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 인터뷰] 장 프랑수아 로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프로그램 디렉터

여섯번째를 맞은 '2011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영화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러 내한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프로그램 디렉터 장 프랑수아 로제 씨를 지난 13일 시네마테크 마스터클래스가 열리기 전 서울아트시네마 로비에서 만났다. 그가
말하는 영화의 즐거움은 무엇일까? 그가 느낀 시네필의 즐거움, 극장의 즐거움, 한국영화의 즐거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디렉터로써의 즐거움 그리고 시네마테크의 즐거움을 들어봤다.


시네필의 즐거움은?
내가 영화를 좋아하게 된 것은 아마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어머니가 영화를 좋아하셔서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영화를 자주 시청하였다. 어릴 때부터 그 옆에서 같이 영화를 보며 자라왔다. 60, 7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내 연령대의 사람들은 나처럼 극장에서 보다는 텔레비전으로 영화를 더 많이 접했다. 집에 있는 텔레비전으로 자연스럽게 접하고 좋아하게 된 영화에 대한 애정이 커져서 나를 시네필로 만들었다. 어렸을 적에는 영화가 너무 좋아서 가정용 캠코더로 짧은 영화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연출은 나의 역량이 미치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나는 창의적인 예술가형은 아니다. 나는 영화를 보고 그것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을 더 잘한다고 생각하고 더 좋아한다.

극장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처음 극장에서 본 영화는 제리 루이스의 <팻시>(1964)였다. 너무 어려서 내용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봤다. 나중에 크고 나서야 줄거리 파악이 됐다. 어린시절 아프리카에서 2년을 보낸 것 또한 나에게 색다른 극장의 경험을 선사했다. 코트디부아르의 아비장이란 도시에서 살았다. 그곳엔 극장이 많이 있었던 걸로 기억되는데 나는 그중 한곳에서 나의 9살 10살 시절을 보냈다. 한 스크린에서 다른 영화들이 연속상영이 됐는데 한번 앉아선 그날의 상영작을 모두 보곤 했다. 집 그리곤 해변, 극장, 집, 해변, 극장만을 왔다 갔다 했다. 극장에 갈 때면 3번째나 4번째 줄을 선호한다. 나는 영화의 전체적인 프레임을 내 눈에 다 담고 싶기 때문에, 스크린에서 너무 멀게 앉지 않는다.

한국영화에 대한 느낌은?
내가 한국에 방문하기 전 보아온 한국영화들은 한국 특유의 에너지를 전달해주기에 충분했다. 영상 속에 이미지들은 상상력을 불러일으켰고 한국이란 곳에 호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한국에 처음 온 것은 2004년이다. 주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왔었다. 서울은 6번의 한국방문중 3번밖에 오지 않았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넘치는 에너지에 압도당했고, 이곳에서 만난 한국 영화인들의 친절함에 반했다. 한국 영화감독들과 평론가들을 만나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한국인의 감성도 조금은 배울 수 있었다. 한국 영화에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에너지와 사랑스러운 감성이 있다. 처음 본 한국영화는 1989년에 프랑스에서도 개봉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이다. 그다지 마음에 들었던 영화는 아니지만 영상이 좋았다. 나를 진정한 한국영화의 세계로 이끌어 준 것은 임권택 감독의 영화들이다. 내가 이탈리아의 한 영화제에서 그의 <씨받이>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그의 영화세계에 반했고 그가 만든 다른 작품들도 모조리 찾아보았다. <서편제>또한 굉장히 좋아하는 작품이다. 임권택 감독의 작품에서 묻어나는 한국의 혼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자연스레 한국영화에 빠지게 되었다. 이번 3월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는 홍상수 회고전을 할 것이다. 홍상수 감독이 직접 와서 마스터 클래스도 할 텐데, 굉장히 기대 된다. 나는 그가 현재 세계영화계에서 매우 영향력 있고 중요한 감독 중 한명이라 생각 된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디렉터로써의 갖는 즐거움이 있다면?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진 않았다. 정치학과 법학을 공부했다. 다만 내가 이쪽으로 발을 들이게 된 것은 적절한 타이밍에 맞는 일터와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영화진흥위원회 같은 프랑스의 CNC 라는 곳에서 운영과 행정업무를 보았다. 거기서 1991년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디렉터가 된 도미니크 파이니를 만났다. 그는 당시 영화 제작자였는데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일을 맞게 되었고 나에게 같이 일하자고 제의를 했다. 나는 1992년부터 지금까지 거의 20년이 되도록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디렉터로 일해 오고 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영화를 접할 수 있는 이 일은 시네필인 나에겐 최고의 직업이라고 생각된다. 힘이 닿는 한 계속적으로 이 일을 할 것이다.

시네마테크는 OO다.
시네마테크란 사람과 영화를 위한 공간이다. 모든 영화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상업영화, 독립영화 또는 어린이용 영화, 여성용 영화, B급영화, A급영화, 미국만을 위한 영화, 한국만을 위한 영화로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그런 분류적인 개념에 찬성하지도 않는다. 모든 영화가 분별되는 특징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영화는 영화다. 모든 영화는 시네마 Cinema 라는 한 개념 안에 있는 예술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시네마테크는 고전영화나 어려운 영화만을 상영하는 곳이 아니다. 모든 영화를 아울러 상영하는 극장이다. 모든 형식과 내용, 스타일, 시대 그리고 감성의 영화를 상영하고, 영화를 보러오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공간이 시네마테크라고 생각된다.

