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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시네바캉스 서울

[특집]카타스트로프: 아메리카의 비극 - 브라이언 드 팔마, 마이클 만 특별전

[특집] 카타스트로프: 아메리카의 비극


이번 “2014 시네바캉스 서울”에서는 두 명의 미국 작가의 특별전을 마련한다. 60년대 이래로 가장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방식으로 장르 영화를 만들어온 브라이언 드 팔마와 갱스터 영화의 가장 혁신적인 작가로 불리는 마이클 만이다. 이 둘은 모두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영혼을 여전히 계승하는 드문 작가이다. 이 두 작가의 대표작들을 소개한다.




너무 많이 보았던  작가, 브라이언 드 팔마

브라이언 드 팔마의 영화를 자극적인 불량식품 같은, 정상성의 궤도에서 벗어난 독특한 취향의 작품으로 취급하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닐 테지만 수정되어야 할 전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가령 60년대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정신에 기대어 말하자면, 조금은 삐뚤어진 방식처럼 보이긴 하지만 현재 드 팔마보다 더 직접적인 계승자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는 비뚤어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변모의 윤리를 지켜왔기에 희귀하게 생존한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작가로 남았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조지 루카스, 마틴 스콜세지, 스티븐 스필버그 같은 감독들이 지금 보여주는 작업들을 드 팔마의 근작인 <리댁티드>나 <팜므 파탈> 같은 영화와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드 팔마는 흥행에 성공한 몇 작품을 제외하자면(가령, <언터처블>, <미션 임파서블>) 상품으로 제대로 팔리거나 예술적 매버릭으로 이해되는 작가는 아니었다. 종종 그는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낭만적 영혼의 계승자로 찬미되었지만 쓸데없는 영화들에 재능을 낭비한 작가로 치부되기도 한다. 여성의 재현과 관련한 오래된 논란도 여전히 풀어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이런 문제들을 단번에 수정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이번  기회에 그의 초기작을 주의 깊게 보았으면 한다. 이를테면 <하이 맘!>의 경우가 그렇다(아쉽게도 이번 상영작에서 누락되었지만 <디오니소스 69>와 <그리팅스>를 같은 계열에서 생각해야 한다).



드 팔마는 60년대 실험적이고 정치적인 영화의 급진적 경향에서 빠져나오면서 70년대에 다른 뉴 시네마의 작가들과 다른 노선을 밟아나갔다. 선택의 두 교차로가 있었다. 그 하나는 상업적 시스템의 영화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른 경로는 언더그라운드 세계로 향하는 것이다. 드 팔마는 스콜세지와 코폴라처럼 장르영화 제작을 실용적 수단으로 채택했지만, 이를 개작하고 실험하는 전복의 장기 전략으로 활용했다. 여기에 B영화와 히치콕의 서브코드를 동력으로 장착한다. 코폴라와 스콜세지가 고전 할리우드 영화에 모던한 영화 스타일을 결합해 품격의 고급스러운 길로 향했다면, 드 팔마는 B급 호러, 포르노그래피 등의 한계적인 영화들을 섞어 더 낮은 길로 향한다. 이 길은 물론 더 많이, 더 다르게 보면서 하위의 역량을 이미지의 에너지로 끌어오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그는 너무 많이 보려 한 아메리칸 시네마의 작가다. <캐리>나 <퓨리>에서 소년과 소녀가 몬스터가 되는 것은 6-70년대에 너무 끔찍한 것들을(그 대부분은 전쟁과 폭력, 암살 등이다)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들은 비전의 희생자가 되었다. <드레스드 투 킬>에서의 살인과 광학적 장치들, <필사의 추적>에서의 시각적 도청, <스네이크 아이즈>나 <미션 임파서블>의 하이테크 비전들, 그리고 <팜므파탈>의 눈에 대한 공격까지. 그리고 최근작인 <리댁티드>에서의 멀티플 스크린까지, 드 팔마의 비전은 실로 다양하고 넓게 확장되었다. <리댁티드>가 다루는 이라크 전쟁의 참상은  복수의 스크린들이 서로 전투를 벌이는 양상이다. 이 영화에서 60년대 베트남에서 벌어졌던 일을 다시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시 되돌아가는 1960년대의 아메리카.  미국(영화)의 꿈과 실패에서 기원한 그 모든 것들이 여전히 그의 영화에서 잔존하는 것들이다. 그는 영화의 변혁이 실패로 끝난 이후를 살아간 꽤 끈질긴 작가다.  



