채워진 약 15분간의 도입부를 통해 영화는 무성영화를 인용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초기 영화의 반향으로 영화를 읽을 때 두드러진 이미지가 있다. 시축 기계가 땅에 꽂히자 땅에서 석유가 흘러나오는 모양을 클로즈업한 숏은 어쩐지 몸속에서 피가 불거져 나오는 양상을 연상시킨다. 비유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검은 석유는 곧 흑백 영화의 검은 피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석유를 추출하는 것만큼이나 기계가 사람의 몸에 꽂히는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그곳에서 땅과 신체는 공동의 운명을 짊어진다.

땅과 신체 속을 흐르는 석유와 피는 그 자체로 서사의 흐름을 창출하는 두 요소다. 대니얼(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피붙이는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지만 대니얼은 늘 혈연과 가족에 붙들린다. 이를 강제하는 건 석유에 관한 대니얼의 욕망이다. 그런데 혈연관계는 안정적인 기반이기보다는 늘 불안정함을 수반한다. 불안정은 혈연관계 대체자의 희생으로 드러난다. 대니얼이 공동체를 중시하는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필요했던 어린 아들은 시축 중 발생한 가스 폭발 사고로 청력을 상실한다. 아들의 빈자리를 대체했던 동생 헨리는 거짓말이 발각되며 대니얼의 손에 죽는다. H.W.는 다시 아들의 자리로 돌아오나 관계는 끝내 파탄난다. 결국 욕망이 혈연을 요구하는 것은 와해와 파괴를 위해서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일련의 과정은 대니얼의 선택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가까우며, 교회는 운명에 순응하도록 마을 사람들을 통제한다. 일라이가 집전하는 교회는 석유의 통제 불가능한 힘에 맞서 사람들을 안정시키는 기능을 한다. 대니얼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으나 그의 신은 교회에 있지 않다. 영화에서 첫 번째 등장하는 말인 대니얼의 대중에 대한 연설은 일라이의 교리 행위와 대구를 이룬다. 즉 그가 전도하는 신은 석유다. 영화는 대니얼의 말을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외화면에서 먼저 등장시키면서 그가 전지전능한 말씀의 담지자임을 은밀히 보여준다. 대니얼이 일라이의 축원 제안을 거절한 이유는 일라이의 행위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말로 사람들을 홀리는 것임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거짓이 거짓을 알아보듯, 그는 일라이의 교리 행위를 꿰뚫어 보고 그것을 ‘쇼’라고 비꼰다.

영화의 결말부, 늙은 집사와 함께 홀로 남은 대니얼을 찾아온 일라이는 사뭇 가족을 강조한다. H.W.가 일라이의 어린 동생과 혼인하면서 둘은 인척관계로 얽힌 것이다. 돈을 구걸하는 일라이에게 대니얼은 종교와 교리 부정을 요구하며 자신의 승리를 확정 짓고자 한다. 대니얼에 의한 일라이의 살해로 귀결되는 마지막 장면의 목적은 일라이에 대한 대니얼의 승리, 혹은 종교에 대한 자본의 승리가 아니다. 석유를 모두 갈취당한 메마른 땅처럼, 인간의 육체 역시 피와 땀을 송두리째 잡아 뽑힌 채 소진되었음을 이미지로 확증할 뿐이다. 영화에서 유정탑은 하나의 상징물처럼 교회 맞은편에서 활활 타는 스펙터클로 제시된다. 이 괴상한 신전은 새 시대를 예감하듯 보존과 유지가 아닌 파괴와 무너짐으로 자신을 증명한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