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감독 다무라 마사키 회고전]

촬영감독이 모습을 드러낼 때…: 다무라 마사키, 그리고 n개의 영화

 

 <산리즈카-이와야마에 철탑이 세워지다(三里塚: 岩山に鐵塔が出來た)>(1972)의 전반부, 활주로 남단에 800m 철탑을 세우는 문제를 둘러싸고 공항 반대동맹 주민들이 회의하는 모습을 찍은 롱테이크가 계속된다. 간간히 팬 이동하며 회의실 안의 면면을 비추긴 하나, 카메라는 한 청년이 홀로 일어선 채로 눈물과 욕설을 섞어 철탑 건설과 투쟁을 호소하고 있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다.[i] 비교적 움직임이 없는 카메라로 찍은 이 장면은 다소 의아한데, 초점이 말 그대로 깜박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8월, 『영화예술』의 ‘다무라 마사키 추모 특집’에 실린 카메라맨 가와카미 고우이치의 회고는 당시 카메라 뒤에서 있었던 일을 알려준다.[ii] 당시 촬영 조수였던 그는 핸드헬드 촬영을 하던 다무라 마사키 뒤쪽에서 슬쩍 손을 내밀어 몰래 무거운 카메라를 받쳐주곤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촬영감독은 수동으로 초점을 계속 맞춰주며 찍어야만 했는데, 가와카미는 그날 눈물 때문에 핀트 확인을 자꾸 놓치는 다무라 몰래 뒤쪽에서 초점을 맞추던 기억을 떠올린다. 카메라가 느릿하게 회의실을 비추는 가운데 초점이 맞았다가 흐릿해졌다가 하며 휙휙 변하던 그 장면은 그렇게 찍혔다. 청년은 아예 엉엉 울기 시작하고, 주민들 몇몇은 담배를 연거푸 피우거나 조용히 눈물을 훔친다. 현장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는 카메라맨의 존재가 자신의 모습을 보임 없이 화면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이런 순간인지도 모른다.

 

두 개의 산리즈카, n개의 영화

 1992년 오가와 신스케 추모 상영회에서 하스미 시게히코는 오가와의 영화들에서 보이는 어떤 불안정함 혹은 불균형감을 지적한다. ‘분석하는 뇌’와 ‘뇌를 거스르는 듯한 손’, 이 둘 사이의 불안정이 그것으로, 하스미에 따르면 ‘손’은 또 다시 ‘보는 손’으로서 ‘눈’과 ‘손’ 사이의 기묘한 싸움을 벌인다. 지켜보고 거리를 두는 눈과 닿고 접촉하는 손 사이의 경합에서 오가와가 선택한 것은 16mm 카메라, 적은 수의 작업 인원, 자막이나 담고 있는 의미 자체를 넘어 귀에 부딪치는 소리로서의 방언, 스크린을 앞에 한 관객들의 그때그때의 체험 등등 모두이다. 오가와의 영화는 이 모든 걸 포함하는 미디어 자체를 필름에 거는 것이라고 하스미는 설명한다.[iii]

하스미의 지적에서 언급된 ‘불안정함 혹은 불균형감’은 어쩌면 ‘오가와의 영화’만이 아니라, 영화라는 것이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가 품고 있는 한 속성이 아닐까. 아오야마 신지와의 오랜 대화를 엮은 책 『취한 눈의 거리-골든가 1968~98』에 또 하나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iv] <산리즈카-헤타 마을(三里塚: 辺田部落)>(1973)에서 다무라가 찍은 화면 위에 굵은 고딕체 수퍼 임포즈 자막으로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글귀가 겹쳐진다. “쓰지 않아도 (화면에) 비치고 있지 않냐”며, “게다가 그 글자 때문에 화면 대부분이 가려진다”고 슬쩍 불만을 표하는 다무라의 회고를 영화 제작 과정에서의 모종의 경합들 중 하나라고 한다면, 이어지는 그의 다음 회고는 이런 경합들을 품고 있는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같은 회고에서 다무라는 산리즈카의 현장 바깥에서 그 영화를 보고 달려온 사람들은 어쩌면 두 종류가 있지 않을까 이야기한다. 즉 당시의 산리즈카 투쟁에 대한 모종의 공감을 품고 지지자로서 그것을 본 사람과, 촬영의 생생함으로서 그것을 보고 길을 나서는 사람이다.[v] 다무라는 이어서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떤 카메라맨으로 보느냐 하는 것 또한 기록 영상과 액션 영상 두 가지로 나뉘는 듯하다는 회고를 덧붙이기도 한다. 화면에 덮이는 자막/내레이션과 화면, 혹은 ‘눈과 손’의 불안정함, 경합. 미디어 그것 자체로서 체험되는 ‘총화(總和)’로서의 영화는 어쩌면 하나가 아니라 n개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vi]    