(인터뷰 : 시네마테크 서울 아트시네마 관객 에디터 배준영)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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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특별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마련된 '카르트 블랑슈:시네마테크 프랑세즈 특별전'을 맞이하여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프로그램 디렉터 장 프랑수아 로제가 내한했다. 그와 함께하는 세 번의 행사 중 마지막 순서로,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의 진행으로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의 오성지 큐레이터가 패널로 참여하여 장 프랑수아 로제와 함께 시네마테크에 대해 논의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패널들뿐만 아니라 관객들 각자의 시네마테크에 대한 애정과 견해가 오가던 그 시간을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관계자와 함께 하는 오늘은 특별한 자리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2002년에 공식적으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가 전용공간을 빌어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했을 때, 아니 이미 90년대 초부터 비디오테크에서 영화를 상영할 때, 우리에게는 당시 70년의 역사를 갖고 있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정신을 다른 차원에서 한국에서 구현해보자는 생각이 있었다. 그 때 우리의 질문은 세 가지였다.
첫째, 우리는 영화를 보여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들은 우리가 결코 보지 못한 영화들, 극장에서 필름으로 만나지 못했던 영화들일 것이다. 이름으로만 전해졌던, 교과서에만 등재된, 혹은 결코 교과서에도 자주 만나지 못했던 영화들을 소개하는 것이다. 고다르가 <영화의 역사>에서 앙리 랑글루아를 수태고지의 대천사 가브리엘이나,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처럼 묘사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제 영화가 왔다는 것, 또한 그것은 과거에서 온 미래의 영화라는 것을 알려주려 했다. 루이스 부뉴엘, 에릭 로메르, 장 르누아르, 스즈키 세이준, 나루세 미키오, 프리츠 랑, 장 뤽 고다르, 로베르 브레송, 칼 드레이어, 그리고 이번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특별전에서도 상영된 필립 가렐, 장 으스타슈의 영화들이 2002년에서 2003년 사이에 소개되었다. 간헐적인 상영이나 몇 작품의 소개가 아니라, 정기적으로, 그것도 회고전과 특별전의 형태로 작가들의 가능한 작품들을 수급해, 작품들의 관계의 역사를 통해 불타는 필름의 새로운 영화사를 구성해보려는 시도였다. 우리는 영화가 늘 보이지 않는다는 것, 쉽게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러므로 우리의 활동은 영화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둘째, 우리는 과거의 영화를 상영하는 것이 한국영화문화, 그리고 새로운 영화관객들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 90년대 잠시 풍요로웠던 영화문화의 시대가 막 끝나고 있던 시대, 우리는 극장에서 새롭게 영화비평문화의 활력을 만들어보려 했다.
셋째, 우리는 처음부터 작은 시네마테크의 영화관을 영화역사의 박물관, 혹은 도서관으로 생각했고, 새로운 영화의 집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인들을 위한 집이 아니라, 영화를 위한, 영화 역사를 위한 집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우리는 특정한 시대의 영화를 결정짓는 요인 중의 하나가 영화를 보는 새로운 방식과 장소라 생각했다. 새로운 관람환경의 변화, 영화관의 변모에 따라 영화 또한 변화를 겪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질문이 제기됩니다. 더 이상 영화관에서의 영화 관람이 특권화 될 수 없고, 도처에 영상이 범람하고, 어디에서든 영화를 볼 수 있을 때 영화에 어떤 일이 발생할까?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영화가 어디에 있는가, 라는 장소적 질문으로 전환했고 영화의 집, 새로운 영화의 박물관으로서 시네마테크를 생각했다.
시네마테크는 예술의 박물관이자, 영화역사의 박물관이자 동시에 현실의 박물관이기도 하다. 진정한 기억은 과거의 어떤 사실을 고지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기억이 떠오르게 된 장소를 표지하는 것, 발굴되고 탐색되었던 지층에 대해 보고하는 것이듯, 우리는 시네마테크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영화 역사의 기억의 장소가 되길 원했다. 이 세 가지 소망은 여전히 우리가 숙지하고 있는 문제로 남아 있으며, 시네마테크는 여전히 우리의 아름다운 근심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한정된 예산, 제한된 공간, 정치적 관료적 외부적 간섭 안에서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고, 미래는 여전히 석연치 않다. 그러나 시네마테크의 설립 초기의 영혼은 여전히 이 극장에 남아 있고, 우리는 이 일들이 사라지기 쉬운 영화의 생명만큼이나 약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지속될 것을 믿고 있다. 오늘 이 자리는 그래서 특별하다. 우리는 가장 모범적인 시네마테크인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관계자와 함께 시네마테크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장 프랑수아 로제(시네마테크 프랑세즈 프로그램 디렉터): 영화, 즉 필름을 보관한다는 문제는 유성영화가 무성영화를 대체해가던 30년대에 굉장히 중요하게 대두되기 시작했다. 당시 영화에는 엄청난 기술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영화 프로듀서들이 무성영화는 이미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고 필름들을 내다버리기 시작했다. 모든 무성영화가 산업 영역에서 삭제되었고, 장엄한 규모로 파괴되어갔다. 그 결과, 필름을 파괴로부터 보호한다는 문제는 30년대 세계 각지의 젊은 영화 애호가들에게 굉장히 긴박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앙리 랑글루아, 장 미트리, 나중에 감독이 된 조르주 프랑주 등은 필름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해 제작사들을 돌며 필름들을 가져오거나, 심지어 쓰레기통에서 주워오는 방식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그들은 영화가 예술의 한 형태가 될 수 있으며, 지켜져야 하는 예술의 형식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모든 예술의 형식은 각자의 박물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영화의 박물관 역시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아카이브를 만드는 것을 넘어서서 영화의 박물관을 만듦으로서, 영화를 예술의 한 형태로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1936년에 창립되었는데, 이는 세계에서 최초로 생긴 필름 아카이브 중 하나지만 유일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 스웨덴에도 시네마테크가 생겨났고, 미국의 MoMA에도 관련 부서가 생겨났다. 세계 각지에서 빠르게 수많은 필름 아카이브가 개설되었으며, 그 이듬해인 1937년에는 FIAF라고 불리는 국제필름보관소연맹이 창립되었다. 필름 아카이브의 영년이자 시네마테크의 영년인 이 시기는 일종의 첫 번째 황금시대였다고 생각하며,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게는 분명한 황금시대였다. 개척자들의 시기, 영화를 보존하겠다는 목표와 영화 박물관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향해 나아갔던 개척자들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상영을 시작했던 시기는 두 번째 황금기라고 생각한다. 그에 따라 40년대 말경부터 시네필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세대의 영화 애호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결국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랑스의 시네필리아를 탄생시킨 요인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리베트, 로메르, 샤브롤, 고다르, 레네 등의 젊은 평론가들은 그리피스, 채플린, 무르나우 등의 무성영화의 고전들을 포함한 각국의 명작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새로운 세대의 평론가들은 새로운 세대의 감독들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는데, 이것이 바로 ‘누벨바그’였다. 그들에게는 특별한 영화학교가 없었다. 그들의 영화학교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였다. 그러므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시네필 영화감독의 첫 번째 세대를, 정확하게는 의식적으로 시네필릭한 영화감독을 최초로 만들어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60년대에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와 국가 간의 관계에 중대한 위기가 발생하게 된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민간 기관이지만, 운영을 위해서는 국가의 지원이 필요했다. 랑글루아는 대단히 훌륭한 관장이었고, 대단히 훌륭한 프로그래머였지만 훌륭한 재정 관리자는 아니었다. 정부는 그의 재정 운용이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고, 68년 무렵 그를 해임하고 조금 더 친관료적인 인물로 그 자리를 대체하려고 했다. 프랑스를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이에 대한 거대한 저항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고, 당시 가장 중요했던 영화인들은 랑글루아가 복직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 프린트를 제공하지 않겠다며 정부를 압박했다. 그 결과 그들은 승리를 거두었고, 랑글루아는 당해에 관장직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 이후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이전보다 더욱 적은 예산을 받게 되었다. 그 무렵 랑글루아는 영화 박물관을 만들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는데, 그는 영화를 보관하고 프로그래밍하고 상영하는 것뿐만 아니라 영화와 관련된 물품들을 전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70년대에 그는 샤이요 궁 안에 영화 박물관을 개관하게 되고, 영화와 관련된 의상과 포스터 등을 연대기적이고 시적인 순서로 전시했다. 랑글루아는 77년에 사망했고, 그 이후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15년 전까지 정부와의 불화와 화해를 거듭했다. 91년에 도니미크 파이니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디렉터로 취임하게 되면서 정부와의 관계가 안정되었고, 05년에는 파리 동남쪽에 위치한 새로운 건물로 이사하게 되었다. 지금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연간 2000회 이상의 상영을 하는 4개의 상영관, 상설전을 할 수 있는 전시관과 연간 2번의 특별전을 개최하는 특별전시관, 그리고 도서관을 구비하고 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가장 큰 목적은 단 하나다. 영화를 보존하는 것. 영화를 모으고, 보관하고, 상영하고, 영화에 관련된 전시를 함으로써 영화를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동안, 필름을 물리적인 파괴로부터 보존하는 것이 가장 큰 임무였지만, 제작사들이 필름 보존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최근에 들어서 그런 부분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제 영화는 인스턴트적인 기억으로부터 보존되어야 한다.
지금까지도 필름 아키비스트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는 지점이 있다. 일부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것은 영화를 보존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은 영화를 모으고, 지키고, 보관하는 일이지 영화를 상영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너무 자주 상영하면 프린트에 무리가 가게 된다. 그들은 영화를 보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필름을 아카이브 안에 보관해두고 너무 자주 상영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랑글루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프린트를 상영하고 다른 시네마테크나 영화제에 대여해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옳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관객들이 볼 수 있을 때 진정으로 보존되는 것이다. 결국 관건은 필름의 보존과 상영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네마테크에서 프로그래밍을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프로그래밍을 한다는 것은 영화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프로그래밍은 일종의 글쓰기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프로그램의 대부분은 감독의 특별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작업이다. 어떤 감독의 특별전을 여는 것은 그 감독이 위대한 문학가나 화가만큼이나 중요한 작가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프로그래밍은 영화와 영화인들에게 상징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치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부정당할 수 있기 때문에, 프로그래밍은 종종 일종의 내기의 성격을 띠게 된다. 물론 작가의 특별전을 여는 것 외에도 프로그래밍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배우나 테크니션의 특별전을 개최할 수도 있고, 국가별로 영화를 묶어 프로그래밍 할 수도 있다. 또한 어떤 일반적인 주제를 통해 여러 시대와 여러 국가의 영화들을 묶어낼 수도 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역사와 우리 프로그래밍의 역사를 통해 우리의 주요한 관점이 미학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결국 영화를 예술의 한 종류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역사나 과학, 기술이나 사회적인 부분들을 통해서도 영화에 접근할 수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언제나 미학적 접근이 가장 중요하다.


