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에서 첫 번째 시 ‘파괴’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된다. ‘노상 내 곁엔 악마가 꿈틀거린다.’ 보들레르의 시집이 복수로 존재하는 악의 꽃들에 대한 것이라면, 클로드 샤브롤의 <악의 꽃>은 한 집안에서 대물림 되는 ‘악의 꽃’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화는 이 시에 표현된 ‘언제나’와 ‘내 곁에’에 초점을 맞추어 ‘집’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영화가 시작하면 카메라는 패닝과 줌인으로 집의 바깥에서 집 안으로 들어간다. 제목과 함께 보이는 이미지는 꽃이나 씨앗이 아닌 울퉁불퉁한 열매들이다. 바람에 흔들리고 돌기가 있는 단단한 열매들이다. 카메라가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노래가 들려온다. “기억은 꿈속에 찾아오지만 보이는 것과 같지 않고 당신을 영원히 사로잡는 마법. 당신이 믿고 있는 기억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슬퍼할 필요도 없고, 과거는 영원하다 말하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한 여자가 쭈그리고 앉아 있고, 침대 밑에 남자의 시체와 피 묻은 손, 그리고 손에 끼어진 금반지가 보인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 처음 장면은 반복되어 보인다.

<악의 꽃>은 대를 이어 계속되는 근친상간을 통해 반복되는 위선과 범죄가 현재 속에 끝없이 갇혀있음을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시간은 집으로 표상되는 공간 속에 갇혀있고, 인물들은 유사한 구도 속에서 반복하여 죄를 저지른다. 영화의 후반부에 린 고모를 통해 발화되는 “시간이란 것은 없어. 알게 될 거야 인생이란 끝없는 현재라는 것을”이라는 말은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이 깨이지 않는 악몽은 흑색 전단지로 폭로되는 샤통 가문의 비밀과 연결되어 있다. 이는 2차 대전과, 전후의 프랑스 역사를 표상하고 있다.

흥미로운 건 이렇게 폭로되는 가족사 이후에 보이는 연극적인 구도이다. 먼저 린 고모의 동선을 따라 린 고모와 가정부가 식기 세척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보이고, 카메라는 다시 린고모를 따라 가족이 있는 온실로 들어간다. 이 장면 전체에서 카메라는 린 고모를 계속해서 따라가는 데, 그건 그녀가 전단지 속에 제시되는 비밀들을 간직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안느의 선거 출마에 대한 의견이 오가고, 인물들이 하나씩 퇴장하면 카메라는 다시 처음의 구도인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되돌아간다. 이어 위에서 아래로 틸트 다운하여 빈 새장 너머로 두 사람을 비춘다.

이 영화에 서스펜스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전단지를 누가 썼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고, 미셸과 프랑스와 간의 근친상간도 발화를 통해 너무 쉽게 드러난다. 린 고모의 아버지인 피에르 샤팡은 나중에 나치에 협력하여 수용소에 갈 유대인의 명단을 작성하였음이 드러나지만, 미셸의 살인 동기가 사랑하는 오빠를 죽인 것에 대한 복수임이 밝혀지면서 다시 근친상간의 문제로 치환된다. 어떤 금기도 없다. 행위에서 죽음과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살인과 근친상간이 반복 되는 공간으로써의 집은 프랑스와가 그토록 그곳을 숨막혀하는 이유가 된다. 린 고모는 그에게 “여기선 모든 게 비밀”이라고 말한다.       





다시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으로 돌아가면 첫 번째 시 ‘파괴’의 2절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때로 놈은 <예술>에 대한 내 큰 사랑을 알고,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여인으로 둔갑하여, 위선적인 그럴싸한 핑계 내세워, 내 입술을 더러운 미약에 맛들게 한다. 이렇게 놈은 하느님의 눈에서 멀리, 권태의 허허벌판 한가운데로 지쳐 헐떡이는 나를 끌고 가서 얼떨떨한 내 눈 속에 던져 넣는다. 더럽혀진 옷가지들과 헤벌어진 상처를, 그리고 <파괴>의 피투성이 연장을!”