 

변화하는 제작 환경

 80년대 전반의 작업에 대한 회고에서 다무라는 스튜디오가 아닌 독립계 사람들(이타미 주조), 촬영소 조감독에서 시작해 필드에 나온 사람(소마이 신지), 자주영화•독립영화를 계속 만들어온 사람(이시이 소고)들과 함께했다고 말한다.[vii] 다무라가 ‘함께했던’ 사람들, 영화 제작 현장은 스튜디오 시스템 붕괴 이후 일본 영화 제작에서의 변모 및 ‘선택’의 문제와 ‘함께한다’.

60년대 초반, 주로 대기업의 PR 영화를 찍던 이와나미 영화제작소를 그만둔 일군의 사람들이 연구 그룹 ‘파랑의 모임(靑の会)’을 결성한다. 구로키 가즈오(<료마 암살>(1974) 감독), 츠치모토 노리아키, 히가시 요우이치(<일본요괴전 사토리>(1973) 감독), 스즈키 다쓰오, 오가와 신스케, 이와사 히사야, 오오츠 고시로(<산리즈카의 여름>(1968) 촬영), 다무라 마사키가 멤버였다. 60년대 후반 이후, 인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팀이 짜여지고, 한 영화사에 고정되지 않고 ATG, 오가와 프로덕션, 도에이, 디렉터스 컴퍼니, 세이부-세존 그룹과 파르코 그룹 같은 유통 기업, 비터스 엔드(센토 타케노리 프로듀서) 등을 통해 제작된 다무라의 영화들에서 이전과는 다른 한 가지를 지적할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고정된 한 회사(도호)에서 쭉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들을 찍어온 미술의 추코 사토시, 촬영의 다마이 마사오, 조명의 이시이 쵸시로, 녹음기사 시모나가 히사시가 <고지라>도 찍게 되는 상황 자체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이는 안정된 스튜디오 시스템의 붕괴로 인해 지극히 불안정해진 영화 제작의 곤경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또 한편으로는 ‘선택을 당함으로써’ 영화를 제작하는 것과는 다른 식의 영화 제작 환경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다무라의 다음과 같은 어떤 태도와도 이어진다. “감독의 생각이나 무언가를 영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도 거기서 그리고 싶은 것이 있잖아요. 당연한 소리지만, 저는 그걸 영상으로 찍는 겁니다.”[viii]

 

“대위법적 푸가”

 “작가주의가 아니라, ‘감독’은 그 조화를 수용하며 ‘연주’를 지휘한다. 이 상호작용으로부터 흥미로운 ‘또 하나’가 태어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필시 ‘다성적(多聲的)’이고 풍요로운 ‘흐름’이 (될 것이다)…. ‘어긋남’의 ‘몽타주 효과’. 촬영에서든, 각 파트에서든, 특히 ‘작가’가 시키는 대로 ‘네’라고 대답하며 ‘타자의 표현’을 하는 건 불가능한 것이다. 각자의 생각도, 시간도, 조금씩 ‘어긋난’ 변주가 ‘겨루기’를 해가는 것이다. ‘대위법적 푸가’랄까?”[ix]

다무라의 작업 노트에 적힌 위와 같은 글귀와 함께, 다무라의 인터뷰들과 주변 사람들의 회고에서는 영화 제작 현장에 관한 그의 말버릇으로서 ‘겨루기’란 단어와 “(화면에)비치는 겁니다/찍으면 영화가 되는 겁니다”란 말이 자주 등장한다. 전자를 한 편의 영화에서의 ‘복수의 작가들’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콘셉트, 콘티 등을 떠나 다무라가 말하는 바의 ‘다무라의 영화’를 이야기해주는 것 같다.

