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라 무라토바(감독)

[키라 무라토바 회고전]

비타협적인 작가, 키라 무라토바

 

소비에트 영화사에서, 그리고 소련 붕괴 후에도 키라 무라토바는 ‘부조리한 영화’, ‘역설의 영화’의 작가감독으로 규정되곤 했다. 과거 루마니아(현재의 몰도바)에서 태어났지만 대부분의 영화활동을 우크라이나 오데사에서 했고, 스스로도 자신을 우크라이나인으로 여긴 무라토바의 경력 역시 복잡하고 다중적인 창작 배경으로 거론되곤 했다. 언제나 가장 첨예한 사회적 문제들을 영화적 소재로 삼고, 잔인하고도 비도덕적인 주제들에 대해 과감하게 다루어 온 무라토바 영화의 주제를 한 비평가는 ‘지상의 지옥’이라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까지 했다. 일단의 비평가들은 키라 무라토바의 영화가 소련 붕괴 전후 사회적 문제에 대해 가장 전위적이었던 ‘체루누하’ 영화 미학에 집착하고 있다고 치부하지만, 무라토바 영화의 지속적이고 일관된 스타일은 단순히 작가영화라고 규정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함축하고 있다. 

1934년 당시 루마니아 영토였던 베사라비아 지방 소로카 시에서 루마니아 공산당 지하 지역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아버지 유리 알렉산드로비치 코로트코프와 유태인 어머니 나탈리야 이사코브나 사이에서 태어난 키라의 본래 성은 코로트코바(Korotkova)였으나, 영화학교 동창이자 첫 남편인 알렉산드르 무라토프와 결혼하면서 남편의 성을 따라 무라토바가 되었고 이혼 후에도 무라토바라는 성을 유지했다.

키라 무라토바가 처음 영화를 접한 것은 루마니아(현 몰도바)에서였다. 독소전쟁 직전 수립되어 소련연방의 구성원이 된 몰도바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의 문화성 관료였던 어머니 사무실에 자주 가있던 소녀 키라는 문화성 내 외국영화들만 상영하는 별도의 상영관에서 외국영화들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문화성이 제공한 특별통행증이 있으면 부카레스트의 모든 영화관에 출입할 수 있었고, 소녀 시절 키라 무라토바는 방과 후 늘 영화관으로 달려가곤 했다고 회상한다.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모스크바국립대학교 인문학부에 입학한 키라는 영화에 대한 열망으로 다시 국립영화학교에 입학하여 영화감독 세르게이 게라시모프와 타마라 마카로바의 지도로 1959년 감독과를 졸업했다. 