오성지(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 프로그램 큐레이터): 한국영상자료원 역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처럼 전시를 할 수 있는 한국영화박물관이 있고, 3개 상영관을 운영 중이다. 프랑스에는 30년대부터 필름 아카이브 문화가 정착되어 있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굉장히 척박했다. 70년대에 영화진흥공사가 있었고, 74년에 영상자료원이 창립되었는데 당시에는 상영의 기능 없이 필름보관고로만 운영되었다. 90년대 예술의 전당에 있었을 때 시네마테크 활동을 처음 시작했고 그때까지 전시실은 없었다. 2007년에 상암동으로 이전했고, 2008년에 시네마테크 3개관과 한국영화박물관을 열었다. 아마도 지금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와 비슷한 기능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프로그래밍에 대해 고민해왔던 여러 부분이 떠올랐는데, 몇 가지를 여쭤보겠다. 영화에 접근할 수 있는 방식이 굉장히 다양해지고 접근성도 용이해졌다. 개인적으로는 영화가 극장 상영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극장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즘 관객들이 너무 많이 달라진 것도 사실이다. 이 관객들에게 좋은 영화를 보여주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시는지, 요즘의 관객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프로그램은 무엇인지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다.
장 프랑수아 로제: 30년대 필름 아카이브 개척자들의 ‘영화를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은 당시로써는 미친 생각에 가까웠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은 산업적으로 승리를 거둔 것 같다. 시네마테크나 필름 아카이브가 처음 생겨났던 30년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광경이지만, 이제 DVD나 TV 또는 아트하우스 상영관들에서도 고전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당시의 개척자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실천했기 때문에 지금 이런 방식으로 영화를 볼 수 있는 것 같다. 이제 너무 쉽게 너무 많은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시점에 시네마테크의 목표는 이 다양한 영화들 사이에서 특정한 영화들을 선택하고 프로그래밍하여 상영하면서 영화사의 비전을 만들어가고 어떤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어려운 일이겠지만, 시도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가져온 영화들은 일반적인 프랑스 영화사를 보여준다고는 할 수 없다. 여기에는 나의 개인적 취향과 프랑스 영화에 대한 비전이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를 통해서 이를테면, 장 르누아르와 장 으스타슈의 연결 고리를 보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영화들을 함께 프로그래밍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성욱: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90년대부터 이전과 관련해 수없이 많은 디렉터들이 교체되는 상황을 맞았다. 도미니크 파이니 이후에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이었던 세르주 토비아나가 관장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정부와 대타협을 이루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떻게 정부 관료들을 설득해서 그 예산과 공간을 만들어갈 수 있었는지, 그러면서도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법은 무엇인지 듣고 싶다.
장 프랑수아 로제: 정부가 가장 집착했던 문제는 돈이었다. 예산이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 초과되지는 않는지 하는 부분이며 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역사에서 내내 존재했던 문제다. 지금은 운영 체계를 바꾸었고, 정부는 우리의 예산 사용을 제어할 수 있다. 그러나 프로그래밍에는 절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예산을 현명하게 사용한다면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다.


