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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시네마테크 재개관 특별전 - 장 으스타슈 & 모리스 피알라

[시네토크] “장 으스타슈의 말은 살아 있다” - 장 으스타슈의 <엄마와 창녀>

“장 으스타슈의 말은 살아 있다”

- 이나라 시네토크

러닝타임이 3시간 30분이 넘는 <엄마와 창녀>는 그만큼 많은 말들이 나오는 영화다. 4월 25일(토), 이나라 이미지문화 연구자가 <엄마와 창녀>를 함께 본 뒤 으스타슈의 말이 갖는 특징에 대한 강의를 진행했다. 그중 일부를 정리해 옮겨보았다.




이나라(이미지문화 연구자)│오늘 시네토크의 제목은 “장 으스타슈와 육화된 언어”이다. 장 으스타슈 스스로 이 영화를 ‘말에 대한 영화’라고 설명했듯이 <엄마와 창녀>는 말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영화이다. 먼저 그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그는 1938년, 페삭이라는 프랑스 남쪽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프랑스는 파리와 파리가 아닌 지역의 경제-문화적 격차가 비교적 큰 편인데, 그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는 자전적 영화인 <나의 작은 연인들>을 보면 대략 알 수 있다. 그는 고등 교육을 받지 못했고, 파리로 간 것도 기술을 배운 뒤 철도청에서 일하기 위해서였다. 즉 장 으스타슈는 당시 누벨바그 세대와 비교했을 때 소외감을 느낄 만한 환경에서 자랐다. 영화에서 장 피에르 레오가 연기한 알렉상드르도 자신이 가진 것이 별로 없음을 여러 번 강조한다. 가난하고 배운 게 없고, 문화적 자본도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자기가 파리의 부르주아와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으스타슈의 주인공이 펼치는 말의 향연은 ‘배운 사람’의 말과는 다르다.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는 에릭 로메르의 영화 속 말과는 다른 맥락을 갖는 것이다. 작가, 교수 등 지식인을 대표하는 에릭 로메르의 남자 주인공은 책에 쓰인 말을 한다. 물론 알렉상드르도 책과 신문 등에서 여러 번 인용을 하기도 하지만 이것이 모두 본래의 의미를 가져오는 건 아니다. 그의 대사에서 중요한 건 의미가 아니라 ‘연극성’이다. 특히 독백을 할 때 드러나는 매우 과장된 어조를 보자. 불어를 아는 관객은 눈치 챘겠지만 영화 속 알렉상드르의 말투는 일관적이지 않다. 연극적으로 말할 때도 있고 적나라할 정도로 사실적인 어투를 쓰기도 한다. 그에게는 말의 의미보다 목소리와 어투, 나아가 말의 현장성이 중요하다. 알렉상드르가 라디오의 설교를 흉내 내는 장면이 그 대표적 예이다. ‘표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에릭 로메르, 또는 홍상수 영화와 장 으스타슈 영화의 차이가 발생한다. 종종 에릭 로메르의 영화는 욕망에 대한 논평처럼 느껴지고는 한다. 하지만 으스타슈의 인물들은 욕망을 논평하는 대신 그 한복판에 놓인 사람들이다. 때문에 으스타슈 영화의 목표는 에릭 로메르처럼 위선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계속해서 무언가를 욕망하며,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말을 통해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려 한다.



이나라(이미지문화 연구자)


<엄마와 창녀>가 개봉한 뒤 이 영화의 말이 많은 화제가 됐고, 결국 시나리오집도 따로 출간됐다. 이를 바탕으로 연극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책과 연극은 영화의 매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써져 있는 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말의 현장성과 그 현장성을 살린 영화의 연출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현장성’을 살리기 위해 감독이 즉흥 연출을 시도한 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장 으스타슈는 즉석에서 만들어내는 애드립을 매우 싫어하는 감독 중 한 명이었다. 개봉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즉흥 연출에 대해 물어봤지만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쉼표 하나까지 시나리오에 모두 적혀 있었다고 대답했다. 당시는 즉흥 연출, 즉흥 연기에 대한 시도가 이미 충분히 이루어진 시기였지만 감독은 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참고로 이번 달 『카이에 뒤 시네마』의 테마가 ‘안티 매뉴얼 Anti-manuel’이다. 매뉴얼에 맞춘 영화 제작과 시나리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것인데, 알다시피 정말 훌륭한 영화들은 기존의 ‘알고리즘’을 벗어난 시나리오에서 만들어진다. <엄마와 창녀>에 드러난 대사들도 절대 매뉴얼을 따라 해서 나온 게 아니다. 영화 속 알렉상드르는 “나의 자유는 남의 말을 훔치는 것이다”란 말을 한다. 이 말은 정답, 또는 매뉴얼에 대한 거부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으스타슈는 이 영화에서 매뉴얼, 즉 말의 의미를 좇기보다는 말의 즉각성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이런 특징이 잘 드러난 영화 속 소품이 앞에서 말한 라디오이다. 라디오의 설교를 따라하는 알렉상드르에게 그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라디오 방송의 말투를 따라하는 것이 그 자체로 유의미한 것이다. 반면 라디오와 대립되는 소품은 영화 속 책과 신문이다. 알렉상드르도 그렇고 그의 친구들은 항상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같은 책을 손에 들고 다닌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또는 읽지 못한다). 읽어도 몇 장만 읽다가 다시 대화로 넘어가는 식이다. 심지어 이 영화에서 신문이 하는 가장 큰 역할을 정보 전달이 아니라 주인공들의 얼굴을 가리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 영화의 말은 단지 의미를 담는 도구가 아니라 감각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 이 영화는 ‘언어는 의미, 이미지는 감각’이란 식의 이분법을 따르지도 않는다. <엄마와 창녀>의 말은 진실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의도적으로 거짓을 말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단지 계속해서 변화하며 우리의 감각을 자극한다. 이를테면 영화에는 낙태에 대한 대사들이 나온다. ‘우리 시대의 로빈 훗은 낙태를 시술하는 의사이다’라는 베로니카의 과감한 말은 당시 낙태가 합법화되지 않은 프랑스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간다. 또는 ‘옛날 여자들은 군인을 좋아하더니 요즘은 가게 사장을 좋아한다’, ‘요즘은 모두 비슷한 옷을 입기 때문에 시녀와 귀족을 구분할 수 없다’ 같은 정치적으로 바르지 않은 대사들도 나온다. 이때 그 대사만 따로 떼어낸 다음 영화를 비판하는 건, 글쎄, 그렇게 할 수는 있겠지만 이 영화를 이해하는 좋은 방식은 아닌 것 같다. 대신 살아 있는 말들이 영화 속에서 어떻게 생동감 있게 운동하는지 느껴보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정리│ 김보년 프로그램팀

사진│ 장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