“영상, 숏을 찍는 게 겹쳐지고 하나의 신이 되고, 더 나아가 신이 겹쳐져서 영화가 되는 겁니다. 그 숏을 찍는 게 저죠. (중략) 어떤 숏이 태어납니다. 그 숏에서 다음의 무언가가 부풀어오기 시작합니다. 전부 정해진 숏에선 부풀어올 수가 없지요.”[x]

<자아와 타자>(2001)의 부재하는 사진가의 사진 위로, 사진가는 “여보세요, 여보세요. 들리세요?”라며 말을 건다. 존재/부재를 확인하는 이 물음을 묻는 사진가의 존재와 같이, 화면에 자신의 모습을 보임 없이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홍지영(북경대 박사과정, 영화사 전공) 

 

 


[i] <산리즈카-이와야마에 철탑이 세워지다>(1972)는 반대동맹 주민들이 지하에 만든 요새가 철거되고, 1971년 9월 16일 제2차 강제집행이 실시된 데서 화면을 시작하고 곧이어 반년이 넘는 시간을 뛰어넘어 1972년 3월 8일 주민들의 철탑 건설 실행 회의로 이어진다. 사이에 놓인 반년 간의 공백은 이 다큐멘터리의 이듬해에 상영된 <산리즈카-헤타 마을>(1973)에 담겨 있다. 제2차 강제집행에서 철탑 회의 사이의 기간 동안, 파견 경찰기동대 3명이 사망했고, 주민 234명이 체포되었으며, 한 명의 주민은 자살했다. 지하 요새가 철거되고, 위법행위라는 말과 체포가 심리적 위협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때다.

[ii] 川上皓市, 「田村さんの撮影にはNGはないのです」,『映畵藝術』2018年8月號, p.85.

[iii] 蓮實重彦, 「小川紳介の映畵を語る」,『シネアストは語る 5: 小川紳介』, 名古屋シネマテ-ク, 1993, pp. 155~183.

[iv] たむら まさき, 靑山眞治, 「三里塚を撮る」,『醉眼のまち:ゴ-ルデン街 1968~98』, 朝日新聞社, 2007, p. 72.

[v] たむら まさき, 靑山眞治, 「三里塚を撮る」,『醉眼のまち:ゴ-ルデン街 1968~98』, 朝日新聞社, 2007, p. 73.

[vi] 이와 관련해, 유운성이 자크 투르뇌르의 영화와 프로듀서 발 뉴튼의 영화란 말로 한 편의 영화가 복수 작가의 계열로 짜여진 것임을 가정하는 부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유운성, 「4강: 작가주의를 말하는 거간꾼들」, 『영화비평강좌: 동시대 영화의 쟁점들』, 대전아트시네마, 2018, pp. 38~58.

[vii] たむら まさき, 靑山眞治, 「時流に乘る監督たちと」,『醉眼のまち:ゴ-ルデン街 1968~98』, 朝日新聞社, 2007, p. 113.

[viii] たむら まさき, 筒井武文, 越川道夫, 「たむら まさき: 撮影論」, 『nobody』, 2008(https://www.nobodymag.com/sunanokage3/index.html).

[ix] たむら まさき, 「遊びをせんとや生まれけむ…抄」, 『映畵藝術』2018年8月號, p. 98.(괄호 안은 필자 추가)

[x] たむら まさき, 筒井武文, 越川道夫, 「たむら まさき: 撮影論」, 『nobody』, 2008(https://www.nobodymag.com/sunanokage3/index.html).