관객1:
프로그램 디렉터가 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영화들을 발견해내고, 가치를 찾아내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 가치를 대중들은 이해하고 공유하기가 어려운 경우도 많은 것 같다. 이런 부분을 위해서 어떤 노력들을 하시는지 궁금하다.
장 프랑수아 로제: 우리는 ‘action culturel’이라는 이름의 부서를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는 영화와 관련된 여러 가지 강의나 대담, 마스터클래스를 개최한다. 그리고 교육을 위해 마련된 부서도 있는데, 여기서는 고등학교나 대학교들과 여러 방면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말씀하신 부분에 공감한다. 프로그래밍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프로그래밍으로 작품이나 영화인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면, 왜 그 이야기를 했는지 설명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앞서 언급한 대담이나 마스터클래스와 같이 그 설명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또 하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는 3개월마다 책자를 발간하고 있다. 거기에 실리는 각각의 프로그램에 대한 짧은 글들 역시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오성지: 요즘 환경 자체가 디지털로 바뀌고 있다. 여전히 35mm 프린트로 상영하는 것을 고집하고 있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비용이 상당하다. 아까 언급하신 FIAF에서도 2년 전부터 모든 것이 디지털로 전환되는 시대에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이때 시네마테크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데.
장 프랑수아 로제: 디지털과 관련해서는 몇 가지 화두들이 있다. 예를 들어, 디지털로 촬영되고, 디지털로 상영되는 영화를 어떻게 보관할 것인가. 두 번째는, 디지털화가 보존에 더욱 적절한 방법일 것인가, 오래된 35mm 필름들은 보존을 위해서 디지털로 모두 변환되어야 하는가. 잘 모르겠지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35mm로 만들어진 영화들은 35mm로 상영되어야 한다. 물론 현실과 이상이 다르다는 것은 안다. 이 부분에서는 실용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 같다. 영화가 만들어진 원래의 포맷으로 상영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좋은 판본의 35mm 프린트를 찾을 수 없을 때는 우리 역시 디지베타나 블루레이로 상영을 한다. 더 나은 선택은 아니지만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김성욱: 시네마테크의 미래에 대해서는 전세계적으로는 비관과 낙관이 교차하는 것 같다. 앞으로 이런 공간들이 계속 지속될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그를 위해서 어떠한 준비들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들으면서 이 자리를 마감하고자 한다.
장 프랑수아 로제: 내가 그 답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많은 시네마테크의 관장들이 '해마다 관객을 잃고 있으며, 기존 관객들은 나이를 먹고 있고, 젊은 관객들은 고전에 별로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사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운 좋게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없다. 2005년에 새로운 장소로 옮기면서 새로운 관객들을 얻었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이 관객을 만든다는 생각도 든다. 결국 가장 적절한 방식은 프로그래밍을 하면서 그 프로그램에 대해 가르쳐주고, 설명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관객들에게 왜 이것을 보여주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면 관객들을 지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관객들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10대에게 히치콕을 극장에서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면, 그는 분명 다시 극장을 찾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관객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우리 자신으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그래야 한다. 이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최근 들어 젊은 층은 고전에 관심이 없다, 시네마테크는 일반대중들을 위한 곳이 아니다, 라는 이야기가 많다. 그렇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시네마테크로 영화를 보러 와야 한다. ‘이곳은 특별한 곳이고, 특별한 영화를 상영하므로 이곳에 와서 영화를 보면 당신도 특별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는 인식을 널리 퍼뜨려야 한다. 관객들을 유지하고 불러 모으는 데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리: 박예하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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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2일, 막스 오퓔스의 저주받은 걸작 <롤라 몽테스>의 상영 후 이 영화를 추천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장 프랑수아 로제 프로그램 디렉터와의 관객과의 대화가 있었다. 개봉 당시 상업적 이유로 제작자들에 의해 함부로 편집되는 불운을 겪었던 이 영화는 반세기가 지난 후에야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대대적인 복원 프로젝트를 통해 감독의 본래 의도에 가장 가깝게 재탄생되었다. 장 프랑수아 로제는 이 자리에서 영화에 관한 이야기 외에도 필름 보존 및 상영 뿐 아니라 복원에 있어서 시네마테크의 역할과 그 작업과정에 대한 뜻깊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훌륭했던 영화만큼이나 흥미와 공감을 불러일으킨 그 시간의 일부를 전한다.


