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에 걸쳐 연재하는 샤브롤의 회상록은 클로드 샤브롤 감독이 1993년 프랑스 대표 주간지인 ‘텔레라마’에 기고한 것이다. '텔레라마'지는 지난 2010년 9월, 작고한 샤브롤을 기리기 위해 회상록의 여섯 편을 다시 한번 공개했다. 이 회고록은 여전히 미지의 작가로 남아 있는 샤브롤의 삶과 영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12월 14일부터 열리는 ‘클로드 샤브롤 추모전’ 기간에 맞춰 특별히 파리에서 영화, 사진 등의 예술작업을 하고 있는 김량씨의 번역으로 연재해 소개하기로 한다. (김성욱: 편집장)





제 4화 괴짜 영화광의 기억


전쟁도 끝났고, 사르당 지방에서의 왕 노릇도 끝났다. 4년 동안 제대로 본 적이 없었던 아들을 보자마자 부모님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여 ‘네가 원하는 것은 모두 다 들어줄께’라는 듯이 두 팔을 벌리고 나를 얼싸안았다. 그러나 나는 이제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명문 고등학교 루이 르 그랑에 나는 무난히 입학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여전히 권력에 취한 청소년이었던 나는, 이 학교에서 어떻게 하면 권력을 잡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결국 나는 반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들하고만 어울렸다. 나는 그들처럼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괴짜 시골뜨기로서 별의별것을 후두룩 꿰어 잘 알고 있는 나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들이 결코 겪어보지 못했을 모험담과 삶의 생생한 지식을 펼쳐놓았고, 소중한 동무가 되었다. 그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내가 ‘이 시대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추켜세웠으며, 좀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영문학에 푹 빠져 지냈는데, 원문으로 된 그 책자들을 사들여 달달 외울 정도로 읽은 뒤 모조리 비싼 값으로 되팔기도 했다. 나는 상술에 재주가 있었다. 어쨌거나 나의 용돈은 나의 욕망에 비해 늘 빈약했고, 궁여지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아무도 헤밍웨이나 도스 파소스와 같은 문호들의 친필 사인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하여 나는 감히 그들의 사인을 흉내 내어 내 책 머리에다 갈겨썼고, 웃돈을 얹어다 팔았다. 사람들은 나의 사기를 의심하지 않고 책을 챙겨 갔다. 나는 그렇게 해서 번 돈으로 다시 책을 구입하기를 되풀이 하였다. 나는 이렇게 사기꾼에다 강탈꾼인데다가 황당한 책들을 읽어댔다.  20세기 초 유행했던 대중 소설 중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키치스런 책을 읽은 기억이 난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애매하기 짝이 없는 인물들이었는데, 나는 그러한 점이 너무나 좋았다! 학교와 집에서는 늘 내게 엄격함을 요구하였고 나는 그러한 환경을 잘 견디는 성향이 아니어서, 이와 같은 소설은 내게 정신적인 돌파구를 제공한 셈이었다. 그 소설 속 인물들에 영향을 받은 나는 학교에서 엉뚱하고 대담한 행동을 하여 학교 괴짜로서의 명성을 굳혔다.


대표적으로 라틴어 선생님과의 대결이 있었다. 그 선생님은 정말 구질구질했을 뿐 아니라 라틴어의 문법을 엉망으로 가르치는 형편없는 선생님이었다. 나는 그와 대결하기 위해 이중적인 얼굴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평소 나는 샤브롤이었지만, 그에게 대들고 맞설 때는 마냐드라고 자칭하였다. 그에게 빈정거리며 반항할 때면 약이 잔뜩 오른 그가 나를 붙잡고 ‘마냐드, 거기서지 못해!’라고 하면서 뒤돌아서 싱긋 웃으며 ‘선생님, 저는 마냐드가 아니라 샤브롤입니다’라고 해서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마냐드와 샤브롤은 이렇게  2년 동안 교내에서 존재해왔다. 교내 벽보에 ‘마냐드는 미친 녀석’, ‘샤브롤은 희롱을 즐기는 녀석’등이 게시되기 시작했다. 우리(마냐드와 샤브롤)에 대해 너무 많은 소문이 나돌았고, 나는 교원회의에 소출되었다. 이틀간의 정학처분이 내려지면서 교장선생님은 내게 마치 공범자처럼 윙크를 했다. 