거대한 고독, 마이클 만

어떤 특정한 영화에 대한 애호란 단지 그 영화나 작가에 대한 추종자가 되는 것만이 아닌 어떤 부류의 영화에 대한 전략적 옹호로 이어진다. 이를테면 누벨바그리언들이 사무엘 풀러를, 알프레드 히치콕을, 하워드 혹스를 옹호한 것은 단지 작품에 대한 애호를 넘어서 특정한 영화에 대한 작가정책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이클 만의 영화에 대한 애호는, 종종 ‘마이클 마니아’라 부르는 작가에 대한 광적인 추종만이 아닌 이런 부류의 영화가 여전히 옹호되어야 함을 드러내는 전략적인 선택이라 말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만의 팬들’이 선호하는 작품이 공통적인 것 같지는 않다. 대부분은 <히트>나 <콜래트럴>, 

<마이애미 바이스>를 좋아하는 듯하다. 초기작인 <도둑>의 팬들도 여럿 있는 듯하다. 그 가운데 <알리>나 <인사이더>와 같은 작품을 좋아하는 이는 언뜻 발견된다. 아마도 마이클 만 영화의 액션의 운동성이 <알리>나 <인사이더>에서는 두드러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마이클 만 영화의 흥미로움이 사실 이런 작품들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법이다. 모든 영화가 그러하듯, 마이클 만의 영화를 특징짓는 것은 그의 주제와 테마를 결정짓는 고유의 스타일에 있다. 만의 스타일은 표면상으로는 꽤 고전적인데, 그래서 형식이 과다하게 부각되지 않는 비가시의 스타일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그의 영화를 성립시키는 것은 또한 역설적으로 내러티브라기보다는 스타일에 있다. 스타일은 그가 편애한 사내들의 거대한 고독의 주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매혹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두 가지 측면만을 간략하게 언급하고 싶다. 먼저, 마이클 만의 고유한 시대적 조건들이 있다. 마이클 만은 1943년생으로, 마틴 스콜세지가 1942년생이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1946년생임을 감안하자면 그는 70년대에 두각을 보인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자장 안에 속한 세대다. 60년대 뜨거웠던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정신들이 70년대를 거치면서 끝장나거나 실패했을 때, 공식적으로는 80년대에 뒤늦게 그 영혼을 이어나간 작가가 마이클 만이라 할 수 있다. 둘째,  그는 세계를 그려낸 것이 아니라 세계를 만들어낸 작가다. 그만의 고유한 세계가 있다. 그는 큐브릭과 베르토프의 영향 하에 영화를 만들었다고 종종 고백한다. 말인즉, 사실적인 영화라기보다는 꿈 같은 세계, 인간의 액션을 초과하는 테크놀로지에 근거한 기계의 눈에 대한 관심들이 있다. 희망과 열정, 실패한 액션의 모든 주제와 테마는 역설적으로 인물을 둘러싼 비가시적인, 접촉 불가능한 고밀도 하이테크 이미지들에서 그 미적 근거를 갖는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세계 속에서도 만의 인물들은 다른 세계로 떠나려 한다. 마치, “나 자신도 모르게 관을 쌓아두는 창고 앞에 멈춰서고 장례 행렬 뒤를 번번이 뒤따를 때, 그런 때는 되도록 빨리 바다로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했던 인물들처럼.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