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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스튜디오 다이에 특집: 마스무라 야스조와 이치카와 곤

[스튜디오 다이에 특집 - 시네토크]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에서 공동체성과 촉각성

[특집 : 스튜디오 다이에 특집]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에서 공동체성과 촉각성

- 이영재 영화평론가의 시네토크



오늘은 <세이사쿠의 아내>를 중심으로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가 전후 일본 영화의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이야기해보려 한다. 마스무라 야스조는 전후 일본의 공동체와 개인에 대한 사유를 가장 극단까지 끌고 간 작가라고 생각한다. 일단 마스무라 야스조의 약력을 살펴보자. 그는 1924년생으로 소위 말하는 전중戰中 세대이다.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 초반에 태어난 사람들을 전중 세대라고 하는데, 1945년 패전 당시 이들의 나이는 십대였고 마스무라 야스조는 갓 스무 살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마스무라가 일본에서 국민 교육을 가장 왕성히 받았던 세대였고, 십대 시절에는 자신도 전쟁에 나갈 것이라고 믿었던 세대라는 것이다. 전쟁 자체에 단 한 번도 의심을 품어본 적이 없었던 세대 말이다.



하지만 일본은 1945년에 패전한다. 일본에게 패전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루아침에 하늘과 땅이 바뀌었던 일’이다. 패전으로 인해 지금까지 일본 제국을 구성했던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리고 이때 전중 세대들에게 닥친 회의는 엄청났다.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전쟁에 나가 가미카제로서 죽으려 했던 믿음이 깨진 것이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 뒤 일본에 대한 가장 격렬한 비판을 한 것도 이 전중 세대였다.


마스무라 야스조는 도쿄제국대학(후에 도쿄대학) 법학부 출신이다.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는 일본 제국 관료들의 최고 엘리트 양성소였다. 마스무라 야스조는 이곳을 졸업한 후 1947년에 스튜디오 다이에에 입사한다. 그런데 마스무라는 입사 후 곧바로 1952년부터 1954년까지 이탈리아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일본 영화인으로는 처음으로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의 현장을 익히는데, 이것이 마스무라에게 매우 강렬한 경험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네오 리얼리즘도 패전 후 폐허가 된 이탈리아에서 출발한 영화였기 때문에 전후 일본의 참상과 맞물리는 지점이 있었던 것이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1957년에 <입맞춤>이라는 영화로 데뷔를 하고, 그해에만 세 편의 영화를 찍는다.


마스무라 야스조는 1958년에 “어떤 변명”이라는 평론을 『영화평론』이라는 잡지에 기고한다. 이 글의 요지는 ‘지금까지의 일본 영화는 분위기와 환경에 매몰되어 있었으나 우리는 일본 영화 속에서 진정한 근대인의 형상을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서 ‘메이지 유신 이후에 일본인들은 국가에 의한 억압 속에 있었고 스스로의 본능을 단 한 번도 발휘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이 특히 감동적이다. “우리는 억압된 본능의 잿빛 세상으로부터 벗어나서 찬란한 원색의 세상으로 가야 한다.” 여기서 마스무라가 구체적으로 비판한 영화는 이마이 다다시, 나루세 미키오 같은 감독의 작품이었다. 환경이나 분위기의 영화가 아니라 개인의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것이 마스무라 야스조의 요지였다.


