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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ECM 영화제: ECM과 장 뤽 고다르

ECM, 현대 음악의 어떤 판본

[특집1] ECM과 고다르 특별전


ECM과 영화의 협업 관계는 장 뤽 고다르와의 협업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특히, 90년대 이래로 스스로 영화의 ‘작곡가’임을 자처한 고다르와 사운드의 ‘연출가’인 만프레드 아이허의 교류는 영화적 ‘이미지’와 음악적 ‘사운드’의 만남의 가장 훌륭한 사례로 손꼽힌다. 만프레드 아이허의 후원으로 고다르는 <누베바그>를 시작으로 <영화사>를 포함해 최근의 작품까지 ECM의 음반 중 창작에 필요한 음악들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ECM은 고다르의 <누벨바그>와 <영화사>의 사운드트랙을 발매했는데, 이는 단순한 OST를 넘어선 소리로 듣는 영화의 작품으로 존중받고 있다. ECM의 역사와 고다르의 영화와의 관련성을 살펴본다. 





ECM, 현대 음악의 어떤 판본


“미국의 위대한 혁신자들을 단지 모방하려고 시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것은 진실이다. 왜냐하면 그 혁신자들은 우리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블루스는 그 혁신의 뿌리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 역시 블루스와 동일한 가치의 음악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민속음악이다. 나중에 나는 우리의 민속음악과 블루스 사이의 많은 유사성을 발견했는데 사실상 그것은 모든 민속음악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1969년 베이스 연주자 출신의 프로듀서 만프레드 아이어가 독일 뮌헨에서 설립한 ECM(Edition of Contemporary Music)이 24년 후인 1993년, 자신의 500번째 음반 [12개의 달 Twelve Moon]을 발표했을 때 이 앨범의 주인공 얀 가바렉은 인터뷰에서 위와 같은 말을 남겼다. 가바렉의 말은 올해 설립 44주년을 맞은 이 독립 재즈 음반사의 성격을 요약해 주는 것이었다. 사실상 유럽에서 재즈 전문 레이블이 설립된 것은 훨씬 오랜 연원을 갖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유럽이 재즈를 수용하기 시작한 역사와 거의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1934년 장고 라인하르트와 스테판 그라펠리가 프랑스 핫클럽 퀸텟으로 첫 녹음을 남긴 것은 미국의 음반사가 아닌 자국의 레이블 울트라폰이었고 그 이후에도 수많은 유럽의 재즈 레이블들은 재즈에 대한 유럽인들의 열정을 대변하듯 끊임없이 등장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ECM이 출범하기 전에는 ‘유러피언 재즈’라는 용어가 아직 정립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 보다 2년 후에 쾰른에서 출발한 레이블 엔자(Enja: European New Jazz Association)에게도 유러피언 재즈라는 말은 한동안 그리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명확했다. ECM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유럽 재즈 레이블도 유럽 고유의 재즈 사운드를 세심하게 포착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ECM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음반사도 60년대 말, 70년대 초 유럽 재즈 뮤지션들 사이에서 형성되었던 새로운 기운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다. 오랜 세월 동안 루이 암스트롱, 듀크 엘링턴, 찰리 파커, 마일즈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을 쫓아가고 싶었던 유럽 재즈 뮤지션들은 바로 이 시점에 와서 비로소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네 명의 노르웨이 뮤지션들로 구성된 얀 가바렉 쿼텟의 70년 음반 [아프릭 페퍼버드 Afric Pepperbird]를 시작으로 ECM은 에버하르트 베버, 데이브 홀랜드, 존 서먼, 베어 필립스, 아릴드 안데르센, 테르예 립달, 에반 파커, 피에르 파브레, 토마스 스탄코, 엔리코 라바, 루이 스클라비스, 스테파노 볼라니, 지안루이지 트로베시 등 유럽 재즈의 새로운 기류를 끊임없이 만들어 왔는데 돌이켜 보자면 그것은 비슷한 시기에 단초를 만들었던 유러피언 프로그레시브 록과 공통의 문법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러피언 재즈 사운드라는 일종의 지각변동의 진원지가 재즈의 종주국 미국이란 점은 다분히 역설적이다. 그러니까 유럽의 재즈 뮤지션들이 더 이상 재즈의 전통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은 미국 재즈 그 자체의 흐름 때문이었다. 50년대 말 오넷 콜먼, 세실 테일러에 의해 제기되었던 아방가르드, 소위 프리 재즈는 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존 콜트레인이라는 재즈의 거인이 그곳에 탑승하면서 기존 재즈의 윤곽을 완전히 해체하고 있었고 이제 더 이상 재즈는 블루지 할 필요도, 스윙할 필요도 없었다. 그 점에서 유럽의 재즈 뮤지션들은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그 무렵, 특히 1969년은 록과 소울의 걸작들이 하루가 멀다고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다. 재즈의 마지막 버팀목이었던 마일스 데이비스마저도 전기 사운드와 록 비트로 누워있는 재즈에게 산소마스크를 씌워야만 했던 때가 ECM이 발족했던 1969년이었다. 프리재즈 뮤지션들은 당혹스러웠다. 그들은 새로운 에너지로 재즈를 살리려고 했지만 재즈는 록과 소울 음악에 기대어 연명해야하는 반신불수가 된 것이다. 1970년 프리재즈의 기수 앨버트 아일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사람들은 그것을 프리재즈의 죽음으로 인식했다. 지난 몇 년 간 뜨거운 논쟁을 지폈던 이 음악은 급속도로 냉각되고 있었고 그 주역들은 갈 곳을 잃었다.