1절의 ‘노상 내 곁엔 악마가 꿈틀 거린다’에서 악마는 권태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예술가의 권태, 나르시시즘과도 닮은 그것은 동일한 주제인 부르주아에 숨은 기만과 위선, 그리고 파멸을 반복하고 변주하는 샤브롤의 영화와 닮았다. ‘악마-권태-파괴’로 이어지는 정반합적인 도식은 그것이 꽃과 씨앗, 열매처럼 영원히 반복되기에 끔찍한 악몽이다. 아버지의 살인, 절멸의 순간 또한 반복되어 인물들은 ‘어쩔 수 없이’ 반복하여 죄를 저지른다. 그건 그들이 태초에 악의 꽃을 잉태하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린 수년 동안 위선적으로 살았어”라는 린 고모의 대사에 프랑스와는 시니컬하게 대답한다. “철학적이 되자구. 태고 이래로 사람들은 위선자처럼 살았어. 그걸 문명이라 불렀고.” 이 영화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는 시니시즘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과거와 절멸의 역사를 현재와 권태로 치환할 때, 발생하는 문제는 무엇인가?


레비스트로스는 근친상간을 인류의 문명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금기로 설정했다. 물론 이 영화에서 근친상간의 욕망이 실제로 어떻게 존재하는 식의 프로이드적인 독해는 중요하지 않다. 가령, 영화에서 미셸은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다. 프랑스와는 미셸을 비꼬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그럼 프로이드 선생 넌 왜 싫어하는데?” 근친상간은 죄의 유무와 상관없이 하나의 ‘금기’일 뿐이며, 이는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선과 악’의 개념을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간의 충돌에서 오는 ‘교활한’ 통치 수단으로 보고, 이에 대비하여 ‘좋음과 나쁨’의 개념을 이야기했던 것의 연장선상에서 읽힌다. 강조해서 묻고 싶은 것은 이 영화가 직접적으로 2차 대전과 홀로코스트를 표상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런 식으로 죄(존속살해)의 근거로 근친상간을 설정할 때, 피에르 샤팡의 죄(나치부역)가 특수하고, 부르주아적이 되지는 않는가이다.

샤브롤은 평생에 걸친 영화작업을 통해 부르주아들에 대한 비판을 결코 늦추지 않는 견고한 정치적 입장. 은밀하고 우회적인 비판을 해왔다. 하지만 이 영화를 단순히 회귀하는 부르주아들의 위선과 기만, 이라는 식으로 환원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피에르 샤팡의 죄를 통해 영화가 전후의 프랑스 역사를 표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전쟁 중과 후의 프랑스 부르주아들이 취했던 홀로코스트의 공모자로서의 태도에 대한 윤리적 태도와 반성이 이어지는데, 이를 단순히 근친상간의 금기와 등가시켜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자크 랑시에르는 미학이 ‘예술이론 일반 또는 예술을 감수성에 미치는 그 효과들로 회송할 어떤 예술이론이 아니라, 행동 방식들, 이 행동방식들의 가시성의 형태들 그리고 그것들의 관계에 대한 사유가능성의 양식들(이는 사유의 유효성에 대한 어느 일정한 관념을 함축한다)사이의 절합 양식인 예술들에 대한 어떤 특별한 사유 및 체제이다’라고 말했다. 영화에서 윤리적 성취는 감성을 통한 미적 특이성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단순히 홀로코스트나 근친상간, 존속살인과 같은 죄를 ‘일반적인’ 도덕률에서 표상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악의 꽃>을 통해서 전해지는 감정적 특이성은 무엇일까?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제라르의 죽음과 그의 시체가 처리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상현달이 뜨고 린 고모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잡힌다. 과거로부터의 환청이 들린다. 급하게 울리는 피아노 소리와 비명과 같은 사운드는 다가올 사건을 암시하는 듯하다. 멀리서 집으로 들어오는 차가 보인다. 카메라는 줌아웃으로 공부하는 미셸을 비추던 카메라는 줌아웃하면서 훔쳐보는 시선이 된다. 제라르가 접근해 들어간다.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린다. 실내임에도 계속 들리는 풀벌레 소리는 이들을 바라보는 시점을 보여준다. 미셸을 탐하려던 제라르는 죽임을 당한다. 죽기 전 미셸은 제라르에게 전단지에 관한 진실을 추궁하지만 제라르는 “그렇게 생각하면 흥분돼?”라는 대사를 남길 뿐, 전단지를 쓴 사람이 제라르라는 것은 밝혀지지 않는다. 진실은 유보되고, 단지 인물간의 욕망과 이를 통한 살인이 있을 뿐이다. 제라르가 죽고 카메라는 다시 위에서 미셸과 제라르를 내려다본다. 하지만 이 시선은 완전한 부감이 아니다. 그것은 새의 눈이라기보다는 사건을 훔쳐보는 누군가의 시선을 닮아있다. 이는 관음증적이다. 훔쳐보는 시선은 사건과 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지만 훔쳐보는 시선을 통해 사건과 지속적으로 관계 맺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선은 이 영화전체를 지배하는 시니컬한 시선과도 연결 된다.

