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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ECM 영화제: ECM과 장 뤽 고다르

박물관의 고다르 - <영화사>와 <올드 플레이스>

박물관의 고다르 - <영화사>와 <올드 플레이스>




<영화사>의 한 장면에서 고다르는 앙리 랑글루아가 설립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찾았던 기억을 다음처럼 술회한다. 이는 누벨바그가 어떻게 시네마테크에서 출현했는가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어느 날 밤 우리는 앙리 랑글루아의 집을 방문했다. 그리고 빛이 태어났다... 진정한 영화는 우리들의 촌스러운 눈에는 프레데릭 모로가 몽상하는 아르누 부인의 표정조차도 아니었다. 우린 카누도와 델뤽을 매개로 해서 영화를 알고 있었지만, 한번도 본 적은 없었다. 그것은 토요일에 보는 영화. 폭스, 팰리스, 미라마르, 바리에테에서 본 영화는 모두를 위한 것이지만, 우리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진정한 영화는, 아직 알려지지 않는 영화.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의 영화. 진정한 영화는 볼 수 없는 영화이다.”


고다르의 내레이션에 ‘현실의 박물관’이라는 자막과 랑글루아가 천사의 그림과 몽타주 되어 표현된다. 이러한 몽타주는 다음과 같이 단순하게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랑글루아의 시네마테크에서 고다르는 영화의 내용이 아니라 빛을 보았다. 둘째. 그런데 그 빛이란 부재하는 빛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원했던 영화란 그 당시 볼 수 없던 영화들이었기 때문이다. 셋째, 그러므로 진정한 영화란 볼 수 없는 영화들, 아직 보지 못한 영화들이다. 고다르는 무르나우의 <선라이즈>(1927)에서 노면 전차의 움직임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한다. “<선라이즈>의 노면전차가 그랬다. 로테 아이스너. 아마 잊혀지고 금지당해 볼 수 없는 것. 그것이 우리들의 영화였기에 랑글루아는 우리들에게 영화를 굳게 믿도록 만들었다. (...) 그러므로 이미지는 우선 속죄라는 걸 깨달았다. 게다가 현실의 속죄라는 것을. 우리는 놀랬다. 이탈리아에서의 엘 그레코나 고야의 그림을 앞에 둔 피카소 이상으로 우리들에게는 과거가 없었다. 메신느 거리의 사내 즉, 랑글루아가 우리에게 과거를 주었다.”


누벨바그에 할당된 3B의 챕터에 왜 ‘애매한 새로움’이란 제목이 붙어 있는가를 우리는 여기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누벨바그는 고다르의 표현을 빌자면 새로움의 시작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것은 뒤늦은 것의 자각이다. 그들은 영화 탄생의 순간에 입회한 적도, 무성영화의 찬란한 시기에 참여한 것도 아니었다. 무르나우가 미국에서 <선라이즈>를 촬영할 때, 그리고 그가 미국에서 사망했을 때 그가 누구인지 조차 알지 못했다(고다르가 여기서 언급하는 장 조르주 오리올, 제이 레다, 그리고 로테 아이스너는 이러한 존재하지 않았던 영화들, 그리고 상영이 불가능한 영화들에 대해 말했던 이들이자, 그러한 영화들을 보여주려 했던 사람들이다). 아니 사실 그들은 무르나우가 그 영화를 만들던 때에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고다르가 ‘랑글루아의 집을 방문해 빛을 발견했다’라고 말할 때, 이는 진심이다. 그는 영화를 만난 것이 아니라 이러한 부재의 빛, 이미 사라진 존재의 흔적을 영화의 빛에서 발견했던 것이다.


고다르가 시네마테크, 혹은 (영화)박물관에 대해 품고 있는 이러한 생각은 <올드 플레이스>에서도 반복된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올드 플레이스>는 20세기 말의 미술의 역사와 역할에 대한 일종의 에세이 영화다. 영화, 회화, 사진들의 인용으로 가득한 이 작품은 고다르의 원대한 기획이었던 <영화사>의 연장선에 있다 하겠다. 영화의 서두 부분에서 고다르는 헌 옷을 성당에 배치하는 크리스티앙 볼탄스키의 전시 작업에 감탄을 표한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헌 옷이 그것에 접촉한 부재하는 몸을 성당에서 다시 부활시키는 작업이라니”. 이 장면은 고다르가 박물관에 대해 품고 있는 두 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첫째, 박물관은 성스러운 장소이다. 죽음의 부활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둘째, 헌 옷이라는 직물의 특별함이 이러한 부활을 이끌어낸다. 여기서 헌옷이나 소지품은 고다르가 지적하듯 그 물건과 접촉한 신체의 물리적 흔적을 담고 있다. 부재의 신체는 이러한 직물에 마치 누에고치속의 번데기처럼 서식한다. 헌 옷을 성당에 전시하는 작업은 그러므로 버려진 의복을 질료로 그것에 부재하는 신체를 새롭게 투사하는 것이다. 이 때 직물은 마치 영화의 스크린처럼 작동한다. 앙드레 바쟁이 지적했던 것처럼 영화적 스크린은 베로니카의 베일을 닮았다. 그것은 현실의 흔적을 흡수하고 부재하는 것을 반영하는 물질적 직포이다. 영화의 스크린은 그렇게 이야기와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다.



김성욱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