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에이젠슈테인에게 영화연출을 배웠고, 50년대 매카시 열풍 하에서 프리츠 랑의 <M>을 리메이크해 매카시즘을 비난했으며, 그로 인해 조국을 떠나야했던 인물. 미국 국적을 갖고 유럽영화사에서 독보적인 위상과 입지를 확보한 몇 안 되는 감독이었으나, 자신을 버린 조국으로 돌아가 마음껏 영화를 찍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지 못한 채, 나카타 히데오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 <조셉 로지: 네 개의 이름을 가진 사나이>의 주인공으로 남겨진, <하인>과 <무슈 클라인>을 비롯해 바로 이 영화! <트로츠키 암살>을 연출한 감독 조셉 로지이다.

 

조셉 로지의 1972년 작 <트로츠키 암살(The Assassination Of Trotsky)>은 20세기 공산주의 혁명사의 전설적 인물인 레온 트로츠키의 생애 마지막 시간을 그리고 있다. 1940년 멕시코의 노동절 시가행진 장면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트로츠키가 등산용 피켈에 의해 쓰러진 그해 8월 20일까지의 이야기를 시간의 흐름으로 보여준다.


 


실존인물을 그린 대게의 영화들이 정밀한 사실묘사와 극적인 서사를 적절하게 교합시켜 영화적 재미를 더했다면, 조셉 로지는 이런 것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한 시대를 풍미한 거인이 맞이할 최후의 시간을 담고 있음에도 스펙터클과는 거리를 두는 등, 인위적 비장미를 고조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작해야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소의 비참한 최후를 보여주는 투우장 시퀀스 정도가, 영화 전체를 관류하는 비극적 파토스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을 따름이다.

 

조셉 로지의 영화적 특징은 <트로츠키 암살>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즉 강렬한 사건을 통해 당면한 시대적 과제를 생각하도록 단초와 영감을 제시한다는 것인데, 이 영화의 경우 어차피 결론지어진 암살사건의 배후를 드러내거나 인과관계를 추적하기보다는, 볼셰비키 혁명 영웅이 이토록 허술한 경비와 보안 속에서 한낱 등산장비에 의해 쓰러져갔다는 사실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감독의 의도는 앞서 스탈린이 보낸 비밀요원의 기관총 습격 장면에서도 쉽게 드러나는데, 말하자면 여러 명이 가담한 이 습격 씬이 준비부터 실행까지를 꽤나 세밀하게 오랜 시간 보여준 데 반해, 정작 트로츠키의 최후는 무심한 듯 허무하게 진행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감독은 멕시코 외곽에 한적한 주택에서 평화롭고 행복하게 은둔중인 트로츠키(리처드 버튼)와 그의 암살을 맡아 고민과 갈등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프랭크 잭슨(알랭 들롱)을 대비시킴으로써 트로츠키 죽음의 리얼리티를 극대화한다. 이는 조셉 로지의 빼어난 연출력에 공을 돌려야 마땅한 일이지만 숨은 각본가(질로 폰테코르보의 <알제리 전투>와 코스타 가브라스의 <계엄령>의 시나리오를 담당했던) 프랑코 솔리나스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한 때 마르크시즘에 심취했던 과격한 유물론자답게, 조셉 로지는 트로츠키에 대한 자신의 시각과 추억과 안타까움을 영화 곳곳에 심어놓고 있다. 트로츠키를 멕시코로 초청해 머물 수 있도록 주선한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를 여러 차례 보여준다든지, 특히 기자와의 대담 장면에서 소신을 피력하며 서성이는 트로츠키의 후경 즉, 트로츠키를 중심으로 잡는 것처럼 보이는 카메라가 사실은 느릿하게 패닝하면서 경비대원과 벽을 칠하는 노동자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은 무척 흥미롭고 인상적이다. 전반적으로 평화롭고 안온한 분위기로 유지되는 영화의 마지막 5분은, 시대의 거물이 쓰러져가는 과정의 허무함과 확신 없이 저지른 살인에 대해 괴로워하는 암살자의 단말마가 뒤엉키면서 형언하기 힘든 여운을 남겨놓는다.

 

 

트로츠키는 사회주의 역사에서 영원히 미 복권된 인물이다. 러시아 혁명의 주역이자 스탈린 반동에 대한 자유주의적 비판자였지만, 스탈린 정권에서 ‘인민의 적’으로 추방당했고 자본주의국가로부터는 위험한 혁명수출업자로 낙인 찍혀 떠돈 유랑의 혁명가였다. 어떤 면에서 트로츠키와 조셉 로지는 상당부분 유사점이 있다(로지는 영국을 비롯해, 유럽각지를 돌며 영화 작업을 시작했으나 해외 배급 상의 문제를 고려해 한동안 여러 개의 가명ㅡAndrea Forzano, Victor Hanbury, Joseph Waltonㅡ을 사용해야만 했다). 그러하기에 조셉 로지는 트로츠키의 말년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트로츠키 암살>은 한 순간에 느낌이 오는 영화는 아니다. 비장미를 고조시키거나 극적 스펙터클로 한 인물을 신화화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다시 말하건대, 이 영화는 감각적으로 다가와 순식간에 파문을 일으키는 방식이 아닌, 여운과 파장을 오래 남기는 지각적인 영화이다. 카메라가 트로츠키라는 거인의 행적을 쫓기보다는 그와 그를 둘러싼 세상, 그가 속해있는 풍경을 관조하듯 훑어내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따뜻한 듯 나른하게 펼쳐지는 멕시코의 전원주택 풍경은 볼셰비키 혁명의 풍운아가 아닌 한 인간의 행복한 한 때를 보여주기에 더 없이 좋았지만, 무엇보다 정치적 야욕과 야만적 행위가 이러한 행복을 얼마나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어느 심약한 테러리스트를 통해 알려줌으로써, 비장미대신 무거운 숙제를 안겨주는 방법을 택한 조셉 로지의 연출은 적절하고 탁월했다. 우리는 살만한 세상을, 시대의 무수한 거인들을 얼마나 허무하게 잃었던가. 영화의 마지막 클로즈업 되는 인물은, 이 물음에 대한 간명한 대답이다.

(백건영_네오이마주 편집장, 영화평론가)
 

 ▶▶ 상영일정
1월 24일 (일) 13:00
1월 29일 (금) 19:00 상영후 시네토크_오승욱 감독
2월 4일 (목) 13:00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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