부모님 또한 교내에서의 나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영화관에 가느라 학교 수업을 빼먹는 것만은 쉽게 용납을 하지 않았다. 어느날 아침, 부모님은 우리 집 하숙생에게 내 뒤를 밟으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나는 그 날 아침만은 학교를 빼먹지 않을 작정으로 집을 나서던 참이었다. 루이 르 그랑 고등학교로 가는 길은 팡데옹 극장을 지나가야 한다. 나는 잠시 팡데옹 극장 앞에 멈춰 서서 전날 보았던 영화의 스틸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때, 내 뒤를 밟던 하숙생이 내 목덜미를 쥐고는 ‘요 녀석! 너 또 학교 빼먹고 영화관 가는거지!’라고 소리쳤다. 그리고는, 나의 목덜미를 끌고 집으로 직행했다.  그날 저녁, 나는 부모님께 하숙생의 착각을 주장하며 그의 착각으로 인해 진실과 정의가 얼마나 처참하게 무시당하고 있는지를 역설하였다. 아버지는 나의 과장된 언변술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기에, 먹혀들 리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짓 안할 거라고 맹세해!’라며 큰 소리를 치셨다. 나는 그때까지 부모님 몰래 무수히 학교수업을 빼먹고 영화관으로 향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파리로 돌아온 뒤로는 풀리는 일이 없었다. 사르당에서는 여자애들이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었는데, 파리에서는 여자애들이 나를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취급했다. 결국 나는 심통이 나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마다 여자애들의 엉덩이를 집적거렸다. 그렇지만 아무도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날씬하고도 근육질의 몸집에 사제 같은 얼굴로 순수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이럴 경우 으레 엉큼해 보이는 뚱뚱한 대머리 아저씨들이 의심을 받고는 모두가 ‘몹쓸 인간이네!’라고 한마디씩 던졌다. 그래도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나는 몇 번 뺨을 얻어맞기도 했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참 실험적인 시절이 아니었던가. 부끄럽지만 나는 이런 짓을 무려 2년 동안 하고 다녔다. 내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랬을까. 나는 항상 행복과 더 인연이 많은 사람이고, 내가 원한 것은 꼭 얻어내고야 말았다. 헌데 여자 친구가 생기지 않으니 나는 초조해졌고, 자신감을 잃었으며, 무슨 일을 저질러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이런 해괴망측한 짓을 하고 다녔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파리지엔느들을 꼬시는 방법을 심사숙고하게 되었고, 그것은 ‘부끄러움 타는 방법’으로 결론지어졌다. 여자애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그렇게 시선을 끈 다음 나는 더없이 부끄러운 남학생으로 돌변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여자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그 시절 여자 친구 사귀기에 혈안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내게 더 중요했던 것은 할머니와 영화관에 가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나의 탈선행위에 유일한 공범자였다. 할머니는 내가 영화관에 가기 위해 수업을 빼먹는 것도 괘념치 않았고, 자신의 지갑에서 돈을 슬쩍해도 모른척했다. 영화관에 가기 위해 가장 이상적인 동반자는 여자 친구가 아니라 할머니였다. 우리는 영사기에 영화 필름이 끼워 맞추기 시작할 아침나절부터 이 극장 저 극장으로 돌아다니며 영화를 보았다. 무슨 영화를 볼 것인가는 늘 내 책임이었고, 하루 종일 서너 편씩 뛰어다니며 본 영화들을 할머니는 헷갈려하며 내용을 뒤섞기도 하였다. 영화를 뒤섞여 재구성하는 할머니는 매력적이었고, 아름다웠다.


1950년대가 시작되면서 미국영화가 물밀듯이 흘러들었다. 아침에는 빌리 와일더의 1944년작 <이중배상Double Indemnity>을 보았고, 오후 두시에는 오토 플레밍거의 1944년작 <로라Laura>를 보았으며, 연이어 프레스톤 스터저스의 1941년작 <레이디 이브The Lady Eve>, 프리츠 랑의 1944년작 <창가의 여인The Woman in the Window>의 감상으로 하루를 마무리 하였다. 그렇게 영화를 하루 종일 보러 다니는 나날이 이어졌지만, 나는 영화를 만들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영화는 내게 있어서 마치 감정을 맛보기 위해 회화 작품을 보러 다니는 것과 다름이 없는 문화 활동이었다. 물론 영화를 많이 보면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고 싶었고, 이 영화는 저 영화에 비해 왜 담백한 느낌이 드는지, 영화 속 인물이 말을 하고 있는 동안 상대방은 왜 등을 돌리는 가 등등, 자문을 많이 던지기는 했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잘 못 찍은 영화는 금방 식별하게 되기도 했다. 그 이상의 발전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부모님에게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뜻을 살짝 비추었다. 부모님의 대답인즉, ‘그런 직업은 게이들이나 하는 거다’. 전혀 놀랍지 않은 답변이었다.(계속)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 연재 목록  

  <제6화> 명성에 속지 않는 영화감독이 되다
  <제5화> 영화를 향한 꿈과 방탕했던 20대 시절
  <제4화> 괴짜 영화광의 기억
  <제3화> 시네클럽과 첫 사랑
  <제2화> 권력에 취한 소년 클로드
  <제1화> 클로드의 어린시절: 나는 왕이로소이다