이런 것을 보면 마스무라가 엄청난 개인주의자 혹은 근대주의자라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개인주의나 근대주의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자. 오늘 본 <세이사쿠의 아내>는 1965년 영화이다. 1965년에는 경제개발계획의 자금이 필요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와 베트남 전쟁의 막강한 우방이 필요했던 미국의 필요가 맞물려 한일기본조약이 맺어진다. 그리고 1964년에는 도쿄 올림픽이 열린다. 이 두 사건이 의미하는 것 중 하나는 한국 전쟁으로 경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일본이 도쿄 올림픽을 통해서 자신들의 경제 성장의 성과를 국내외적으로 과시한 것이고, 또 하나는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구 제국과 구 식민지가 각각 국민국가로서 서로를 대면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시기에 <세이사쿠의 아내>가 만들어진 것은 의미심장하다. 전쟁이 끝난 후 근대 국민국가가 마침내 자리를 잡아가는 가운데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원점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청일전쟁에서 시작하고 중간에는 러일전쟁이 벌어진다. 청일전쟁은 일본이 아시아 지역의 맹주임을 알린 전쟁이었고 러일전쟁은 이제 일본이 서구 제국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음을 알린 전쟁이다. 즉 일본 제국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했던 두 전쟁을 이 영화의 배경으로 삼은 것이다. 이를 통해 마스무라 야스조는 국가 그 자체에 정면으로 질문을 던진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오카네(와카오 아야코)가 세이사쿠의 눈을 찔러 그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오카네는 우수한 병사의 신체를 훼손시킨 ‘비국민’으로 전락한다. 그런데 이 맹인의 형상을 통해 이 영화를 다시 볼 수 있다.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 보자. 르네상스 이후 원근법적 시선이 등장하며 시각은 일종의 권력의 형태로 등장한다. 그런데 이 원근법적 시선이 가능하려면 초점과 바라보는 주체가 먼저 세워져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모든 감각 중 시각이 가장 높은 위계 질서를 차지하는 일이 벌어진다. 또한 근대 권력의 어떤 형태와 시각을 결합시키는 가장 명증한 체제로 판옵티콘, 즉 일망감시체제를 예로 들 수 있다. 일망감시체제의 가장 중요한 기반은 보는 자와 보이는 자가 서로 비대칭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즉 감시하는 자는 감시당하는 자를 계속 볼 수 있지만, 감시받는 자는 자신이 감시당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 판옵티콘의 결정적인 성격 중 하나이다. 푸코가 판옵티콘을 언급할 때 굉장히 흥미로운 주석을 달았는데, 벤담이 판옵티콘을 처음 구상했을 때는 청각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아이디어는 죄수 역시 감시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이유로, 즉 비대칭성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바로 배제당했다. 즉 근대에서 시각의 권능은 권력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또 굉장히 재미있는 것은 1960년대 일본 영화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맹목자의 형상이다. 전전戰前 일본에서 가장 중요했던 구호는 ‘일시동인 一視同仁’으로 즉, 천황의 시선 아래 모두가 똑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후 일본의 ‘상징천황’ 역시 보는 자로서의 천황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1960년대 일본 영화에서 시선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영화들이 계속 등장하는데, 그중 하나가 시선을 가진 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오시마 나기사의 <교사형>(1968)이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시선을 잃는 자의 문제를 다루는 <세이사쿠의 아내>가 있다. 시선을 잃음으로써 비국민이 되는 자의 이야기를 그리는 것이다.



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에 오카네가 용서를 구하는 장면이 가장 흥미롭다. 오카네가 눈이 먼 세이사쿠를 찾아 자신을 죽이려면 죽이고, 눈을 없애려면 없애라고 하자 그는 먼저 오카네의 목을 조른다. 그러다 그는 곧 태도를 바꾸어 왜 이렇게 야위었냐고 묻는다. 손을 뻗어 그녀를 만지자 태도가 바뀐 것이다. 그녀를 만진 세이사쿠는 자신의 눈이 멀었기 때문에 비로소 너의 외로움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손의 감각, 촉각을 통해 비로소 가능해진 용서, 혹은 공감이다. 그런데 촉각은 시각과 가장 멀리 떨어진 감각 중 하나이다. 촉각은 손이 닿는 거리에서만 기능하기에 제한적이라면 시각은 그보다 훨씬 넓은 거리에서도 기능하기에 공동체를 관장할 수 있는 감각이다. 그런 점에서 <세이사쿠의 아내>는 촉각의 공동체를 그린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점에서는 ‘촉각의 공동체’라는 것 자체가 일종의 모순어법이다. 시각의 권능으로서 가능해진 근대국가 일본이 이 영화에서는 촉각의 공동체로 그려지는 것이다. 이는 극단적이고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 근대국가 일본에 대한 마스무라 야스조의 역설적인 비판으로 읽을 수 있다.