 

아오야마 신지(감독)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건 없다 - <유레카> 상영 후 아오야마 신지, 정재은 감독 대담

 

김성욱(프로그램디렉터) 태풍 ‘링링’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감독님이 방금 무사히 서울에 도착했다. 호텔에도 못 들르고 바로 극장으로 온 걸로 알고 있다. 아오야마 신지 감독님께 큰 박수 부탁드린다.

아오야마 신지(감독) 오늘 “다무라 마사키 회고전”에 와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린다. 다무라 마사키 감독 본인이 왔으면 제일 좋았겠지만 지금 저세상에 계셔서 못 왔다. 정말 유감이다. 오늘 내가 하는 이야기는 반 이상이 농담일 텐데, 여러분들도 같이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

김성욱 개인적으로 2001년에 다무라 마사키 감독을 전주영화제에서 만난 적 있다. 인터뷰 일정으로 만났는데, 자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맥주를 많이 드신 상태였다(웃음). 결국 인터뷰는 포기하고 다른 분들과 함께 술을 먹으며 왜 젊은 감독들과 주로 작업했는지 물어봤다. ‘나이 든 사람들과 작업하면 심심하다. 자유롭게 촬영하고 싶었다.’ 이런 답을 들려주었던 기억이 있다.

2004년에는 전주영화제에서 “다무라 마사키 마스터 클래스”가 열렸다. 그런데 다무라 마사키 감독은 몸이 안 좋아 결국 오지 못했고, 대신 스와 노부히로 감독이 게스트로 참석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당시 스와 노부히로는 <듀오>의 시나리오를 쓰는 중이었다고 한다. 결국 시나리오를 다 못 쓴 채 다무라 마사키와 만났는데, 다무라 마사키의 첫 말이 ‘각본이 없어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였다고 한다. 그래서 스와 노부히로도 자신감을 갖고 완성된 각본 없이 촬영을 시작했고, 촬영 도중에도 다무라 마사키는 ‘그래도 괜찮아’란 말을 계속했다고 한다. ‘찍으면 찍히기 마련이야’란 말이 당시 스와 노부히로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는 일화를 전해주었다. 

먼저 아오야마 신지 감독에게 다무라 마사키는 어떤 존재였는지 듣고 싶다. 두 사람은 <헬프리스>를 포함해 열 편의 작품을 같이 만들었다. 두 사람의 협력은 단순히 개인적 작업이 아니라 일본 영화사에 상징적이고 특별한 흔적을 남겼다.

아오야마 신지 다무라 마사키를 처음 만난 계기는 <헬프리스>였다. 내가 쓴 시나리오를 다무라 마사키에게 주자 폭력적인 묘사가 많다는 이유로 거절을 했다. 그래서 프로듀서인 센토 다케노리 등과 함께 <헬프리스>는 그런 폭력적인 영화가 아니고 ‘좋은 영화’가 될 거라고 설득했다.

그때 다무라 마사키와 신주쿠의 어떤 찻집에서 만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 사회자도 이야기했듯이 다무라 마사키는 맥주를 안 마시면 이야기를 못 하는 사람이다(웃음). 결국 맥주를 마시러 가자고 해서 자리를 옮겼는데, 내게 어떤 맥주를 좋아하는지 물어보더라. 그래서 특정 상표를 얘기했더니 ‘그럼 하자’고 흔쾌히 말해서 작업을 시작했다(웃음). 그때 “기린”과 “삿포로”를 얘기했는데 그게 다무라 마사키의 취향과 일치했던 거다. 그 후 계속 기린과 삿포로 맥주를 함께 마시며 10년 이상 작업을 계속했다.

김성욱 스와 노부히로는 다무라 마사키의 작업 방식을 ‘찍히면 된다’로 설명했다. 아오야마 신지 감독은 다무라 마사키와 작업할 때 어떤 논의 과정을 거쳤는지 궁금하다. 참고로 스와 노부히로는 <유레카>를 두고 ‘<듀오>와 비교하면 너무 아름다운 영화다’라고 말한 적 있다.