1961년부터 오데사 영화사에서 감독으로 일하기 시작한 키라는 첫 남편 알렉산드르 무라토프와 영화 <깊은 계곡에서>(1962)와 <우리의 정직한 빵>(1964)을 공동 감독하며 영화계에 데뷔했고, 1967년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주연을 맡은 첫 단독 감독작 <짧은 만남>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특히 <짧은 만남>은 침체기 소비에트 사회 지성인의 양심으로 추앙받던 음유시인 블라디미르 브이소츠키가 주연을 맡아 더욱 주목받았으나, 섹스나 간통 장면을 그대로 노출하고 부도덕한 남녀의 삼각관계를 다루는 등 소비에트 사회의 민감한 도덕적 문제를 첨예하게 대두시키면서 대중 상영 금지 처분을 받았으며, 20년 후 페레스트로이카 시기가 되어서야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이 작품 이후 키라 무라토바는 줄곧 러시아 사회의 억압적이고 부조리한 현실을 폭로하는 문제의식과 특유의 파편화된 미학적 구성을 일관되게 고집했다. 다음 감독작 <기나긴 이별>(1971) 역시 점프 컷, 동시 녹음, 현장 로케 등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의 전형적인 스타일로 인해 ‘부르주아 엘리트 미학’으로 낙인찍혀 페레스트로카 시기까지 대중들에게 상영되지 못했다. 연이은 문제작으로 인해 오데사 영화사 감독진에서 제외된 무라토바는 오데사를 떠나 7년의 공백을 깨고 영화사 ‘렌필름’에서 만든 유일한 영화 <드넓은 세상을 알아가며>(1978)를 발표했다. 하지만 무라토바 영화에 대한 검열은 더욱 강화되었고, 오데사 영화사로 돌아가 제작한 다음 영화 <흰 돌더미 가운데>(1983)는 부적절하다고 판단된 장면들이 가차없이 삭제된 채 상영되어 키라 무라토바는 영화 크레딧에 자신의 이름이 포함되는 것을 거부하기까지 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소련연방 말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무라토바에게 어느 정도 자유로운 창작의 자유가 주어졌고, 무라토바의 원안대로 <뒤바뀐 운명>(1987)과 <무기력 증후군>(1989)과 같은 문제작이 연달아 발표되었다. 1990년 베를린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무기력 증후군>은 내용은 물론 형식미학 모두에서 무라토바 영화 중 가장 무라토바적이라고 평가받으며, 비평계와 관객 모두에게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2부로 구성된 이 영화의 1부는 흑백으로, 2부는 컬러로 촬영되었으며, 2부의 관객들이 영화관에서 관람하는 영화가 결국 이 영화의 1부라는 것이 드러나는 독특한 구성을 갖고 있다. 무라토바는 이러한 구성을 통해 러시아가 결국 정신적으로 파멸한 광인들의 거대한 집합체라는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다.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수상한 덕분에 소련 내 개봉이 허용된 이 영화는 소비에트 영화에서 삭제되지 않고 욕설이 그대로 나온 첫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취미>(1994)는 키라 무라토바의 뮤즈라 평가받는 배우 레나타 리트비노바와의 첫 영화 작업이었다. 애초 <취미>의 시나리오에는 리트비노바의 배역이 없었는데, 리가 영화제에서 리트비노바를 처음 만난 무라토바는 리트비노바의 밝은 금발과 개성 있는 외모, 독특한 화법 그 자체가 표현력이 풍부한 영화 오브제라고 판단하여 즉시 영화 출연을 제안한 후 리트비노바 배역을 추가했다. 이때부터 레나타 리트비노바는 <세 가지 이야기>(1997), <피아노 조율사>(2004), <하나 안의 둘>(2006), <따뜻한 멜로디>(2009), 그리고 무라토바의 유작 <영원 회귀>(2012)에 이르기까지 배우로 출연하는 동시에, 공동 시나리오 작가로도 참여하며 무라토바 영화의 가장 절친한 영화 파트너가 되었다. 말에 몰두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평면적으로 나열한 영화 <취미>는 배우 레나타 리트비노바를 러시아 영화계가 주목하도록 했으며, 이때부터 레나타 리트비노바는 <세 가지 이야기>에서 오펠리아의 이미지를 역설적으로 구현한 ‘오파’로 등장하는 등 무라토바 영화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인 남성 지배적 권력 담론과 영화 관습을 무력화시키는 적극적, 공격적 여성성의 표상이 되었다. 이에 대해 영화학자 미하일 얌폴스키는 사회의 금기와 자동화된 관습을 전복하기 위해 무라토바가 ‘공격적 여성성 vs 무력한 남성성’이라는 역전의 메커니즘을 사용한 것으로 평가한다. 

무라토바 영화 미학의 가장 핵심적인 파편화된 서사 역시 시간을 압축하여 제시함으로써 관객을 현실적, 실존적 시간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관습적 영화전통에 대한 전면적 도전이라는 측면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 미학적 구조는 무라토바의 이후 영화들, <세 가지 이야기>(1997), <이류 인간들>(2001), <체홉의 모티프>(2002), <피아노 조율사>(2004),<하나 안의 둘>(2006), <따뜻한 멜로디>(2009), <영원 회귀>(2012)까지 일관되게 이어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무라토바의 영화를 단순히 부조리의 영화, 사회의 추함과 잔인함을 고발하는 차원에서 규정하는 것은 무라토바 영화가 함축하는 바를 지극히 한정적으로 축소하는 것이다. 무라토바의 영화는 언제나 가장 외면하고 싶은 불가해한 시간의 현장 한복판에 관객을 위치시킨다. 의미없이 반복되는 단말마적인 대사와 알아들을 수 없이 웅얼거리는 장황한 독백만이 아니라, 충동적이고 불가해한 행동과 폭력, 영화 서사와 무관하게 돌출되고 파편화되어 ‘낯설게하는’ 기이한 이미지들, 급작스러운 점프컷 등, 그 모두는 매끄럽게 압축된 ‘시간의 엑기스’ 대신 ‘날 것 그대로의 시간’을 관객에게 정면으로 응시하도록 한다. 그 부도덕함과 추함의 현장 한복판에 던져진 관객들은 결코 객관적 관람자의 위치에 머물 수 없고, 자신의 실존적 삶에서 경험한 소통 불가능, 사회구조의 부조리함, 추함과 부도덕한 순간들이 침잠된 내면의 기억을 응시하는 또다른 시선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평상시에는 아주 침착하고 온화했지만 촬영 현장에서나 영화 제작에서는 자신의 원칙을 고집 있게 추구하며 비타협적이던 무라토바는 레나타 리트비노바와 함께 올렉 타바코프, 알라 데미도바, 세르게이 마코베츠키 등 러시아 명배우들이 대거 참여한 영화 <영원 회귀>를 마지막으로 영화 활동 은퇴를 공식 선언했다. 그 후 인터뷰에도 거의 응하지 않고 회고록 집필도 거절하며 자신의 영화적 고향인 오데사에서 은둔하던 무라토바는 2018년 6월 6일 8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이희원 교수(상명대학교 글로벌지역학부)