<세이사쿠의 아내>는 1918년 요시다 겐지로가 러일전쟁을 배경으로 쓴 소설이 원작이며, 1924년에 무라타 미노루 감독이 먼저 영화로 만들었다. 그러나 마스무라는 소설이나 무라타의 영화와는 다른 결말을 낸다. 앞의 소설과 영화에서는 두 사람이 모두 자살을 하지만 마스무라는 두 주인공이 “우리는 여기에서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도 몰라주지만, 우리가 무덤에 묻히면 마을 사람들은 비로소 우리의 마음을 알아줄지도 모른다”고 말하며 밭을 가는 것으로 끝을 낸다. 여자가 밭을 갈고 남자가 밭둑에 앉아있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아마 그는 지금 밭을 가는 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다. 결국 이 영화에서는 시각의 위계질서를 재질문하며 촉각과 청각만이 남는 것이다.


이 작품과 더불어 마스무라 야스조의 <눈먼 짐승>도 이야기하고 싶다. 굉장히 끔찍한 영화로, 한 맹인 조각가가 여자 모델을 납치해 빛이 없는 공간에 감금하는 내용이다. 여자는 처음에는 저항하지만 빛이 없는 공간에 점점 익숙해지며 눈이 멀고 만다. 결국 두 사람은 눈먼 짐승이 되어 서로를 찾아 헤매다 마지막에는 더 많은 쾌락을 얻기 위해 서로의 몸을 조금씩 자르며 끝난다. <눈먼 짐승>은 <세이사쿠의 아내>를 떠올리게 한다. 1960년대의 일본 영화는 국가에 대한 가장 격렬한 비판을 수행했으며 동시에 국가 공동체의 근원까지 들여다 보려 했다. 국가가 개인의 목숨을 살리고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극단적인 상황을 끌어들여 답을 찾은 것이 이 영화이다. 그런데 공동체에 대해 급진적인 상상을 펼치며 그 가능성을 사유한 것이 <세이사쿠의 아내>라면 <눈먼 짐승>은 유사한 인식에서 출발했음에도 어떤 가능성도 비치지 않는다. 단지 파국만이 있을 뿐이다. <세이사쿠의 아내>에는 서로 보듬고 만지는 촉각을 가능하게 하는 두 남녀의 육체가 남아 있지만 <눈먼 짐승>은 그 육체를 하나씩 서로 제거해 버린다. 이 영화가 1969년에 나왔다는 것도 매우 의미심장하다. 잘 알다시피 60년대 일본 사회가, 그리고 일본 영화가 전위적인 공동체에 대해 사유했지만 전공투가 끝난 뒤 결국 정치적인 저항들이 사라지며 파국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와카오 아야코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형상은 주인공인 와카오 아야코다. 그녀의 이미지야말로 마스무라 야스조가 끊임없이 주장하는 근대적 개인의 형상에 가장 부합하는 모습이고,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아내는 고백한다>의 와카오 아야코이다. 그런데 마스무라 야스조는 왜 많은 영화들에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일까. 아마도 마스무라에게 남성은 결국 세이사쿠의 이미지일 것이다. 공동체 안에 정박된 존재 말이다. 반면 마스무라의 여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절대적인 사랑이다. 이 여성이 사랑을 추구하는 순간 사회의 굴레나 법칙, 심지어는 법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이 마스무라 야스조가 끊임없이 와카오 아야코의 여성 인물과 함께 근대적 개인의 영웅적 형상을 만든 이유가 아닌가 싶다.



정리│차예현 자원활동가 / 사진│곽혜원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