                                         해당 회차를 클릭하시면 연재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에서 출처>
                                                                                                           김 량 번역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영화 예술의 다양성을 꿈꾸는 아티스트
http://blog.naver.com/image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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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부터 여섯 번에 걸쳐 연재하는 샤브롤의 회상록은 클로드 샤브롤 감독이 1993년 프랑스 대표 주간지인 ‘텔레라마’에 기고한 것이다. '텔레라마'지는 지난 2010년 9월, 작고한 샤브롤을 기리기 위해 회상록의 여섯 편을 다시 한번 공개했다. 이 회고록은 여전히 미지의 작가로 남아 있는 샤브롤의 삶과 영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12월 14일부터 열리는 ‘클로드 샤브롤 추모전’ 기간에 맞춰 특별히 파리에서 영화, 사진 등의 예술작업을 하고 있는 김량씨의 번역으로 연재해 소개하기로 한다. (김성욱: 편집장)

제 2화 권력에 취한 소년 클로드





‘온수기 사건’에서 살아남은 나는,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어딘가 문제를 가지고 태어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부모님의 염려와 함께 무제한적 사랑에 둘러싸인 유년기를 보내었다. 그러던 와중 대퇴골 칼슘 결핍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아홉 살 해의 두 달 동안을 침대에 묶여 지내게 되었는데… 그즈음 우리 가족은 오를레앙에서 다시 파리 14구의 고급 아파트로 이사를 왔고, 부모님은 마치 루이 14세 시대 럭셔리한 주택이나 되는 것처럼 어린아이들 마냥 날뛰며 행복해했다. 나는? 나 또한 부모님처럼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어야 하겠지만, ‘이건 흥미 있는 경험이다’라고 중얼거렸고, 이왕이면 이 풍족한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작정했다. 부모님은 대퇴골 때문에 침대에서 두 달 동안 누워있던 나를 북쪽 영국해협과 근접한 노르망디 메를리몽 해변가로 요양을 보냈다. 거기서 나는 여름을 보내며 해변의 모래 위를 엉덩이로 걸어 다니는 법을 터득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엉덩이 걷기’에 이력이 나서 정상적으로 걷는 사람보다 더 빨리 걷게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곧 나는 메릴리몽 해변가의 명물이 되었는데, 검은 뿔테 안경을 끼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에는 모래 삽을 들고 잽싸게 엉덩이로 걷는 소년의 친절함과 매력은 모든 사람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나는 해변가에서 모래주머니를 만들어 파는 장사를 하였다. 당시 아이들은 모래로 주머니를 만들어 어물전에 파는 것이 유행이었다. 어물전 상인들은 아이들이 가지고 온 모래주머니에 조개를 넣고 도시로 운송했기에 모래주머니가 필요했다. 이를 계기로 나는 상술을 배울 수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래주머니에 색칠을 하거나 미리 조개를 넣어 팔았지만 나는 그냥 주머니에 모래를 넣기만 하고 조금 더 싸게 팔았다. 그렇게 하니 중간 상인 노릇을 하는 아이들이 생겨나 내 주머니를 더 많이 구입했고, 그들은 나름대로 색칠을 하거나 장식을 하여 더 비싸게 되팔아야 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순이익을 챙기게 되는 것은 나였다. 메를리몽 해변가의 아이들은 내 발밑으로 속속 들어왔고, 소년시절 나는 이렇게 권력의 맛을 보며 생색을 내는 태도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여름마다 메를리몽 해변가에서 3년을 보내고 난 후 대퇴골도 다시 원상복귀를 하여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만 했다. 상상해보라, 3년 동안 엉덩이로 걸으며 모래 장사를 하면서 추앙받던 소년이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 부모님은 유명한 몽테뉴 고등학교 근처의 중학교 2학년 과정에 나를 집어넣었지만 나는 당연히 학교에 흥미가 없었다. 장난질이 더 멋있고 흥미 있게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파악했던 나는 학교를 가면 교실에 붙어있지 않고 윗반 아랫반 교실을 왔다 갔다 하였다. 들킬까봐 두렵지는 않았다. 다른 학생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상한 놈이 어슬렁거리는 구나’라고 중얼거리다가 말겠지. 며칠을 그렇게 교내를 어슬렁거리다가 들킨 후로는 내게 지정된 학년 교실에서 별반 움직이지 않았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나는 똑똑하면서도 멍청한 학생이었다. 나는 어디서든 왕이 되어야 직성이 풀리지만 동시에 나를 완전히 망각시키게 하는 재주도 있었다. 사람들이 나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아무 말도 안하면 되니까. 반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 또한 어렵지 않다. 아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거나 아주 흥미 있는 표현을 써가며 떠들어대면 그만이다. 내게 있어서 이건 일종의 게임이나 마찬가지였다. 주변에서 나를 어떻게 판단하든 상관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러한 학교생활은 몇 달을 가지 못했다. 2차 대전이 발발하고야 말았으니까. 