<무기력 증후군>(1989)

키라 무라토바의 <무기력 증후군>과 전환기 소련 사회의 이상한 현실 - 이반 코즐렌코 평론가, 이희원 교수 강의

이반 코즐렌코(알렉산더 도브젠코 센터 원장, 영화평론가) <무기력 증후군>은 어려운 영화인데 많은 관객들이 찾아주어 기쁘다. 오늘은 이 작품의 역사적, 정치적 맥락에 관해 짧게 이야기하겠다. <무기력 증후군>은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소련 영화사에서도 의미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1989년에 만들어졌는데, 당시 새로운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던 파괴적 현상들에 대한 직접적 반응을 보여준다. ‘정말 당시 사회가 저랬을까?’란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80년대 말 소련은 정말 비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회였다.

 

글라스노스트와 전환기의 영화

<무기력 증후군>을 포함해 당시 우크라이나에서는 이런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졌고, 이를 ‘전환기의 영화’라고 부른다. 알다시피 소련에서는 영화 미학으로 ‘리얼리즘’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소련이 해체되기 시작하며 새로운 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 흐름 중 하나가 리얼리즘에서 벗어나기였다. <무기력 증후군>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줄거리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새로운 내러티브를 구성했다. 이게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전환기의 영화는 보통 1986년부터 1995년 사이에 나온 영화들을 일컫는다. 1986년에는 소련의 정치적 제도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바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선언한 글라스노스트 정책이다. 이를 통해 일반인뿐 아니라 예술가들도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기회를 얻었다. 이 기회 자체가 소련의 붕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람들에게 표현의 자유가 주어지자 기존에 숨겨져 있던, 알지 못했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소련의 절대주의적 공산주의 체제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글라스노스트 정책이 발표된 뒤 2년 동안 소련 사회는 급속한 변화를 맞았다. 80년대 초반, 글라스노스트 이전 사람들은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믿음이 있든 없든 체제의 규칙을 따라야 했다. 공산당 회의 참석, 노동절 행진 참석 등 필수적으로 부과되는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글라스노스트 이후 이런 형식적 규칙을 더 이상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결국 사람들은 공산주의 체제는 더 이상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텅 빈 형식에 불과한 체제란 걸 파악하게 됐다. 굳이 이런 체제를 따를 의무가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86년에는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건이 일어나며 공산주의 체제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글라스노스트 정책에 의하면 공산주의 정부는 국민에게 어떤 것도 숨겨서는 안 됐다. 하지만 정부는 체르노빌 사건 이후 최소 2주 동안 정보를 숨겼다. 나는 체르노빌 사건이 소련 체제의 종말을 알렸다고 생각한다. 국민들은 글라스노스트 역시 하나의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걸 눈치 챘고, 겉으로는 나라가 발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됐다. 노동절 행진도 언급하고 싶다. 체르노빌 사건은 4월 26일에 일어났는데, 정부는 5월 1일의 노동절 행사에 국민들의 참여를 강요했다. 자신들의 핵 기술을 홍보하기 위해 국민들을 희생시킨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결국 시민 운동, 환경 운동 등 여러 영역에서 정치적 저항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소련 정부의 가장 큰 무기는 공포였는데 시민들이 더 이상 공포를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소련 체제 내 검열이 많이 약해졌고, 그러면서 <무기력 증후군> 같은 영화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무기력 증후군>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거부했고, 단적으로 성인들의 나체도 등장한다. 그리고 영화 안에 소련 체제의 여러 상징이 많이 보이지만 이 상징은 이미 죽은 것으로 그려진다. 인물들의 모자에 고르바초프의 사진이 있다거나, ‘피오네르’(소년 공산당원의 모임)의 뱃지를 던지는 것 등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소련 정부에서 실제로 검열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새로운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또한 당시는 소련이 완전히 붕괴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앙정부에서 영화를 제작할 예산도 아직 나오고 있었다.

이후 1991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 독립하고 1992년에는 시장경제 체제로 변환했다. 그러면서 중앙화되어 있던 시스템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동시에 영화 제작과 배급 시스템도 무너졌다. 1995년부터는 더 이상 정부에서 영화 제작을 지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1995~6년 이후에는 거의 15년간 우크라이나에서 영화가 제작되지 않는 암흑기가 찾아왔다.

