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즈베니고라>의 사실적 환상: 움직임에서 간격으로, 간격에서 시선으로





<즈베니고라>를 통해 도브젠코 영화가 가진 정치적 의미에 관해 말할 수 있고, 어쩌면 마땅히 말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내게 <즈베니고라>에의 매혹은 의미를 읽어낼 만한 이야기가 채 당도하기 전, 사운드와 이미지가 뭉뚱그려진 최초의 순간에 시작됐다. 영화는 말을 탄 남자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이야기의 맥락에서 그는 보물을 노리는 도적이었지만, 그는 내게 선인이나 악인 이전에 그냥 말을 탄 사람으로 도착했다. 그의 움직임은 영화의 기원과 맞닿아 있는 근원적 운동성을 떠올려 보게 한다. 그러므로 영화적 기법, 특히 운동성에 관한 순수한 매혹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보고 싶어졌다.

태초에 텅 빈 숏으로서의 프레임이 있었다. 텅 빈 숏이 있었기에 말 탄 사람은 비로소 숏 안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아니다. 말을 탄 사람이 숏 안으로 뛰어든 것이 아니라 카메라가 그들을 숏 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니까 ‘없음’(비어 있음)이 곧 ‘있음’을 만들었다. 슬로 모션은 말 탄 사람들이 숏 안에 사로잡히게 한다. 이때 슬로 모션은 역동성을 보존하는 것으로서 움직임을 박제화한다. 박제된 역동성 혹은 역동적인 박제화라고 불러도 좋을 이 움직임은 카메라 너머 관객을 제 편으로 끌어오기 위해 거는 주술이다. 이 주술은 관객이 이들의 의기양양한 모험 이미지에 꼼짝없이 붙들리게 한다.

고정된 숏과 슬로 모션이 두드러진 도입부는 영화의 기원부터 발발한 영화적 움직임에 대한 매혹을 재사유하게 한다. 19세기에 제작된 마이브릿지의 연속 사진은 그저 인간 혹은 동물의 움직임을 쪼갠 뒤 이를 길게 이어붙인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의미, 스타일 등을 걷어내고 순수한 운동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운동을 만들어내는 것은 움직임 자체가 아니라 움직임과 움직임 사이의 간격이다. 간격이 그 사이의 일정하고도 뚜렷한 변화를 존재하게 한다. 움직임은 찍힌 사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없음, 그러니까 그 간격 위에 존재한다. 간격과 운동에 대한 사유를 통해 최근에 매혹된 운동에 관해 설명할 하나의 단서를 얻었다. 나는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2014)에서 퀵 실버의 움직임에 매혹되고 말았는데 그는 너무 빠른 나머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의 움직임이 순간이동으로 지각된다. 영화는 단 한 번 그가 찰나를 어떻게 쪼개 쓰는지를 슬로 모션으로 보여준다. 이때 슬로 모션은 속도감을 지각하게 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다른 사람들과 그들을 둘러싼 것들은 정지한 것처럼 보이고 퀵 실버는 그 순간을 신나게 떠돈다. 이때의 시공간은 우리가 부재한 것이라고 간주한 간격 위에 존재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간격을 본 것이 아니라 간격이 우리를 바라본다.



<즈베니고라>에서 간격은 성배가 깨진 유리잔으로 바뀌는 식의 마술적 트릭으로 작용하는 듯 보인다. 그런데 단순하게 보이던 마술적 트릭은 악마의 등장으로 인해 분화한다. 육화된 마술로서의 악마는 실제적 공간인 땅속에서, 실제적 움직임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 악마가 사라진 다음 컷은 한데 누워 미동도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들은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장면 때문에 악마의 존재 방식은 교란된다. 사람들은 그저 꿈을 꾼 것인가? 그렇다면 깨어난 사람들이 말을 타고 서둘러 떠나는 숏에서 중첩화면으로 겹쳐진 악마의 모습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악마는 마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화면 상단 중앙에 위치한다. 악마가 점하는 곳이 만약 꿈이나 기억이라면 그것은 누군가의 것이 아닌 집단적인 것이다. 그는 어디도 아닌 그저 스크린이라는 얇은 막에 위치한 것처럼 보인다. 악마는 외부이자 내부인 하나의 얇은 막을 창조하며, 그곳에 기거한다. 막은 악마와 함께 있음과 없음 사이에 존재한다.

악마가 다시 등장하는 것은 노인의 꿈속이다. 노인이 한쪽에서 꿈을 꾸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손자 파블로가 비눗방울을 불고 있다. 비눗방울이 노인의 얼굴에 닿아 터지면서 노인은 잠에서 깬다. 노인은 방금 자신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비눗방울을 악마의 존재라고 믿는다. 비눗방울은 얇은 막 그 자체이다. 그것은 만지려고 하면 눈 깜짝할 사이 사라진다. 비눗방울은 존재의 방식을 재고하게 한다. 비눗방울의 시선에서 본다면, 존재했던 것이 찰나의 간격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 노인의 꿈을 통해 매개된 악마와 비눗방울은, 존재와 비존재의 간격이 어쩌면 얇은 막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추상적인 관념을 통해서가 아닌 실제적 사물을 통해 보여준다.

얇은 막은 회상 장면에서도 다시 한 번 등장하는데 이때 회상의 주체가 교란된다. 노인은 손자에게 오래전 마을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때 회상장면은 원경으로 흐릿하게 처리되어 있어 마치 기억의 겉껍질을 시각화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얇은 막(간격)에서 느껴지는 것은 어떤 시선이다. 그것은 아마 노인의 기억 속 시선인 것 같다. 그런데 이야기가 다시 현재의 시점으로 돌아오는 지점은 상념에 잠긴 노인의 얼굴이 아닌 손자의 얼굴이다. 이런 장면 처리는 기억의 시선이 누구의 것이었는가를 의심하게 한다. 어쩌면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손자가 상상한 것일 수도 있다. 시선의 주체는 노인일 수도, 손자일 수도, 아니면 노인에게서 손자에게로 변화했을 수도 있다.

때로 누구의 것도 아닌 시선을 영화는 보여준다. 전쟁이 일어나 마을의 건장한 남자들은 징집되고 그 사이 마을에는 국토 개발 사업이 진행된다. 이때 불길한 상징처럼 윗부분이 불균질하게 부러져 나간 나무 하나가 여러 사물들 가운데서도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다. 감독은 마치 깨진 나무의 시선에서 사람들의 동태를 지켜보는 듯한 숏 하나를 집어넣는다. 깨진 나무 속 텅 빈 공간의 시선은 결국 부재한 것의 시선, 즉 명백한 카메라의 시선이다. 카메라의 시선은 주체 없는 시선을 가능하게 한 하나의 텅 빈 신체다. 문명의 기관차는 카메라가 육화된 존재처럼 강렬하게 등장한다. 기관차는 개발의 상징물이자, 보물을 손에 넣으려는 도적떼이자, 악마이다. 기관차는 도적들이 나타난 방향에서 연기를 뿜으며 노인을 향해 마주 온다. 열차-카메라의 얼굴은 모호하다. 분명한 건 무비 카메라는 여전히 존재에 앞서,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거대한 무無라는 것이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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