장 프랑수아 로제(시네마테크 프랑세즈 프로그램 디렉터): 우선 이 영화의 역사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영화 뿐 아니라 프랑스 영화계의 역사를 잘 상징해주는 영화다. 감독 막스 오퓔스는 1936년에 독일에서 망명하여 프랑스에서 영화를 만들다가 2차 대전 초에 할리우드에서 몇 편의 영화를 찍고 다시 프랑스에서 4편의 영화를 감독했다. 이 작품은 그의 마지막 영화다. <롤라 몽테스 Lola Montès>(1956)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특히 높이 평가되는데,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롱테이크와 복잡한 카메라 움직임을 좋아했다. 그래서 바로크적인 스타일의 감독으로 불린다. 이 작품은 가장 극단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사실주의의 느낌이 사라지면서 꿈같은 것이 그 자리를 대체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인, 독일인 두 사람의 제작자가 이 영화를 제작했는데. 처음 공개 된 이 영화에 관객들은 거의 폭동 수준의 난폭한 반응을 보였고 평론가들은 완전히 혹평 했다. 상영기간 동안 영화를 본 관객들이 줄 서 있는 관객들에게 영화를 보지 말기를 권유하고 심지어는 경찰들이 자제를 시켜야 할 정도였다. 또한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나쁜 취향, 나쁜 독일 취향의 예라고 말했다. 단지 몇몇 젊은 평론가들만이 이 영화를 지지했는데, 그 중 대표적으로 당시 카이에 뒤 시네마의 평론가였던 프랑수아 트뤼포가 있다. 그는 영화가 너무 전위적이어서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며 다소 공격적으로 이 영화를 옹호했다. 어쨌든 영화는 상업적으로 실패했으나 비용이 많이 든 작품이었기 때문에 제작자들은 영화를 변형시켜 재탄생시켜보고자 했다. 막스 오퓔스 감독은 요양소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몇 달 뒤에는 세상을 떠났다. 영화에 대한 평가가 그의 죽음의 영향을 다소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영화에서 첫 번째로 바뀐 부분은 모든 외국어 대사들, 즉 영어, 독어 대사들이 프랑스어로 더빙됐다는 점이었다. 제작자들은 세계주의적 경향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변화도 그다지 상업적 이익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2,3년 후 국제적으로 개봉 될 때 또 재편집하게 된다. 이 때 플래시백이 모두 사라졌고, 이야기는 순차적으로 재배치되었으며, 내용을 설명하기 위한 내레이션이 추가되었다. 또한 몇몇 장면을 편집해버렸다. 그래서 <롤라 몽테스>는 저주받은 걸작이 되었고 원래 감독이 의도한 부분은 60분 밖에 남지 않았다.