부모님은 나를 할머니와 고모와 함께 프랑스 서부 사르당 지방으로 보냈다. 메릴리몽 해변가에서처럼, 나는 그 촌구석에서 며칠 만에 권력을 잡았다. 처음에는 물론 쉽지 않았다. 시골 아이들은 나를 도시에서 온 외계인 취급을 했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여전히 못생겼고, 키는 1미터 30센티에도 겨우 못 미치는 열두 살짜리 땅꼬마였다. 거기서 최악이었던 것은 나의 목에 항상 둘러쳐있던 나비넥타이였다. 시골아이들은 내가 등장할 때마다 ‘오 나의 친애하는 !’이라고 부르며 나를 놀려댔다. 그러나 상황은 곧 역전되었다. 아이들은 곧 나의 노예가 되었으니까. 먼저, 나는 한 달 만에 그 시골 중학교에서 월반을 했고 늘 일등을 차지했다. 나는 마치 화려한 깃털을 뽐내는 공작새가 된 것처럼 으스댈 수 있었다. 전학 오자마자 월반에다가 우등생이라는 소문은 사르당 지방에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소년시절, 나는 왜 그렇게 허영심과 권력의 욕망에 시달렸는지 모르겠다. 나는 폭군의 욕구까지는 아니더라도, 떠받들어지는 쾌감과 편리함에 길들여져 있었다. 이런 나의 첫 희생자는 할머니였다. 전쟁 중 생활의 어려움과 부모님의 부재와는 상관없이 나는 걸핏하면 할머니에게 용돈을 요구했다. 나는 가지고 싶은 것은 무조건 가져야 하는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할머니는 이렇게 말하며 단연코 거절했다. ‘왜 이렇게 귀찮게 구니. 네가 어제 내 지갑에서 돈을 꺼내가는 것을 이미 보았어 !’ 할머니의 말은 진실이었고, 나는 ‘알았어 ! 세상은 잔인하고 부당해 !’라고 소리치고는 울며불며 화장실로 뛰어가 변기에 얼굴을 처박고 물 내리는 짓을 반복하였다. 물론 화장실 문은 활짝 열어둔 채로 말이다. 할머니는 내 뒤를 어기적거리며 따라와서 나의 이상한 행위를 보고는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벌벌 떠는 손으로 지갑에서 돈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다. 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셨고, 나는 그걸 최대한 활용하는 몹쓸 소년 이었다 ! 





또 다른 피해자는 사르당 성당의 주임 신부님이셨다. 할머니는 내가 신부님에게 수학과 라틴어를 배우라고 성당에 보냈는데, 나는 오만불손하게도 신부님보다 내가 더 똑똑하다는 것을 확신해버렸다. 신부님은 끔찍한 몽매주의에 사로잡혀 있어서 프로마송이라는 비밀 권력단체의 어둡고도 어두운 미사 의식에 관해 미소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묘사하였다. 나는 그런 신부님이 이상하지도 싫지도 않았고 오히려 재미있었다. 그리고 나와 신부님의 친밀한 관계를 최대한 활용했다. 신부님은 세례식이 있을 때마다 열두 살에 불과한 내게 대부노릇을 맡겼다. 사르당 지방의 주민들은 좌파성향이라 신도 악마도 믿지 않았다(당시 프랑스의 가톨릭계는 우익 성향의 사람들을 상징했다). 하여 세례를 준비하기 위해 이미 세례를 받은 성인들을 찾아 대부노릇을 맡기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처럼 쉽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세례를 받은 열두 살의 내가 어릿광대처럼 대부노릇을 하였는데, 사르당 지방에서 나의 명성이 점점 높아지는 계기를 제공하였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나는 빵집 아저씨와도 친구였고, 카페 주인과도 친구였으며, 사르당 지방 유지와도 친구였다. 그 지방의 사람들은 쉴 사이 없이 나를 초대하고 대접했다. 초대를 받을때마다 나는 노래를 한 곡조 뽑았고, 이내 나는 스타가 되었다. 나르시시즘에 푹 빠진 나는 화장실에 틀어박혀 변기 위에 올라 앉아 거울을 보며 노래를 부르거나 라신의 <페드르> 와 같은 비극의 대사를 연기하면서 읊어대었다. 그런 나를 거울로 관찰하면서 나 자신이 대단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저 그 순간이 너무 즐겁고 재미있었을 뿐이다. 이 정도면 행복한 소년기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완전히 그렇지는 못했다. 부모님은 전시 독일 치하의 파리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모님이 보고 싶어도 자유롭게 만나러 갈 수 없었다. 어쩌다 가끔 부모님께 날라 오는 엽서는 검열 때문에 형식적인 인사말만 간단하게 쓰여 있었고 (전쟁 중 검열의 이유로 편지는 금기시되었고 봉투 없는 엽서만이 가능했다) 나는 부모님께 인사말 아래 쉼표와 마침표, 느낌표를 이용하여 암호를 만들면서 의사를 소통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딱 두 번 나를 보러오셨는데, 올 때마다 수염이 얼굴에 가득했으며 야밤을 이용하여 소리 없이 왔다가 떠나셨다. 그렇게 사르당에서 소년시절은 끝나고 있었고, 시네 클럽 활동이 곧 시작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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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화> 명성에 속지 않는 영화감독이 되다
  <제5화> 영화를 향한 꿈과 방탕했던 20대 시절
  <제4화> 괴짜 영화광의 기억
  <제3화> 시네클럽과 첫 사랑
  <제2화> 권력에 취한 소년 클로드
  <제1화> 클로드의 어린시절: 나는 왕이로소이다