이때 그들을 수용한 곳이 ECM이었다. 이 레이블을 지역적으로 한정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ECM은 단순히 유러피언 재즈의 산실인 것만이 아니라 70년대 이후 재즈의 흐름에서 가장 중요한, 적극적으로 활로를 모색했던 레이블이었다. 돈 체리, 레스터 보위, 샘 리버스, 에드 브랙웰, 와다다 리오 스미스 등 미국 프리재즈의 전통이 이 레이블을 통해 명맥을 이어갔으며 칙 코리아, 키스 자렛, 게리 버턴, 폴 블레이, 존 애버크롬비, 잭 드죠넷, 피터 어스킨, 팻 메시니, 찰스 로이드, 폴 모션, 빌 프리젤, 마크 펠드먼 등 ‘포스트 마일스-콜트레인’ 시대의 주역들이 대거 녹음을 남긴 곳이 이곳이었다. 보수적인 미국의 비평계도 이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의 재즈 전문지 <다운비트 Downbeat>는 1976년 아이어를 올해의 프로듀서로 선정했고 ’80년 같은 잡지는 ECM을 올해의 레이블로 선정했다. 특히 2000년대 들어 <다운비트>와 미국의 재즈 저널리스트 연합이 ECM을 그해의 최고의 레이블로 선정하는 것은 매우 비번한 일이 되었다.


1980년대부터 ECM은 단순히 재즈 레이블의 범주를 넘어 고전음악과 현대음악으로 영역을 넓혔다. 아르보 패르트, 존 케이지, 엘리엇 카터, 스티브 라이히, 메레디스 멍크의 새로운 작품들이 이 레이블에서 녹음되었으며 그레고리안 찬트, 르네상스 음악, 영화음악, 민속음악이 모두 ECM이라는 하나의 그릇 속에 담겼다. 얀 가바렉의 말대로 전 세계의 음악이 근원적으로 하나의 줄기 속에 이어져 있다면 ECM은 그 경로를 추적하고 있는 듯이 보이며 그 모습은 자신의 이름대로 ‘현대음악의 어떤 판본’으로 읽히기에 충분하다.



황덕호 / 재즈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