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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2014 베니스 인 서울

[특집 - 2014 베니스인 서울] 중국은 정말 가까운가, 벨로키오의 근심 섞인 질문 - <중국은 가깝다>

[특집 - 2014 베니스인 서울]

 

 

중국은 정말 가까운가, 벨로키오의 근심 섞인 질문

- 마르코 벨로키오의 <중국은 가깝다>



1968년에 세계를 뒤흔든 물결은 보통 프랑스 파리의바리케이트의 으로 기억된다. 68 혁명의 진정한 가치는 세계 곳곳에서 젊은이들이 일제히 반항의 몸짓으로 항거했다는 있다. 전통에 깊이 얽매인 국가였던 이탈리아는 어떤 점에서 프랑스보다 강렬하고 지속적으로 혁명의 영향을 받은 곳으로 평가받는다. 이탈리아의 사회 변혁 운동이 1970년대 내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1968 3, 로마의발레 길리아 건축대학에서 경찰과 학생의 충돌로 시작된 항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은 물론 중등학교로 퍼졌고, 해가 지나기 전에 사회 전체로 확대되었다. 1968년의 산증인 명인 타리크 알리는노동 착취와 정치적 혼란 속에서 이루어진 전후 이탈리아의 경제적 호황이 공장 투쟁과 노동자 계급 투쟁을 확산시켰다 평했다. 새로운 영화가 꿈틀거린 1960년대에 이탈리아 영화인들도 그러한 사회적 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했다. 루키노 비스콘티, 페데리코 펠리니,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여전히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이탈리아 감독이었으나, 분노한 젊은이들과 같은 노선에 감독의 대표적인 예로는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마르코 벨로키오를 있다. 시기의 영화 가운데 흔히 입에 오르내리는 작품은 베르톨루치의 <혁명 전야>(1964). , 이탈리아 바깥에 한해서다. 이탈리아 내부로 들어가면 사정은 달라진다. 영화학자 로랑스 스키파노는 『이탈리아 영화사』에서이탈리아 영화 1968년의 추상적인 분노를 충실하게 표현한 유일한 작품은 (벨로키오의 데뷔작인) <주머니 속의 주먹>(1965)이다라고 써놓았다. 이후 쉬지 않고 영화작업을 계속했던 벨로키오가 21세기에 발표한 일련의 작품으로 화려하게 복권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성공은 정의와 상관이 없는 문제인 것이다.


 

벨로키오는 데뷔작에 이어 <중국은 가깝다>(1967) <아버지의 이름으로>(1972)까지 비슷한 주제를 이야기했는데, 흥미로운 짝은 <주머니 속의 주먹> <중국은 가깝다>이다. 데뷔작이 학생 운동 시기의 전조가 되었다면, <중국은 가깝다> 학생운동의 구체적인 선언문에 해당한다. 도입부에서 카밀로가 친구들을 교육하고자 내뱉는 말들은 그들이 공격하려는 부르주아와 무력한 중산층에 대한 경고에 다름 아니다. 벨로키오는 안토니오니가 <중국>(1972) 만들기에 앞서 정치적 이상향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중국을 호명했다. 다만 <주머니 속의 주먹> 불러일으킨 찬반양론과 엄청난 논란의 압박감에서 비켜가려는 전략인지 모르겠으나, <중국은 가깝다> 사뭇 다른 톤으로 진행된다. 과격한 비극이자 공포영화인 전작에서 벗어나 벨로키오는 코미디이면서 일종의 정치적 풍자극인 영화를 내놓았다(이를 간파한 엔니오 모리코네는 <주머니 속의 주먹> 음습한 인트로와 전혀 딴판으로 비웃음의 기운이 넘치는 음악으로 <중국은 가깝다> 연다). 자신의 출신 배경과 분노를 <주머니 속의 주먹> 반영시켰던 벨로키오는 적절한 거리를 두고 대상과 유희를 벌인다. 교회가 제시하는 도덕률과 가족의 전통적인 가치를 조롱하면서도 데뷔작이 촉발시킨 지옥의 문을 다시 열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인물 또한 정신이 반쯤 나간 전작의 인물들과 다른 옷을 입는다. 여기에는 적어도 발광하는 괴물은 없다. 특히 풍자적인 내용들이 영화의 분위기를 상대적으로 가볍게 느껴지도록 만든다. 기독민주당, 공산당, 공화당을 거쳐 마침내 사회당 후보로 나선 비토리오을 지능적이고 익살맞게 괴롭히는 마오주의자 동생 카밀로의 행동들은, 학생 활동가들의 도전을 받았던 이탈리아 공산당의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다. 그리고 싸구려 상업영화에서나 나올 법한섹스 파트너의 교환 적극적으로 활용한 부분은 이탈리아 섹스 코미디들을 떠올리게 정도다. 그러나 이것을 경박한 것이라 말할 없는 것이, 멋들어진 엔딩에서 보듯 영화는 줄곧 선명한 이미지로 위선과 기만의 태도를 고발하는 것을 잊지 않기 때문이다. <주머니 속의 주먹> 비해 충격파는 덜할지 몰라도 표현 방식은 <중국은 가깝다> 훨씬 세련된 셈이다. 남녀 백작으로 불리는 오누이는 귀족의 삶을 절대 뺏기려 하지 않으며, 그들의 서클에 진입하고 싶은 가난한 연인도 욕망을 쉽사리 버릴 마음이 없다. 각자 다른 꿈을 꾸는 까닭에, 그들의 어정쩡한 연합은 모두의 행복이란 원래 불가능함을 강조할 따름이다.