영화인들은 작품을 어떻게 복원해야할지 난감했는데, 1966년 이 영화의 제작사가 파산하면서 이듬해 제작자 피에르 브롱베르제가 영화의 상영권과 그 외 모든 자료들을 인수한다. 그는 처음에 오퓔스가 의도했던 영화로 돌려놓기 위해 이를 재편집했다. 우리는 2007년에야 오리지널 필름을 재발견했다. 오늘 상영된 작품은 이 버전으로, 오퓔스가 처음 편집한 영화와 가장 가까운 버전이다. 이를 위해서는 더 많은 다양하고 복잡한 노력들이 필요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영화 박물관이다. 박물관의 역할은 보존과 전시다. 때로 보존 작업에는 복원도 포함이 된다. 이 역시도 시네마테크의 주 작업 중 하나이다. 이 영화를 처음 버전대로 복원하기 위해서 우리는 브롱베르제의 딸인 로랑스 브롱베르제가 가진 네거티브 필름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처음 봤을 때, 이 네거티브 필름은 온전치 못했으며 복원을 위해, 막스 오퓔스의 아들인 영화감독 마르셀 오퓔스로부터 그의 촬영 당시 제작 노트를 받았다. 그 후 유럽 전체에 퍼져있는 아카이브에서 이 영화의 다른 버전들을 찾았다. 그 중에서 벨기에에서 처음에 의도했던 편집과 가장 유사한 버전을 찾아냈다. 그래서 이런 여러 버전들을 처음의 오리지널 시퀀스대로 재편집을 했다. 이 네거티브 필름의 컬러가 다 사라졌었기 때문에 복원이 필요했으며, 다양한 필름들 간에 각각의 비율이 다르다는 문제도 있었다. 그래서 테크니컬러의 LA연구소로 가서 디지털 작업으로 복원하며 색을 되찾고 화면에 나타나는 잡티들을 제거했다. 또한 많은 버전들이 스테레오 사운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음향을 손봐야 했다. 그리하여 영화는 디지털 프린트 되었고 이를 나중에 35mm프린트로 인쇄했다. 이 필름은 칸느 영화제의 클래식 부문에서 상영되었다. 오늘 상영된 것은 35mm 필름이다. 영화는 디지털 복사본과 35mm복사본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35mm를 좋아한다. 이 영화가 처음에 이 버전으로 만들어졌었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시네마테크는 박물관이며, 이러한 발상은 영화가 예술의 한 형식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만약 영화가 예술이라면 스크린에 상영될 뿐 아니라 필름으로서 보존되어야한다. 복원은 보존의 한 방법이고, 파괴 된 영화를 구해내는 일이다. 이 경우에도 제작자들에 의해 파괴 되었던 막스 오퓔스의 영화가 50년 후에 본래의 버전을 되찾게 된 것이다.

관객1:
최근에 고전영화 복원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만약 오리지널 프린트가 온전히 남아있어서 그걸 복원할 수 있으면 좋지만, 우리나라 하녀의 예도 있고, 오리지널 프린트가 없으면 다른 판본 여러 개를 모아서 제작노트를 참고해서 복원한다. 그런데 이처럼 여러 판본이 있을 때 복원된 완전판만이 정통으로 인정받고 이전 판본들, 손상된 판본들은 잊혀져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판본들에도 접근 가능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장 프랑수아 로제: 그래서 영화를 복원할 때는 윤리적 바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이드라인을 보자면 처음에 감독의 의도가 무엇이었는가가 가장 중요하다. 그가 넣지 않기로 결정한 씬은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 오퓔스의 다른 영화인 <윤무>의 예를 들자면, 제작자가 감독이 이미 편집한 부분을 추가로 넣어서 상영했었는데 이는 옳지 않았다고 본다. 이것이 필요하다면 감독에 의해 덧붙여졌어야 한다. 몇 주 전에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편집된 17분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영화 제작 과정에 있어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줄 수는 있겠으나 아무리 좋아도 영화에 다시 덧붙여서는 안 된다. 또한 영화 복원 중에 생겨난 다른 판본들은 당연히 보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여러 자료들은 이 영화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고 이 작품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알려주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복원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먼저, 손상되었던 영화를 감독의 의도에 가장 가깝게 물리적, 기술적으로 되돌리는 작업이다. 하지만 두번째로, 그 뿐만이 아니라  기술적 복원과 함께 문화적인 재평가, 예술적, 비평적 논의가 병행해야만 한다. 최근 복원과 관련해서 이런 사회, 문화적 맥락까지 충분히 고려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저 영화제에서 군중을 끌기 위한 쇼와 이슈로써만 이용되는 경향도 있어 보인다. 
장 프랑수아 로제: 복원의 과정은 영화에 대해서 알게 되고 배우게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복원을 생각할 때는 조심해야한다. 복원자들 중에 유토피아적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복원이 처음 개봉된 그대로의 영화와 같아야 된다는 생각 등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를 경험하는 상황은 늘 다르다. 우리가 첫 번째 영화와 완전히 같은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기술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현재의 관객이 과거의 관객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의 복원은 영화의 삶의 한 부분이며 일종의 진화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관객2:
영화가 당시 대중들에게 그토록 격렬히 외면 받은 이유가 영화의 완성도 때문인지, 감독의 시각 때문인지, 아니면 혹 페미니즘 때문인지 궁금하다. 또한 이것을 복원하게 된 이유가 이 영화와 감독의 비극적 운명 때문인지 아니면 영화가 이후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인지 궁금하다.
장 프랑수아 로제: 페미니즘과는 관계가 없고 영화의 전반적인 질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서커스 같은 부분이 고급스런 취향으로 보이지 않았고, 여주인공인 당대의 스타 마르틴 캐롤이 영화 내에서 롤라 몽테스의 10대 연기를 하기에는 너무 늙었다고 여겨졌다. 또 감독이 독일 감독이었기 때문에 그의 스타일이 프랑스와는 다르고 좀 더 저질이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영화 복원의 의미라 하면 우선 이 영화가 명작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50년대의 대표적인 영화이며 막스 오퓔스의 가장 극단적인 영화이다. 사실주의적 경향은 축소되고 점점 고독해져 가는 한 여자의 운명과 상상적인 부분이 결합되면서 이미지와 형식적인 부분이 강조된다. 막스 오퓔스는 가장 위대한 영화작가 중 하나이다. 우리는 이것을 다시 찾아내고 싶었다. 그 영화의 제작자들이 영화를 재편집했을 때 영화의 플래시백과 편집 순서, 보이스 오버 등을 다 바꿔버렸기 때문에 영화의 아름다움은 사라졌다. 우리는 영화 본래의 아름다움들을 되찾고 싶었다. 여러 시퀀스가 나눠져 있고 섞여 있고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 또한 서커스 장면의 어마어마한 세트, 이를 연출하기 위해 다양한 장치와 요소들이 들어가는데 이 다양성은 영화를 더 위대하게 한다.