                                         해당 회차를 클릭하시면 연재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에서 출처>
                                                                                                           김 량 번역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영화 예술의 다양성을 꿈꾸는 아티스트
http://blog.naver.com/image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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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누벨바그:클로드 샤브롤 추모전 


클로드 샤브롤은 누벨바그의 다른 작가들보다 더 대중적인 흥행영화를 만들었지만 정작 덜 알려진 작가이다. 국내에 소개된 작품도 일부에 불과하고 그 대부분도 최근작들로 한정되어 있다. 극장에서 그의 영화를 만나는 기회도 고다르나 트뤼포, 로메르에 비해 적은 편이고, 이 애매한 작가를 ‘히치콕의 프랑스 후예’ 정도로 취급해 온 것도 그의 작가성에 대한 논의를 협소하게 만들었다. 샤브롤은 그가 비록 히치콕에 관한 저술을 했지만 스스로 프리츠 랑에게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토로한다. 그의 영화는 예술가보다는 장인으로 작업해야했던 랑의 미국시절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샤브롤은 전위적인 작가는 아니었지만 누벨바그 작가들 중에서 가장 발 빠른 감독이었다. 가장 먼저 에릭 로메르와 함께 히치콕의 연구서를 출간했고, 카이에 뒤 시네마의 평론에도 일치감치 참여했고, 가장 먼저 데뷔작을 완성했다. 1957년 12월, 샤브롤은 젊은 무명 배우와 약간의 스태프를 데리고 3개월 동안 데뷔작 <미남 세르쥬>를 제작해, 이 영화로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수상했다. 한정된 예산으로 작가영화를 시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쾌거였다.

샤브롤은 스스로 작가라기보다는 고용감독으로 제작자가 원하는 작품 제작에 군말없이 작품을 만들었다. 음악가는 작곡하고 소설가는 글을 쓰고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영화감독은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범죄영화를 선호한 것도 장르영화가 영화제작에 유리한 조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작가성은 그래서 처음부터 평자들에게 의문의 대상이었다. 비평가인 앤드루 새리스의 표현을 빌자면 샤브롤은 1960년대 초에 이미 누벨바그의 잊혀진 인물이었다. '카이에 뒤 시네마' 또한 그의 작품에 오랫동안 호의적이지 않았다.

샤브롤은 삶보다 죽음을 더 그린 작가다. 그는 냉혹한 겨울의 작가이다. 대체로 누벨바그 작가들이 파리를 무대로 따뜻한 자연광 아래서 노닥거리며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끽하는 유희의 영화를 만들었다면, 샤브롤은 반대로 데뷔작부터 눈보라가 흩날리는 폐쇄적인 시골을 배경으로 어둡고 음습한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12월에 촬영한 <미남 세르주>에서 겨울의 시골은 인물들의 차가움과 아픔의 풍경이다.

샤브롤은 자신이 속한 부르주아 세계에의 애착과 혐오를 즐겨 표현했다. 이는 파리 교외, 브뤼셀, 페리고르의 트레몰라 마을, 브리타니, 알자스 지역처럼 특정한 지리적 장소를 인물들의 사회적, 개인적 배경보다 더 중요하게 다루는 것에서 특별하다. 히치콕처럼 음식을 좋아한 그는 프랑스 부르주아 문화의 정점을 만찬용 식탁에서 찾은 감독이기도 했다. 나중에 이자벨 위페르나 상드린 보네르라는 개성파 여배우들과 함께 폐쇄적인 지방도시를 배경으로 한 후기의 미스터리물에서도 이러한 특징은 이어진다.

샤브롤의 사망에 대해 ‘프랑스가 스스로의 거울을 잃었다’고 프랑스 언론이 표현한 것은 과장이 아니다. 그는 위대한 프랑스의 초상화가였다. 그가 남긴 초상화들이 워낙 많아 이번 12월에 소개하는 작품들은 에피타이저에 불과하다. 여전히 샤브롤은 미지의 작가이다. 한국에서 사정은 더한 편이다. 몇몇 감독들이 샤브롤 영화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지만 비평은 적은 편이다. 샤브롤의 사망 이후에 어느 잡지는 '야수가 죽었다'고 했다. 더 인상적인 것은 '카이에 뒤 시네마'의 표지이다. '당신은 샤브롤을 알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반성의 표현으로 읽어야만 한다.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 '샤브롤 추모전'이 서울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파리에서 사진, 영화 예술 작업을 하시는 김량씨가 '텔레라마'에 실린 '샤브롤의 회상록'을 번역해 한국의 팬들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연락을 보내 왔다. 감사한 일이다. 오늘부터 시네마테크 웹블로그에서 작품리뷰들과 함께 천천히 소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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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브롤의 미스터리는 당시로써 생소한 것이었다. 대개 상황의 급전환을 통한 심리 변화로 눈에 띄는 미스터리를 형성한 것에 반해 데뷔작 <미남 세르쥬>는 의식의 서서한 흐름에 이야기를 맡겨 미묘한 분위기로 미스터리를 구축한 까닭이다. 그래서 <미남 세르쥬>는 평단의 호평에도 불구, 흥행에 큰 재미를 못 보았지만 두 번째 작품 <사촌들>에 이르러서야 관객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다.