아오야마 신지 다무라 마사키의 말버릇 중 하나가 ‘(화면에)비친다’, ‘찍으면 찍힌다’이다. 장난감 카메라나 인스턴트 카메라처럼 영화도 찍으면 찍히는 것이다. 그와 함께 자주 했던 말이 ‘무엇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없다’이다. 즉 ‘이렇게 영화를 찍지 않으면 영화가 아니다’ 같은 어떤 정해진 원칙은 없다는 뜻이다. 그런 맥락에서 다무라 마사키가 나이 든 감독들과 작업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던 건, 나이 든 감독들은 영화를 찍을 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와 같은 규칙에 얽매이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연배가 있는 감독들은 계속 ‘무엇무엇 해야 한다’, ‘영화는 이러해야 한다’는 식의 이론적 무장을 하고 있었는데, 나, 스와 노부히로, 구로사와 기요시 등 젊은 감독들은 그런 옛 이론을 무시하며 작업했다. 이런 식으로 이전과는 다른 이론을 만드는 작업을 했던 게 90년대 후반의 일본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90년대 후반부터 영화를 시작한 감독들은 카메라를 돌리면 카메라에 찍힌 게 그대로 영화가 된다, 는 생각을 갖고 영화를 만든 세대이다.

또한 나와 다무라 마사키는 같은 작업을 반복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16mm 칼라에 유러피안비스타 사이즈로 <헬프리스>를 찍었다. 다음에 찍은 <쉐이디 그로브(Shady Grove)>(1999)는 비디오카메라와 35mm 필름 카메라를 번갈아가며 찍었고, <달의 사막(Desert Moon)>(2001)은 35mm 스탠다드 칼라로 찍었다. 매번 새로운 모험을 했던 것이다. 이후 <호숫가 살인사건(Lakeside Murder Case)>(2003),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エリ エリ レマ サバクタニ)>(2005)를 찍을 때도 16mm 카메라나 특수 장비를 동원하고 스탠다드, 아메리칸비스타 등 다양한 사이즈를 시도하며 모험을 했다. 

왜 이렇게 했냐고 물으면, 다무라 마사키가 싫증을 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답하겠다. 다무라 마사키는 같은 것만 반복하면 싫증을 잘 냈다. 그는 다음에는 이걸로 하자, 다음에는 저걸로 하자, 이런 제안을 계속했다. 나는 마치 아이를 달래듯 그런 시도를 계속 이어나갔다. 그러다 <새드 배케이션>을 찍은 뒤 내 아이디어가 바닥이 났고, 결국 그 후로는 함께 작업을 더 할 수 없었다. 

정재은 어떻게 보면 다무라 마사키가 하고 싶은 게 많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유연한 젊은 감독들과의 작업을 선호한 게 아닐까? <유레카>나 <헬프리스>를 보고 있으면 이 숏은 왠지 현장에서 촬영감독이 바로 구상한 숏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아오야마 신지 <헬프리스>를 찍을 때 내 의견과 다무라 마사키의 의견이 달랐던 적이 있다. 당시 프로듀서는 우리가 등을 돌리고 있는 것 같다는 얘기까지 했었다. 우리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비전을 정해놓은 게 아니라, 다무라 마사키와 내가 각자 다른 무언가를 찾고 있는 느낌이었다. 배우들의 연기를 어디에서 어떻게 찍느냐, 하는 문제를 아슬아슬한 상황이 올 때까지 정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런 상황은 <새드 배케이션>까지 쭉 이어졌다. 아무것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현장에 도착한 다음 그때 뭘 할지 매번 새롭게 정하는 식이었다.