파졸리니는시의 영화 베르톨루치의 영화와 비교해 벨로키오의 영화가산문체의 영화 대표한다고 말한 있다. 벨로키오 특유의 스타일을 생각하면 완전히 동의하기는 힘든 말이지만, 그의 영화 언어가 명료하고 알기 쉬우며 스타일보다 내용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벨로키오가 가장 관심을 두는 주제는 무엇일까? 가족과 종교다. 벨로키오는 이탈리아 사회가 품고 있는 온갖 문제의 근간이 가족과 종교 제도라고 생각하며, 근작에 이르기까지 그것의 혁명적 변화에 대해 천착해 왔다(그의 이름을 부활시킨 < 어머니의 미소>(2002), <굿모닝, 나잇>(2003), <웨딩 디렉터>(2006), <승리>(2009)어머니, 아버지, 결혼과 가족, 가족과 역사 관한 이야기다). 가족과 방문자라는 설정에서 <중국은 가깝다> 파졸리니의 <테오레마> 연결해 읽어볼 만하다. <테오레마> 부르주아 가족의 허상을 상징적인 방식으로 묘사할 , <중국은 가깝다> 교황과 왕래하는 귀족 집안의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까발리고 비판하는 쪽이다. 몰락 직전의 상황에서 내부로부터 붕괴되는 <주머니 속의 주먹> 부르주아 가족은, 썩어 있으면서도 엄청난 생명력을 지닌 <중국은 가깝다> 귀족 집안으로 대체된다. 전자의 부르주아 가족은 애초 홀어머니와 오누이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막내 알레산드로가 어머니와 장애인 형을 살해함으로써 오누이만 남는다. 어미와 형제를 죽이는 극단적인 방식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바깥의 시스템은 요지부동이다. 알레산드로는 패배한다. <중국은 가깝다> 오누이만 등장하는 우연이 아니다. 모호한 가장으로서의 장남 비토리오, 편협한 자유주의자인 누이 엘레나, 충동적이며 어수룩한 막내 카밀로의 구조는 반복된다. 아버지는 없으나 가부장제의 그림자는 엄연하고, 성적인 방만함은 가톨릭의 굳은 질서로 인해 억압당한다. 어제 그랬던 것처럼 내일도 그들은 부모가 지켰던 방식을 따라 살아갈 것이다. 그들은 혁명 근처에도 다가서지 못한다. 그들에게 중국은 가깝지 않았다. 그것이 벨로키오의 근심이다.

 

이용철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