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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청춘이 말하고 카메라가 듣다: 한국 다큐멘터리 특별전

[Feature] 이들의 내밀한 고백을 듣는 방법, 혹은 이 난처함을 어떻게 할까

 

 

 

 

 

 

 

 

 

 

 

 

 

 

 

 

 

 

 

 

 

이번 “청춘이 말하고 카메라가 듣다 : 한국 다큐멘터리 특별전”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은 모두 솔직함과 친밀함이라는 장점을 갖고 있다. 작품별로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영화의 감독들은 모두 출연자들과의 가까운 관계를 바탕으로 영화를 연출했다. <아무도 꾸지 않은 꿈>이나 <청춘일기>처럼 영화를 찍기 전부터 알고 지낸 경우도 있고 <나의 교실>처럼 영화를 찍으며 친해진 경우도 있지만 둘 중 어느 쪽이든 연출자와 출연자들이 서로간의 정서적 연대와 신뢰를 바탕으로 함께 영화를 만들어나간 것은 확실하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출연자들은 자신의 속 깊은 이야기나 부끄러운 이야기들을 그렇게 솔직하게 다 털어놓지 못했을 것이다. 이를 통해 관객은 타인들의 내밀하고 사적인 고백을 들으며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삶의 한 부분에 대해 떠올리고 내 삶의 고민도 공유할 수 있다. 어쩌면 영화가 끝날 즈음에는 출연자들에게 친밀한 호감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이는 분명 값진 경험이며, 이런 맥락에서 이번에 상영하는 다섯 편의 영화들은 자신의 역할을 확실히 해낸다. 개별성을 무시당한 채 막연히 ‘청춘’이라 불리던 10-20대들이 카메라를 경유해 자신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자기 목소리로 직접 이야기하는 것은 그 자체로 소중한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출연자들과 함께 지금 현실에 대해 고민하고 어떤 장면에서는 감동을 받으면서도 완전히 영화에 몰입할 수 없었던 것은 문득 내가 지금 그들의 삶에 너무 가깝게 다가갔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의 심각하고 사적인 대화를 엉겁결에 듣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이랄까. 내가 지금 저 사람의 저런 모습과 저런 이야기를 보고 들어도 괜찮은 걸까라는 망설임. 나는 ‘내가 지금 타인의 마음속을 너무 깊이, 너무 쉽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스스로 한발 물러서서 영화를 보아야 했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위해 다음의 장면들을 보자.

한자영 감독의 <나의 교실>은 상업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이 학생들은 다른 아이들이 수능시험을 준비할 때 면접을 준비하고 졸업도 하기 전부터 직장에 출근을 한다. 그리고 이중 한 명이 회사에서 어떤 오해를 받고 이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데 영화는 단순히 출연자가 사회생활을 하다가 ‘어떤 힘든 일’을 겪는다는 수준의 묘사로 이 에피소드를 연출하지 않는다. 출연자는 손에 카메라를 든 감독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친한 언니에게 이야기하듯이 자신이 어떤 오해를 받았는지 구체적으로 털어놓으며 눈물을 흘렸고 카메라는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와 눈물을 클로즈업으로 담아냈다.

구미의 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아무도 꾸지 않은 꿈>은 다양한 연령대의 직원들을 인터뷰하며 영화를 진행시킨다. 그중 삼십대 후반의 한 여성은 공장에서 일하기 전에 노래방을 운영했다는 것을 말하며 당시 평소 알고 지내던 미성년자 학생들을 도우미로 고용했다가 영업정지를 당하고 벌금을 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또한 소위 ‘가출 청소년’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간지들의 하루>에 출연한 학생들은 어릴 때 부모님이 집을 나간 일이나 가족들에게 폭력을 당했던 일등을 담담하게 이야기해준다. 이때 관객은 한 출연자의 할머니가 그녀를 칼로 찌르려고 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