샤를르(제라드 블라인)는 법률 시험을 치르기 위해 파리로 상경, 사촌 폴(장 클로드 브리알리)의 집에 머물며 시험에 대비한다. 모범적인 샤를르와 달리 폴은 음주가무를 즐기는 까닭에 큰 도움을 받지는 못한다. 대신 자유분방한 파리의 환경과 적극적인 폴의 성격에 매료되지만 여인 플로랑스(줄리엣 마뉴엘)를 두고 둘의 사이가 어그러지면서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사촌들>은 피를 나누었지만 서로 다른 행동 양식과 심리를 보여주는 두 인물 사이의 심리적 대비의 풍경을 보여준다. 이 모든 시작은 샤를르의 문화적 충격에서 비롯된다. 지방 출신인 그가 파리를 느끼며 즐기는 감정은 모두 파리지엔인 폴에게로 감정 이입이 된다. 그로인해 법학도로 대표되는 샤를르의 이성은 점차 플로랑스를 향한 애정의 본능에게로 자리를 내주게 되는데 후에 시험에 실패한 그의 모습은 비극의 전초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관계도 이성이 버팀목이 되어줄 때 유지되는 법이지만 정신이 제어할 수 없는 감정이 앞서게 되면 그 상황은 결국 러시안 룰렛 게임이나 진배없다는 것이 샤브롤의 입장이다.

<사촌들>이 인물의 설정에서부터 상황 묘사까지 대비를 주요한 표현 양식으로 삼는 것은 이와 같은 감독의 철학에서 기인한다. 사실 <사촌들>이 개봉한 당시의 프랑스, 특히나 파리는 전통에서 혁신으로, 구세대에서 신세대로의 도도한 시대 변화의 흐름 속에 무수한 문화 충돌로 들끓는 시기였다. 극중 샤를리와 폴이 처한 상황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처럼 인간은 환경에 지배받기 마련이다. 급격한 환경 변화 속에서 흑과 백이 서로 공존하기보다는 그 성격상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이 튀어나오다보니 서로 충돌하고 부딪혀 회색빛 풍경이 된다는 것을 <사촌들>은 보여준다.


이는 샤브롤이 히치콕의 영화를 추종하지만 히치콕과는 전혀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고 영화를 만든다는 결정적 대목이라 할만하다. (극중 서점에 들어간 샤를르가 샤브롤과 로메르가 공저한 연구서 <히치콕>을 만지작거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히치콕의 미스터리는 늘 남녀 간의 사랑으로 귀결되는 결말로 현실에서 맞보기 힘든 따뜻한 유희를 선보였다. 샤브롤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샤브롤의 작품에서 관계를 이룬 남녀라도 반드시 깨지기 마련이었다. 또한 <사촌들>에서처럼 (후기 연출작에서 더 두드러지기는 하지만) 가족일지라도 비밀의 틈새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기어코 풍비박산까지 밀어붙이고야 말았다.

그것이 샤브롤의 비관주의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지극히 현실주의자였다. 현실에서 목격한 부조리한 상황들을 접목해 미스터리를 삼는 것이 샤브롤의 장기였다. 같은 맥락에서 다른 누벨바그 감독들이 자신의 예술관을 지키기 위해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던 것에 반해 샤브롤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상황이면 외부 조건 따위를 크게 개의치 않았다. 데뷔작 <미남 세르쥬>에서부터 <벨라미>(2009)를 유작으로 남길 때까지 50편, 그러니까 매년 한 편 꼴로 영화를 만들어왔다. 그 때문에 샤브롤은 누벨바그 내부에서도 크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작가였다. 지금이라도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할 때다. (허남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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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부터 여섯 번에 걸쳐 연재하는 샤브롤의 회상록은 클로드 샤브롤 감독이 1993년 프랑스 대표 주간지인 ‘텔레라마’에 기고한 것이다. '텔레라마'지는 지난 2010년 9월, 작고한 샤브롤을 기리기 위해 회상록의 여섯 편을 다시 한번 공개했다. 이 회고록은 여전히 미지의 작가로 남아 있는 샤브롤의 삶과 영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12월 14일부터 열리는 ‘클로드 샤브롤 추모전’ 기간에 맞춰 특별히 파리에서 영화, 사진 등의 예술작업을 하고 있는 김량씨의 번역으로 연재해 소개하기로 한다. (김성욱: 편집장)

<제1화> 클로드의 어린 시절: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조건에서 태어났다. 왜냐하면, 태어나기도 전에 거의 죽을 뻔 했으니까! 출생하기 6개월 전이라고 한다. 할머니 집에서 목욕을 하던 엄마가 그만 가스 온수기가 터지는 바람에 병원에 실려간 것이다. 나를 임신하고 있던 엄마는 질식한 상태로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고, 의사들은 태아가 이미 사망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산할 것이라 진단했다.