내가 다른 촬영감독과 일했다면 이런 식으로 못 했을 것이다. 사전에 세운 계획대로 찍는 촬영감독과 함께 했다면 나 역시 작업 방식을 바꿔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촬영감독 중에는 본인이 직접 콘티를 그리는 사람도 있지만 다무라 마사키는 콘티를 미리 만들지 않았다. 그랬기에 나 역시 이런 작업 방식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정재은 그러면 준비 과정이나 현장에서 굉장히 많은 대화를 나눴을 것 같다. 촬영 시간이 길어진다거나 스탭이 대기해야 하는 등 여러 문제가 있었을 것 같은데, 현장 분위기는 어땠는지 궁금하다.

아오야마 신지 우리들은 굉장히 빠르다(웃음). 항상 정시에 끝낸다는 걸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해가 지기 전에는 낮 장면을 반드시 끝내고, 해가 뜨기 전에는 밤 장면을 반드시 끝냈다.

정재은 <유레카>는 긴 영화인데, 총 몇 회차로 찍었나?

아오야마 신지 42일 걸렸다.

정재은 대단하다(웃음).

아오야마 신지 빨리 촬영을 끝내고 다무라 씨와 맥주를 마셔야 했기 때문에 빨리 끝낼 수밖에 없었다.

정재은 일본 영화 현장에는 그림 콘티가 거의 없는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걸 고려해도 이렇게 빨리 찍은 거면 현장에서 모든 판단을 굉장히 빨리 했을 것 같다. 

아오야마 신지 우리들의 사이가 좋아서 그렇게 빨리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식으로 바로 실행이 됐다. 다만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서 ‘미팅’이란 이름의 술자리가 굉장히 많았다. 그때 얘기를 미리 많이 해두었기 때문에 현장에서는 이심전심이었다. ‘그때 술 먹을 때 이렇게 얘기했었잖아요’라고 하면 ‘아 그랬지’라며 작업을 했다. 촬영 전에 아이디어가 거의 전부 나왔었다. 콘티는 없었지만 머리 속에는 계획이 모두 잡혀있었던 거나 마찬가지였다.

정재은 구체적인 장면에 관한 질문을 하고 싶다. 코즈에와 나오키가 가출할 때, 집 안에 카메라가 있고 집 밖으로 떠나는 엄마를 보여준다. 코즈에와 나오키가 대화를 나누지만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고 목소리가 보이스 오버로 나온다. 당시 어떤 논의를 했는지 듣고 싶다.

아오야마 신지 사실 잊어버렸다(웃음). 하지만 분명한 건 시나리오 단계에서 그런 연출이 이미 결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현장에서 시나리오를 고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시나리오를 수정하기 시작하면 영화가 끝나지 않는다. 다만 편집 과정에서 찍었던 장면을 없애는 경우는 있다. <유레카>는 시나리오에 있는 걸 모두 찍었더니 1차 편집본이 5시간이 나왔다. 그 후 1시간 30분 정도를 잘라서 지금의 러닝타임이 나왔다. 

다만 보이스 오버는 녹음한 걸 거꾸로 돌렸다가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는 과정을 거쳐 조금 매만졌다. 아마 조금 기묘하게 들렸을 것이다.

정재은 <유레카>에서 오프닝의 버스 납치 시퀀스는 거의 황홀한 느낌을 준다. 한 숏으로 버스 승객과 경찰까지 찍는데, 이때 카메라가 꽤 심하게 흔들린다.

아오야마 신지 그렇게 긴 크레인을 움직이면 당연히 카메라가 흔들린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괜찮지 않나’라고 생각했다. 그때 다무라 마사키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래도 괜찮지 않겠어?’ 이런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웃음). 전력질주하는 배우들을 따라가면 당연히 카메라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당시 안 흔들리게 찍는 건 어떨까 고려도 했지만, 결국 이렇게 찍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를 돌아보면 ‘집착하지 않는다, 완벽을 추구하지 않는다’의 느낌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오히려 <헬프리스>는 완벽을 추구했었는데, 이건 젊은 혈기에서 오는 고지식함이었던 것 같다. <유레카> 이후에는 그런 완벽에 대한 이상한 집착을 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경쾌하게 찍기 시작했다. 다무라 마사키가 말했던 ‘무엇무엇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없다’는 사상(사상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줬던 것 같다.