그 성격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 이야기들은 안 친한 사람에게는 웬만해서는 말하지 않을 사적인 내용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영화상에서 이들은 정말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말하고 감정을 드러내지만 엄밀히 따져 이 출연자들은 관객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기 앞에 있는 감독이자 친구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전부터 긴 시간을 함께 하며 가까워진 감독이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극장에 앉은 관객이 이들의 내밀하고 사적인 이야기를 듣는 것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관객은 이 이야기를 그냥 듣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적극적으로 관객을 지금 출연자가 있는 공간, 그것도 무릎이 닿을 정도의 거리로 불러온다. 이 영화들의 대부분 장면들은 한 대의 카메라로 촬영했고, 이 카메라는 우리가 흔히 ‘캠코더’라 부르는 기종이다. 카메라 성능의 한계 때문이라도 감독은 출연자와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으며 많은 숏들을 출연자를 마주보는 방식으로, 그리고 미디엄 숏 이상의 사이즈로 찍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미장센은 관객들이 출연자와 정면으로 마주보고 앉아 이야기를 듣게 한다. 어쩌면 앞에서 한 비유가 틀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관객은 이들의 옆에 앉아 몰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사적인 속내를 드러내는 출연자들의 맞은편에서 직접적인 청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동적으로 곤란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모공이 보일 정도로 얼굴을 클로즈업한 상태에서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을 비밀 얘기를 하며 눈물을 흘릴 때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라는 망설임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다. 이때 관객은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 하나는 망설임을 뒤로하고 기꺼이 영화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자리로 걸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카메라 뒤에 있는 감독의 자리에 자신의 자리를 일치시켜 그들의 작은 진심까지 적극적으로 받아내는 것이다. 이때 스크린 속의 출연자는 3인칭(‘그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에서 2인칭(‘네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으로 바뀐다. 출연자와 관객이 맺는 관계의 성격을 바꿔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길은 그 망설임, 또는 난처함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받아들인 후 이를 영화 관람의 과정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이 영화들도 타자의 내밀한 고백 앞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조심스러워하며 망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간지들의 하루>의 마지막 장면을 보자. 송하는 지금 집을 나와 독립한 상태이다. 그녀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에 아버지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남동생과도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하지만 송하는 용기를 내어 아버지가 살고 있는 동네로 발걸음을 옮기고 그곳에서 초조한 눈빛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친구와 나눈다. 그때 예고 없이 저 멀리서 동생이 걸어오고, 송하는 반가워하며 동생에게 달려간다.

어쩌면 이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 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카메라(와 감독)는 송하를 따라가지 않고 멀찍이 거리를 두고서 그냥 두 남매를 바라본다. 이는 물론 처음 만난 남동생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와 동시에 카메라도 타인의 가장 사적인 순간과 직면하는 것에 어떤 망설임을 느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연출자와 출연자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이 장면에서 가장 크게 마음이 움직였다. 지금까지는 연출자와 출연자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나오는 내밀한 감정들과 사적인 순간들을 따라가기 바빴다면 이 장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주체적으로 영화 속에 들어와 연출자와 같은 입장에서 인물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다큐멘터리는 진실을 보장하지 않는다. 아무리 대상에 가까이 다가가더라도 단지 진실의 주위만 맴돌 수 있을 뿐이다. 이때 진실은 렌즈에 포착되지 않았거나 이미 지나가버린 채 대상의 더 깊은 곳에 숨어 있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카메라는 그렇게 멀리서 송하 남매를 바라보다가 숏을 끊는다. 그리고 다음 숏은 이미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이다. 그러니 그녀의 진짜 속마음은 촬영하지 못한(또는 편집 과정에서 지운) 이 흘러간 시간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영화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들 카메라 바로 앞에 앉아 이런저런 비밀 이야기를 하고, 이런저런 친밀한 행동을 보이지만 그들이 정말 할 수 없었던 이야기, 정말 보여줄 수 없었던 속마음은 숏과 숏 사이에 남아 있을 것이다. 주의 깊게 영화를 보다가 그런 순간들과 살짝 스쳐지나갈 때 우리는 난처함 없이 그들의 숨은 속마음을 짐작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공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글/ 김보년(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