김성욱: 두 시네마테크가 다 비영리 민간법인이라는 점이 비슷하다. 80%란 말로는 감이 안 오실 텐데, 100억 단위가 넘는 예산이기에 사실 비교할 것은 못된다.(좌중 웃음) <롤라 몽테스>를 보면 여자의 운명이 영화의 운명과 오버랩 되는 인상을 받는다. 오늘 이야기 되진 않았으나 이 영화는 여러 측면에서 서정적이고 정중하고 우아하고 아름답다. 그런데도 스타일적인 측면에서는 굉장히 급진적이다. 이것이 종종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지기 힘든 까닭은, 내용이 이해하기 어렵다기 보단 이런 형식적 급진성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리: 백희원 서울아트시네마 관객에디터, 통역: 김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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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보관 중인 12편의 작품을 모아 상영하는 매우 특별한 섹션을 마련하였다. 이 영화들이 상영되는 주간에 맞춰 내한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프로그램 디렉터인 장 프랑수아 로제는 이날부터 3일간의 일정으로 시네토크 및 시네마테크 관련 포럼에 참여하게 된다. 그 첫 번째 순서로 필립 가렐의 <내부의 상처>와 장-마리 스트라우브, 다니엘 위예의 <로트링겐!> 상영 전에 짧은 영화 소개가 있었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이번에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는 시네마테크의 역사 안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보유하고 있는 프랑스 영화를 소개하는 특별전 행사를 열게 됐다. 동시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프로그램 디렉터로 일하고 있는 장 프랑수아 로제 씨를 초대하여 오늘부터 내일 모레까지 이어지는 시네토크 자리를 준비했다. 특히 일요일은 시네마테크와 관련된 포럼이 열릴 예정이다. 오늘은 영화 상영 전에 간단한 영화 소개만 해 드릴 것이다.

장 프랑수아 로제(시네마테크 프랑세즈 프로그램 디렉터): 오늘 관람하실 작품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를 드리겠다. 오늘 보실 작품은 두 작품인데, 하나는 필립 가렐의 <내부의 상처>이고 연이어 보실 작품은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의 <로트링겐!>이다. 이 감독들은 영화적 모더니티의 매우 급진적인 방식을 대표하는 감독들이라 할 수 있다. 필립 가렐은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디렉터인 앙리 랑글루아에 의해 소개되었다. 랑글루아는 30년대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설립하고 77년에 죽을 때까지 시네마테크를 지킨 사람이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수많은 프랑스 시네필들이 무성영화의 클래식들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60년대와 70년대에 앙리 랑글루아는 때때로 관객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관객들에게 F.W.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와 같은 독일 표현주의 무성영화의 걸작을 보여주겠다고 관객을 불러 모은 후, 사실은 그 영화가 아니지만 그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작품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상영한 것이 필립 가렐의 영화들이었다. 이는 필립 가렐의 영화가 아주 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에 필립 가렐 감독의 작품은 극장 개봉이 되지 않았었고, 오로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와 아주 소수의 영화제에서만 볼 수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필립 가렐의 영화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드리긴 어렵지만, 필립 가렐의 영화에서 얼굴은 풍경이고 또 풍경은 얼굴과 마찬가지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오늘 상영할 프린트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90년대에 직접 프린트를 한 것이다. 당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디렉터였던 도미니크 파이니의 주도로 필립 가렐의 모든 영화들을 복원하고 프린트로 만들었다.

<로트링겐!>에 대해 몇 마디 첨언하자면,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는 아주 급진적인 영화감독들이었다. 그들의 특징은 음악적 표현으로서 영화와 문학을 충돌시키는 점에 있었다. 언제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로트링겐!>은 프랑스 작가인 모리스 바레스의 작품을 토대로 했다. 이 소설의 제목은 <콜레트 보도슈>이다. 1870년대 있었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후에 프랑스가 독일에게 넘겨주었던 로트링겐 지방에 대한 소설로서, 가끔 전쟁 중에 우리들의 나라를 잃기도 한다는 사실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을 낭독하는 사운드와 함께 과거에 그 일이 일어났던 실제 장소의 현재 모습을 찍은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세계화에 반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상영본 역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1995년에 직접 프린트한 버전이다.