내가 ‘다무라 주의’라고 이름을 붙이면 다무라 씨는 그런 이름 붙이지 말라고 화를 내겠지만, 우리는 결국 ‘다무라 주의’의 계승자가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관객 1 감독님의 초기작을 보면 미국 영화에 나올 것만 같은 풍경이 많이 보인다. 이를테면 <헬프리스>는 필름누아르, <유레카>는 서부극의 모뉴먼트 밸리의 풍경이 떠오른다. 그런데 최근의 영화인 <동경 공원>(2011), <도모구이(共喰い)>(2013) 등을 보면 ‘일본 영화’ 같은 풍경이 보인다.

아오야마 신지 나는 미국 영화, 특히 서부극을 정말 좋아한다. 다무라 마사키와 영화 얘기를 할 때도 마지막에는 서부극 이야기로 샐 때가 많았다. 최근 내 영화에서 ‘일본 영화’의 풍경이 많이 등장한다는 말은 다른 자리에서도 많이 듣는다. 촬영감독과 미국 영화 이야기를 거의 안 하게 된 것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친구들과는 여전히 미국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만 현장에서는 거의 그러지 못한다(이런 게 일본 영화의 마이너함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단순하게 연출하는 스타일이라서 현장에서 ‘카메라를 확 당깁시다’, ‘카메라를 팍 놓읍시다’ 식의 말을 많이 한다. 이때 다무라 마사키는 바로 호응을 해준다. 하지만 최근 작업을 함께하는 사람들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달라고 한다. 그렇게 설명을 하다 보면 왠지 결과물이 ‘일본 영화’처럼 되어버리는 느낌이다. 

관객 1 <유레카>의 마지막에는 바다 장면이 나온다. 일본 영화에서 바다는 죽음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런데 <유레카>에서 바다를 찍은 숏은 앞에서 나온 장면들보다 길이가 짧게 느껴진다. 그리고 코즈에가 백사장에서 걷는 장면은 바다가 마치 빛에 잠식된 것처럼 보인다. 이때 물을 어떻게 찍을지 촬영감독과 어떤 논의를 했는지 궁금하다.

아오야마 신지 그렇게 찍은 가장 큰 이유는 이 장면이 정서적으로 보이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바다를 찍을 때 제일 피하고 싶은 게 수평선을 보여주는 것이다. 수평선이 찍힌 장면을 보기만 해도 어디론가 끌려가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코즈에가 해변을 걸을 때도 최대한 짧게 찍고 싶었다. 

이 장면은 바다에 뗏목을 띄워서 바다에서 해변을 바라보는 식으로 찍었다. 꽤 큰 뗏목을 직접 만들어 촬영을 했는데, 떠내려갈까 봐 그렇게 먼 거리를 확보할 수는 없었던 기억이 있다. 

정재은 마지막으로 간단한 질문인데 <유레카>를 극장에서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궁금하다.

아오야마 신지 좀 아픈 데를 찌르셨다(웃음). 정재은 감독도 잘 알겠지만 영화를 편집할 때 몇십 번씩 보기 때문에 ‘더 안 봐도 괜찮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유레카>는 프린트에 따라 색깔이 조금씩 다르다. 프린트에 따라 모노크롬에 세피아 빛이 도드라지는 경우가 있고, 보라색 빛이 도드라지는 경우도 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 당시 만들었던 8벌의 프린트를 다 일일이 봤었고, 그 후로는 별로 본 적이 없다. 마지막으로 본 건 10년 전쯤 포르투갈의 리스본이었다.

정재은 <유레카>는 젊은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고, 지금 한국 사회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지는 영화란 생각이 든다. 하나의 숏에 대한 열정이 모여 만들어진 영화인 것 같다. 좋은 영화 만들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다.

아오야마 신지 감사합니다(한국어로).

 

일시 2019년 9월 7일(토) <유레카> 상영 후

정리 김보년 프로그래머

사진 목충헌 자원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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