어쨌거나 나는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고, ‘온수기 사건’때문에 나의 부모님은 내가 분명 정신박약아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버지는 파리 10구의 포부르그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온수기 사건’에서 생존한 아들이 손가락을 입안에 집어넣고 아무 말 없이 창문 밖 허공을 응시할 때마다, 아들이 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여기며 혀를 찼다. 나는 가스 냄새에 아주 민감한 아이였고, 아직도 그러하다. 어디서 가스냄새만 나면 현기증이 난다.

내가 만 3살이 넘자 부모님은 그제서야 안심했다. 말이 더딘 아이였던 나는 3살을 겨우 넘어서야 말이 트였기 때문이다. 말이 트이자 나는 뭐든 묘사하며 떠들기 좋아했다. 곧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들뿐만 아니라 이웃들의 행태도 상세히 보고하기 시작했다. 이웃집 아무개가 집에 들어올 때 토마토와 샐러드를 들고 왔으며 엄마가 그걸 보고 동시에 하품을 하더라는 등, 사소한 일들을 상세하게 묘사하는 즐거움에 흠뻑 빠졌고, 부모님은 그런 나를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며 경청했다.   

정신박약아가 될 줄 알았던 아들의 탁월한 언어 묘사력에 감탄한 부모님들을 더욱 감탄에 빠뜨린 계기는 축음기가 제공하였다. 당시(1930년대)에 그 귀한 축음기와 LP디스크를 선물 받은 부모님은 허구헌날 유행가를 틀고 즐거워했다. 만 3살에 불과했던 나는 당연히 글을 읽을 줄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노래 제목을 정확하게 찾는데 귀신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이러하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대신 나는 디스크 표지에 적힌 노래 제목들의 색깔과 그림, 그리고 글 모양새를 기억했다. 아버지가 ‘클로드, <양치기야 비가 내린다네>를 틀어주렴’하면 나는 기가 막히게 그 노래가 실린 디스크 위에 바늘을 얹어 아버지를 흡족하게 해주었다. 물론 부모님은 나 스스로 혼자 글을 깨친 것이라고 믿고 자랑스러워했으며 나는 결코 나만의 비법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만 네 살이 되던 해에는 부모님이 애지중지하는 축음기가 그만 고장이 났는데, 그걸 간단히 고쳐서 부모님으로 부터 ‘천재’소리까지 듣게 되었다.

물론 부모님을 내손아귀에 넣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면 나는 누가 뭐래도 ‘독자’니까! 독자, 그건 참으로 대단한 거다. 믿을 수 없는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자아를 형성하니까! 내가 어렸을 때는 모든 주의가 나에게 집중되었고,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세 번의 결혼을 거치며 만난 세 명의 여자들은 내 앞에서 아주 꼼짝을 못했다. 독자로 자랐을 경우에 좋은 조건만 따지게 되는 까다로운 성격을 형성한다고 흔히 말한다. 그렇지만 내가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였다고 상상하지는 말지어다. 나는 사람들에게 늘 친절했으며, 예의가 발랐고, 항상 즐겁게 대했다.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면, 나는 주의가 좀 산만했다. 어딜가든 부모님은 나를 잃어버리기를 밥 먹듯 하였다. 결국 엄마는 외출할 때마다 나를 강아지처럼 끈을 묶고 다녔다. 내게 있어서 그건 참으로 불쾌하고 모욕적인 처사였다. 엄마를 잃어버리는데 도사였던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눈물을 머금고 엄마에게 묶여 다녀야만 했다. 걸작은 바로 백화점 ‘봉마셰’에서 만들어졌다. 엄마를 잃어버리고 난 뒤면 여지없이 나는 쇼윈도에 전시되었다. 그리고는 ‘클로드 샤브롤이 엄마를 기다리고 있어요’라는 안내 방송이 나갔다. 나는 그 순간의 스릴이 너무 재미있어 죽을 지경인데 허겁지겁 달려온 엄마는 가차 없이 내 면상에 귀싸대기를 날렸다. 그 정도면 약과다. 엉덩이를 맞는 날은 최악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체벌이 가장 끔찍했다. 부모님은 손버릇이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어쩌다가 가끔 엉덩이를 때릴 때마다 ‘혈액순환에 좋다!’라고 소리를 칠 때면, 참으로 싫고 증오스러웠다.