김성욱: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공개되면서 사람들이 무르나우를 처음 발견했던 것처럼, 가렐의 영화는 시네마테크의 아들처럼 랑글루아의 시네마테크에서 소개가 됐었다. <로트링겐!>은 감독의 요청에 의해 자막이 없이 상영된다. 왜 그런 요청을 했을지 영화를 보면서 느껴보시길 바란다.

(정리 : 박영석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관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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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를 대표하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1936년 앙리 랑글루아, 조르주 프랑쥬, 장 미트리 등이 참여해 비영리 단체로 사라지는 무성영화를 보존하고, 복원하고, 새로운 세대에게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박물관의 기능으로 출범했다. 앙드레 말로의 표현을 빌자면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상상의 박물관이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본격화된 것은 물론 전후의 일이다. 1948년 10월 메신느 거리에 50석 규모의 작은 상영관과 영화 박물관을 개관하면서 시네마테크는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고다르, 트뤼포, 로메르, 리베트, 샤브롤 등의 미래의 누벨바그 감독들은 어느 날 랑글루아의 낡고 허름한 작은 영화의 집을 방문했고 거기서 진정으로 영화의 빛과 마주했다. 그들이 접한 빛은 당시 카누도와 델뤽을 매개로 ‘알고 있다’고 여겼던 영화들, 혹은 주말의 명화에서 접하는 그런 영화들이 아니었다. 젊은 친구들에게 진정한 영화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영화들, 볼 수 없었던 영화들이었다. 혹은, 장 콕토의 표현을 빌자면 ‘저주 받은 영화들’이었다.


랑글루아의 시네마테크는 미학적 저항의 교두보와도 같은 장소였다. 누벨바그리언들이 이곳에서 발견한 것은 영화의 되찾은 시간들, 기억들, 역사들이다. 랑글루아는 50석의 상설관에서 야심찬 기획으로 전쟁의 고아이자 과거가 없는, 혹은 과거를 원치 않았던 아이들에게 진정한 영화의 기억을 선물했다. 그 과거란 결국 언제나 뒤늦은 기억들이다. 이들은 이후에 작가주의를 주창했지만 방점은 언제나 작품에 있었다. 작가 이전에 작품이, 작가 이후에 작품이 존재한다. 작가는 부재하지만 사라진 그들의 작품은 여전히 젊고 영원하다. 누벨바그리언들은 작품에서 부재의 빛을 발견한 자들이었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허식에 가득한 이들이 수다스럽게 본 영화들을 자랑스럽게 떠들어대는 것과는 다른 일이었다. 누벨바그리언들이 발견한 빛은 이제는 사라진 과거의 흔적과 잔재들이다. 시네마테크와 더불어 비평은 그 흔적을 더듬어 작품의 유예된 시간성을 회복하는 작업이었다.


전후, 전 세계를 통틀어 하워드 혹스의 영화를 무성에서 유성영화까지, 그리고 코미디, 스릴러, 서부극, 누아르의 영화들을 모두 볼 수 있었던 곳은 단연 랑글루아의 시네마테크 뿐이었다. 앙드레 말로가 ‘벽 없는 미술관’이라 불렀던 상상의 박물관을 랑글루아는 현실 속에서 실현했다. 영화의 박물관은 영화의 새로운 관계들을 매번의 상영을 통해 회복하는 곳이었다. 범주화나 연대기, 혹은 연상이나 연합에 의해서가 아니라 항구적인 이질성, 생산적인 혼란을 거치면서 영화의 진정한 역사가 창조된다. 랑글루아는 시네마테크의 매번의 상영을 통해 영화의 역사가 과거와의 관계에서 갱신되고 매번 변경된다고 믿었다. 이는 하나의 총체적인 역사가 아니라 일시적이고, 덧없고, 불안정하고 복수적인 영화사의 시간성을 상정하는 기획이었다. 랑글루아의 상영은 영화의 역사를 마치 초현실주의자가 그러했듯이 매번 시공간의 거리와 차이가 있는 영화들 간에 새로운 성좌를 그려낼 수 있게 해주었다. 젊은 비평가들은 랑글루아 덕분에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뒤범벅으로 볼 수 있는 자유를 누렸고, 이는 창조의 자유로 이어졌다. 시네마테크가 없었다면 트뤼포, 샤브롤, 로메르, 고다르의 새로운 영화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68혁명을 거치면서 힘든 1970년대를 보냈다면, 1980년대 이래로 ‘영화의 집’의 건설계획 등을 거쳐 영화박물관의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2005년 영화도서관과 박물관, 시네마테크가 함께 베르시로 이전해 현재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재정의 80%를 국가의 도움으로 받고 있지만 시네마테크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들은 국가의 어떤 간섭도 없이 ‘문화적 예외’의 보호를 받고 있다. 이번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특별전’은 그런 시네마테크의 역사 안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은 프랑스 영화들을 상영하는 행사이다. 새롭게 복원된 영화들, 시네마테크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작가들의 영화, 시네마테크가 발굴한 새로운 작가들의 작품이 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와 함께한 영화들. 이는 프랑스 영화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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