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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시차 - 동시대 영화 특별전

[리뷰] 낭만적인 동시에 씁쓸한 소녀들의 환상 - <스프링 브레이커스>

낭만적인 동시에 씁쓸한 소녀들의 환상

- 하모니 코린의 <스프링 브레이커스>



적어도 한국의 관객들에게 <스프링 브레이커스>는 일련의 소녀영화들, <블링 링>, <폭스파이어>와 함께 읽혔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세 영화는 모두 ‘소녀들의 일탈’을 파격적으로 다룬 범죄영화/성장영화/청춘영화로 홍보되었고, 실제로 공개된 영화들도 그 거친 분류법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뭉뚱그리기식 분류법을 벗어나서 보면 세 영화의 초점이 다르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소피아 코폴라의 <블링 링>에 동시대 미디어 문화와 향유층에 대한 감독의 감상과 논평이 깃들어 있었다면, 로랑 캉테의 <폭스파이어>는 1950년대와 21세기의 간극 속에서 소녀들이 갖는 정치적 힘의 한계와 가능성을 가늠해 보려 했다. 그래서인지 두 영화가 어른의 머리로 만든 소녀에 관한 영화라는 인상을 풍겼던 게 사실이다. 반면, 하모니 코린의 <스프링 브레이커스>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스프링 브레이커스>의 오프닝 신은 웬만한 뮤직비디오보다 감각적이다. 태양, 누드, 형형색색의 비키니, 알코올과 바닷물, 그리고 끈끈한 느낌의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한데 뒤엉키며 곧장 관객을 봄방학 파티의 한가운데로 끌고 들어간다. 이때 카메라는 바로 저 ‘젊음’ 혹은 ‘청춘’을 내려다 보는 관찰자나 이방인이 아니다. 카메라는 저 안에서 함께 뒹군다. 벌거벗은 가슴에 눈을 파묻고, 벌거벗은 가슴과 함께 몸을 흔들어대고, 벌거벗은 가슴을 더 가까이서 만지려고 손을 뻗는다. 이 장면들만으로도 이 영화가 위에 언급한 다른 영화들에 비해 머리보다 몸을 더 많이 써서 만든 영화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점이 이 영화를 좀 더 솔직하고 적나라한 작품으로 느끼게 한다. 젊은 육체, 젊은 욕망과 함께 나뒹굴고 싶어 하는 영화는 ‘소녀’라는 타자에 대해 어떤 판단을 가하기보다 자신도 소녀처럼 무모해 보려 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보고 느낄 때 중요한 것은 잘 짜인 내러티브나 장르적인 관습 같은 것들이 아니다. 차라리 사진집을 열람하는 듯한 관람의 태도가 더 유용하다. 영화 스스로 그러한 방식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녀들은 특정한 에너지와 정서를 가진 공간이나 풍경 속에서 주어진 연기적 행위를 하되 그 행위에 충실하기보다 어떤 느낌에 도취되어 움직여 가는 듯하고, 카메라는 그녀들을 촬영한 이미지들을 연속적으로 운동하는 영상으로 흐르게 하기보다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멈추어 놓은 몇 장의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듯 움직인다. 그를 보고 있으면 가령 지금 서울에서 이 영화와 동시에 만날 수 있는 라이언 맥긴리의 사진들을 헐겁게 이어 붙이면 이런 영화가 나오진 않을까, 하는 상상마저 드는 것이다. 갖가지 네온 컬러로 물들인 활동‘사진’으로서의 이 영화는 그렇게 사진적 방법론을 경유하여 ‘젊음’에 관한 영화적 인상화를 만들어낸 것 같다.


흥미로우면서도 동시에 문제적인 사실은 이 영화가 결국 ‘인상화’의 수준에 그친다는 점이다. 삶의 한 시기를 감각적인 색감의 이미지로 표면화하는 과정에서 영화적 구체성을 상실하고 말았다면 지나친 단정일까. “비디오게임을 하는 척해, 영화에라도 출연하는 것처럼 행동해”라고 스스로 되뇌며 시작한 영화는 ‘척’과 ‘것처럼’에 머무르며 젊음의 추상화에 탐닉한다. 다만 코린이 그런 의도를 숨기기보다 적극적으로 노출하려 한 점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젊음에 대한 미국적 환상을 스스로 직시해 보고자 한 코린의 꿈인 것은 아닐까. 현실을 들여다보기 위한 꿈. 최후까지 남은 두 소녀가 어른인 척하는 남자들을 죄다 총으로 쏴 죽여 버리고 도망치는 엔딩, 거기서도 발견되는 것은 소녀들 스스로 지닌 폭발적 에너지가 아니라 그 소녀들의 비현실적인 환상을 낭만적이고도 씁쓸하게 바라보는 코린의 시선이다.




이후경 /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