 

분노하거나 잠들어버린 사람들

이런 배경 속에서 <무기력 증후군>이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1부는 흑백으로 나오는 영화 속 영화이고 2부는 컬러로 만들어진 현실 부분이다. 하지만 1부는 허구이면서도 리얼리즘적 톤으로 찍혔고 2부는 현실이지만 비현실적으로 찍혔다. 주인공도 갑자기 사라지고, 줄거리가 끊어졌다가 다른 줄거리가 등장한다. 시청각적으로 불편한 화면, 사운드도 많이 등장한다. 나는 이런 부분이 당시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 생각한다. 소련 사람들은 이제 자유를 얻었는데 이걸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기존의 가치관도 무너져 뭘 해야 할지 몰랐다. 당시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 속에는 대화 같은 대화가 나오지 않는다. 인물들은 각자 할 말만 하고 상대는 그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1부의 나탈랴가 선택한 잔인한 공격성이고, 또 하나는 2부의 니콜라이가 보여주는 ‘얼어붙어버리기’이다. 영화의 주인공 니콜라이는 교사이자 작가로서 책을 쓰고 싶지만 실천에 옮기지 못한다.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있는 걸 힘들어하고 주위 사람들을 혐오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잠에 들어버린다. 그게 비논리적이고 비현실적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다.

영화에는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장면도 나온다. 때로는 이 공격성이 지나치게 그로테스크해 보이기도 하지만 자신들이 믿고 있던 모든 게 무너지는 상황에서 이를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할 때 취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공격성이다. 그런 상황을 해결하려면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이들은 소리 지르며 내뱉기만 한다. 하지만 들어보면 알겠지만 이 주장에는 이상만 있고 핵심이 없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들으면 바로 알 수 있지만, 이들은 부자연스럽게 말하고 행동하는 중이다. 유일하게 내용이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은 니콜라이지만 그는 많은 시간 잠들어있다.

이희원(교수) 키라 무라토바는 2000년대 초반에 처음 접했다. 감독이 소련 시절 만든 영화들은 <짧은 만남> 정도를 제외하고는 다들 페테스트로이카 시기에 뒤늦게 공개됐다. 당시에도 이 병리적이고 우울한 분위기는 어디서 만들어진 것일까 많이 고민했었다. 물론 시대적 징후도 있을 것이고, 무라토바의 독특한 이력(루마니아, 몰도바, 소련,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을 오갔던 복잡한 전기적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등 동시대 우크라이나 감독들과의 교류도 중요하다. 하지만 키라 무라토바의 영화는 결국 소련이라는 사회적, 정치적 제도의 정체성에서 해석할 때 특히 흥미로운 것 같다.

<무기력 증후군>은 페테스트로이카 이후 소련 사람들이 겪었던 분노, 삶의 정체성, 세계관이 무너지는 중 대중들이 느낀 심리적 경향을 총체적으로 압축시킨 작품이라 생각한다. 무기력을 개인만 겪었다면 ‘신드롬’이 되진 못했을 것이다. 나도 오늘 이 영화를 보며 많이 고통스럽고 미칠 것 같았는데, ‘무기력’이란 말을 요즘 언어로는 ‘분노’와 연결시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반 코즐렌코 무라토바가 왜 기존의 리얼리즘을 거부했는지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다. 소련 시절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지배적 미학이었고, 이를 통해 국민들에게 이데올로기를 강요했다. 하지만 소련이 무너질 때 쯤에는 리얼리즘이 더 이상 설득력이 없었다. 그래서 무라토바는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찾았고, 적극적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벗어나려 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프라우다』(진실)라는 신문에 가장 많은 거짓이 실렸다. 예술가로서 자신의 진실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소통 방법을 찾아야 했다.

관객 영화 전반적으로 베토벤이나 바그너를 연상시키는 클래식 음악이 많이 쓰인 것 같다.

이반 코즐렌코 좋은 지적이다. 이 영화에서는 슈베르트의 음악이 많이 쓰인 걸로 알고 있다. 사실 키라 무라토바는 자신의 영화에서 클래식을 쓰지 않았고, 이 영화가 예외에 속한다. 이는 현실과 영화를 대비시키기 위해서다. 고전주의 클래식 음악에는 어떤 규칙이 존재하는데 현실에는 어떤 규칙도 없고 혼란스럽기만 하다. 클래식 음악이 이런 현실을 더 역설적으로 잘 보여준다.

또한 무라토바는 좀 더 관습적인 내러티브를 따르는 영화에서는 반대로 아방가르드 음악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기나긴 이별>이나 2000년대 이후 작품에서는 굉장히 독특한 음악을 만드는 음악가들과 작업했다. 이렇게 실험적 음악을 많이 사용한 건 영화의 고전적인 흐름을 파괴하기 위해서였다. 그럼으로써 무라토바는 현실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일시 2019년 11월 3일(일) <무기력 증후군> 상영 후

정리 김보년 프로그래머

사진 김서연 자원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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