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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클로드 샤브롤 추모 영화제

비밀의 틈새를 집요하게 파고들기 - <사촌들>


샤브롤의 미스터리는 당시로써 생소한 것이었다. 대개 상황의 급전환을 통한 심리 변화로 눈에 띄는 미스터리를 형성한 것에 반해 데뷔작 <미남 세르쥬>는 의식의 서서한 흐름에 이야기를 맡겨 미묘한 분위기로 미스터리를 구축한 까닭이다. 그래서 <미남 세르쥬>는 평단의 호평에도 불구, 흥행에 큰 재미를 못 보았지만 두 번째 작품 <사촌들>에 이르러서야 관객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다.

샤를르(제라드 블라인)는 법률 시험을 치르기 위해 파리로 상경, 사촌 폴(장 클로드 브리알리)의 집에 머물며 시험에 대비한다. 모범적인 샤를르와 달리 폴은 음주가무를 즐기는 까닭에 큰 도움을 받지는 못한다. 대신 자유분방한 파리의 환경과 적극적인 폴의 성격에 매료되지만 여인 플로랑스(줄리엣 마뉴엘)를 두고 둘의 사이가 어그러지면서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사촌들>은 피를 나누었지만 서로 다른 행동 양식과 심리를 보여주는 두 인물 사이의 심리적 대비의 풍경을 보여준다. 이 모든 시작은 샤를르의 문화적 충격에서 비롯된다. 지방 출신인 그가 파리를 느끼며 즐기는 감정은 모두 파리지엔인 폴에게로 감정 이입이 된다. 그로인해 법학도로 대표되는 샤를르의 이성은 점차 플로랑스를 향한 애정의 본능에게로 자리를 내주게 되는데 후에 시험에 실패한 그의 모습은 비극의 전초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관계도 이성이 버팀목이 되어줄 때 유지되는 법이지만 정신이 제어할 수 없는 감정이 앞서게 되면 그 상황은 결국 러시안 룰렛 게임이나 진배없다는 것이 샤브롤의 입장이다.

<사촌들>이 인물의 설정에서부터 상황 묘사까지 대비를 주요한 표현 양식으로 삼는 것은 이와 같은 감독의 철학에서 기인한다. 사실 <사촌들>이 개봉한 당시의 프랑스, 특히나 파리는 전통에서 혁신으로, 구세대에서 신세대로의 도도한 시대 변화의 흐름 속에 무수한 문화 충돌로 들끓는 시기였다. 극중 샤를리와 폴이 처한 상황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처럼 인간은 환경에 지배받기 마련이다. 급격한 환경 변화 속에서 흑과 백이 서로 공존하기보다는 그 성격상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이 튀어나오다보니 서로 충돌하고 부딪혀 회색빛 풍경이 된다는 것을 <사촌들>은 보여준다.


이는 샤브롤이 히치콕의 영화를 추종하지만 히치콕과는 전혀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고 영화를 만든다는 결정적 대목이라 할만하다. (극중 서점에 들어간 샤를르가 샤브롤과 로메르가 공저한 연구서 <히치콕>을 만지작거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히치콕의 미스터리는 늘 남녀 간의 사랑으로 귀결되는 결말로 현실에서 맞보기 힘든 따뜻한 유희를 선보였다. 샤브롤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샤브롤의 작품에서 관계를 이룬 남녀라도 반드시 깨지기 마련이었다. 또한 <사촌들>에서처럼 (후기 연출작에서 더 두드러지기는 하지만) 가족일지라도 비밀의 틈새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기어코 풍비박산까지 밀어붙이고야 말았다.

그것이 샤브롤의 비관주의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지극히 현실주의자였다. 현실에서 목격한 부조리한 상황들을 접목해 미스터리를 삼는 것이 샤브롤의 장기였다. 같은 맥락에서 다른 누벨바그 감독들이 자신의 예술관을 지키기 위해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던 것에 반해 샤브롤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상황이면 외부 조건 따위를 크게 개의치 않았다. 데뷔작 <미남 세르쥬>에서부터 <벨라미>(2009)를 유작으로 남길 때까지 50편, 그러니까 매년 한 편 꼴로 영화를 만들어왔다. 그 때문에 샤브롤은 누벨바그 내부에서도 크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작가였다. 지금이라도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할 때다. (허남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