부모님은 독실하고도 엄격한 가톨릭 신자들이었고, 나는 그 영향아래 교육을 받고 자랐다. 인간의 추악한 면이 자주 등장하는 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쉽게 인정하지 않겠지만, 나는 선과 악을 믿으며 선에 더 민감하다.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슬퍼서 견딜 수가 없다. 나의 감정선은 이렇게 가톨릭 교육과 연관되어 있다. 내 부모님은 프랑스 지방의 전형적인 부르주아 가문 출신들이고 파리로 가는 기차 안에서 만났다고 한다. 친가는 대대로 이어진 약사 집안이었고, 나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약국에서 놀았다. 파리 10구 포부르그에서 약국을 운영했던 아버지는 내가 만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사업을 넓히려고 오를레앙에 큰 약국을 열면서 우리 가족은 파리를 떠나게 되었다. 사업 자금을 많이 융통했었는지, 형편이 줄어들어 오를레앙의 자택은 조그마한 아파트였다. 

아버지와 나는 손발이 잘 맞는 친구 사이였지만 엄마와는 그저 애교를 잘 떠는 아들에 불과했다. 엄마는 늘 내게 심부름을 시켰다. 살림이 쪼들리자 엄마가 경제권을 쥐락펴락했다. 하여 나는 엄마가 아버지보다 더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집안에서 호령하는 사람도 엄마였다. 나는 그래서 엄마와 친구가 될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왕이라고 생각했는데 왕에게 밀가루를 사와라, 치즈를 사오라고 명령하는 엄마와 친밀하게 지낼 이유가 없었다. 부모님을 제외하고 내가 제일 좋아한 사람은 파리에서 극장을 운영하던 삼촌이었다. 덕분에 나는 만 네 살 때 처음으로 영화를 보았고, 그 영화제목은 아직도 기억한다: <안소니 에드버즈 Anthony Adverse>(1936). 영화와 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이나 다름없었다. 만 다섯 살 때, 나는 집안에서 뒹구는 별의별 책을 다 주어 읽었는데, 그 중에 ’세갱 아저씨네 염소’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책 덕분에 나는 늑대에게  갈갈이 뜯겨 먹히는 염소에 관한 악몽을 꾸기 시작했고, ‘불쌍한 염소야! 불쌍한 염소야!’ 라고 소리치며 잠꼬대를 하기도 했다. 책에는 염소가 뜯어 먹히는 장면이 참으로 끔찍한데, 지금 떠올려도 끔찍하면서도 멋있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나는 나이와 맞지 않는 책들을 읽어대곤 했었다. 만 여섯 살 때, 이미 세익스피어의 <맥베드>, 그리고 코르네이유의 <르 시드>, <오라스> 등등을 읽었으니 할 말 다했다. <맥베드>의 마녀 셋은 정말 무서웠지만, 코르네이유는 참으로 멋졌다. 부모님은 내가 무얼 읽던지 전혀 관여하지 않고 사달라는 책은 모두 구해주었다. 왜냐면 나는…독자니까!

그렇지만 나는 참으로 못생긴 아이였다. 게다가 사팔뜨기였으니! 나는 안경을 쓰고 세익스피어를 읽는 다섯 살짜리 늙은 소년이었다. 못생긴 얼굴이 내게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외모는 내게 콤플렉스를 안겨주던 동시에 나를 감추는 가면이 되었다. 나의 못난 얼굴은 나를 즐겁게 해주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 못생긴 외모 덕분에 나는 연극 단체가 주관한 ‘인상 찡그리기 대회’에서 늘 일등을 차지할 수 있었으니까! 결론적으로 나는 좀 특별한 구석이 많았던 소년이었다. 또래 아이들보다 조숙했고, 그래서 고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른 아이들을 눈꼽만큼도 부러워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나의 친구들은 오히려 성인들이었다. 특히 나는 우리 집 건물의 관리인 부부와 친하게 지냈다. 그리고 장폴. 그는 나의 유일한 친구였다. 나는 단박에 그에게 흥미를 느꼈는데 그건 그의 아버지가 딴 여자와 결혼을 하기위해 이혼을 했다는 엉뚱한 이유 때문이었다. 1930년대 프랑스에서 이혼은 금기 사항이었고, 금기를 깨뜨린 아버지를 둔 장폴은 내게 색다른 존재로 다가왔다. 우리는 매일 아침 만나서 단어를 가지고 이야기를 만드는 게임을 즐겼다. 아홉 살 때까지 장폴은 내게 우정을 가르쳐준 유일한 동무였지만,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그와 헤어지고야 만다. 이유는 칼슘 결핍증에 걸린 나의 대퇴골 때문이었다. 나는 학교도 그만두고 집에 틀어박혀 지내야 한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는데, 슬픈 일은 아니었다. 그때부터 나는 집에서 권력을 독점하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으니까….!


  [특별연재]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 보러가기 

  <제6화> 명성에 속지 않는 영화감독이 되다
  <제5화> 영화를 향한 꿈과 방탕했던 20대 시절
  <제4화> 괴짜 영화광의 기억
  <제3화> 시네클럽과 첫 사랑
  <제2화> 권력에 취한 소년 클로드
  <제1화> 클로드의 어린시절: 나는 왕이로소이다

                                         해당 회차를 클릭하시면 연재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에서 출처>
                                                                                                           김 량 번역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영화 예술의 다양성을 꿈꾸는 아티스트
http://blog.naver.com/image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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