집의 바깥에서 미셸과 미셸린은 조우하고  이제 시체를 처리하는 일만이 남았다. 린 고모가 제일 먼저 찾는 것은 스탠드이다. 제라르의 시체를 옮기는 과정이 롱 테이크로 진행된다. 죽은 얼굴 표정에 변화가 없다. 올린 셔츠를 통해서 제라르의 배가 드러난다. “매일 이걸 반복하진 않을 거야”라는 린 고모의 대사와 미셸과 린고모가 함께 제라르의 시체 앞에서 웃는 장면은 이 불유쾌한 악몽의 진상이 사건 그 자체 보다는 남은 흔적(시체와 집이라는 공간)에 있음을 말해준다. 이미 저질러진 범죄 앞에서 불현 듯 치워야 할 시체가 너무 크다는 사실에 놀라서 당황하고, 너무 많은 피가 흘러서 그것을 처리하는데 실패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보인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범죄가 지니는 이상한 부조리와 마주하고야 만다. 거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범죄의 기기묘묘한 물질성이다.

사실 샤브롤이 히치콕의 자장권 안에 있기는 하지만, 그가 범죄라는 사건이 지니는 사회적 기호들의 연쇄성에 목표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 범죄가 무죄로 드러나거나, 혹은 맥거핀으로 사라져 버리는 경우란 없다. 오히려 그는 범죄를 통해 사회에 대한 배움을 강조한다. 그래서 샤브롤은 범죄의 가해자를 따라가거나 혹은 피해자를 뒤따르지만 양쪽의 경주를 다루는 법은 없다. 오직 범죄를 통해서만 저 은밀한 관계의 비가시적인 망들이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힘을 행사한다. 물론 여기서 처리하기 가장 힘든 것은 시체이다. 오직 그것만이, 그러니까 사회적 관계 속에서 빠져나온 살과 고기가 문제가 된다.[각주:1]

안느는 선거에서 승리한다. 그녀는 흑색 전단지에도 불구하고 투표에서 이겼다. 여기서 전단지와 투표용지는 현존하는 사실을 드러내거나, 조작하거나, 만들어내는 텍스트로써 등가가치를 갖는다. 진실이나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진실은 축하파티가 벌어지는 1층 위,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2층에 있다. 제라르의 시체가 처리되는 과정을 통해 영화는 첫 장면의 구조를 반복한다. 이 영화의 주된 세트장인 집은 삶의 공간이기도 하고, 살인의 흔적, 비밀과 거짓말이 교차하는 연극적인 공간이다. 이 공간 안에 핀 ‘악의 꽃’은 생명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영원히 피어있는 조화와도 같은, 깨이지 않는 악몽인 것이다. (윤상정)

* 12.21일(화) 5:30 / 12.25(토) 7:00 상영

  1. 정성일,『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 정성일 정우열의 영화편애』, 바다출판사, 2010, p.387. [본문으로]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