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밍량의 영화 속에 그려진 공간과 사람의 관계



                                                    <떠돌이 개>


아이들이 잠든 침대 한쪽에 걸터앉아 천천히 머리카락을 빗는 여인(양귀매). 일단 머리를 빗는 여인의 행동을 인지하고 나면 잠자는 아이들을 지나 그들 뒤의 벽에 시선이 가닿는다. 검은색 바탕에 누르스름한 세로줄 무늬가 불규칙적으로 난 벽은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줄무늬는 누군가가 부러 그어놓은 칼자국 같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 벽지가 벌어지면서 생긴 균열 같기도 하다. 여하간 집이라는 공간에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불길하기까지 한 이 벽은 이들이 점한 공간을 비현실적인 공간 혹은 세트장처럼 보이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차이밍량이 그곳을 세트장처럼 보이도록 의도했는지가 아니라 그곳이 세트장처럼 보인다는 것 자체다. 세트장처럼 보인다는 것은 인물이 그 공간 속에 동화되어 있다기보다는 돌출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공간은 여전히 인물을 인식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이를테면 공간은 머리카락을 빗는 여인의 행위를 일종의 퍼포먼스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이 숏을 힌트로 삼아 우리는 영화에서 인물이 점한 공간과 인물의 관계를 좀 더 눈여겨봐야 한다.


차이밍량 영화에서 공간과 인물의 관계가 중요하지 않았던 적은 거의 없다. <애정만세>(1994)에서 아직 입주자를 구하지 못한 빈 아파트를 둘러싼 세 남녀, <구멍>(1998)에서 바이러스 창궐로 모두가 떠나버린 아파트에 남겨진 아랫집 여자와 윗집 남자, 그리고 두 집 사이에 뚫린 구멍, <안녕 용문객잔>(2003)에서 폐관이 결정된 낡은 극장의 마지막 상영작인 <용문객잔>(호금전, 1967)과 그곳에 모인 사람들. 공간은 사람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중요한 지표였고, 반대로 사람들이 그들이 점한 장소를 설명했다. 이런 공간들의 공통점은 그것이 일시적인 공간이라는 점이다. 곧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구멍>의 아파트와 <안녕, 용문객잔>의 극장이 그랬고, <애정만세>의 아파트 역시 장소를 점한 이들의 시간을 중심으로 본다면 일시적이었다. 차이밍량은 이렇듯 일시적인 시간과 장소를 자신의 영화 속에 박제하면서 일시적인 것을 해체했다. 어쩌면 이것은 2000년대 후반 재개발 이슈에 맞물려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에서 두드러진, 파괴와 사라짐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공간의 마지막을 기록하는 행위와도 통한다.


일시적이든 아니든 거기에는 인물과 관계 맺는 하나의 장소가 있었다. 반면 <떠돌이 개>(2013)에서는 이 공간 자체가 파괴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파괴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공간들은 파편화되었으며 그중 하나의 공간이 주인공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특정할 수 없다는 의미다. <떠돌이 개>에서 공간은 인물이 그곳에 오래 머물면서 시간이 공간에 진물처럼 쌓인 <구멍>이나 <안녕, 용문객잔>보다는 <애정만세>의 아파트와 같은 일시적 공간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떠돌이 개>에서는 <애정만세>의 아파트 자리에 놓을 수 있는 공간이 마땅치 않다. 가장 유력한 공간은 이들이 잠을 자는, 공사가 중단된 버려진 공간이다. 그러나 이 공간은 고정된 장소가 아니라 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앞서 머리 빗는 여인이 등장했던 장면의 배경이 되었던 그 장소는 때로는 전혀 다른 곳처럼 보인다. 첫 장면 이후 엄마로 보이는 여자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고, 아버지 홀로 어린 아이들과 지낸다. 이들이 머무는 침실은 바닥에 깔린 매트리스와 천장에 달린 모기장이 전부인 공간으로 타이틀 시퀀스의 침실과는 전혀 달라 보인다. 그러나 이 두 공간이 서로 다른 공간이라 확신할 수도 없다. 그 두 공간이 위치한 건물은 잔해가 즐비한 버려진 공간으로 동일하다.


만약 이 두 공간을 같은 공간으로 본다면 두 공간이 달라지는 중요한 표지인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등장하는가의 여부가 중요해진다. 세트장처럼 보이는 장소를 배경으로 가족이 등장할 때 늘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때 엄마로 보이는 사람은 매번 달라진다. 배우 양귀매가 차지했던 자리는 후반부에는 배우 천샹치의 것으로 바뀌어 있다. 이 여성들이 공간을 바꾸는 것인지, 공간이 이 여성들을 불러 모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혹은 같은 사람의 다른 표현처럼도 보이는 이들은 불길한 검은 벽이 암시하는 것처럼 실재계에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처럼도 보인다.


<떠돌이 개>


엄마가 없는 세 가족의 침실에는 엄마의 대체물로 마트에서 산 양배추가 등장한다. 딸 이체는 마트에서 양배추를 사 온 뒤 그것을 먹지 않고 여자의 얼굴처럼 꾸며놓고 함께 잠을 자며 양배추를 양배추 여자라고 부른다. 이체가 양배추를 사는 장면에서 마트 직원으로 보이는 여자가 이체를 돕는데 그녀는 차이밍량의 배우 중 한 명인 류이칭이다. 류이칭은 집이라는 공간 바깥에서 때때로 아이들을 돌본다. 그녀는 이체의 머리에서 지독한 냄새가 나는 것을 알고는 마트의 화장실로 데리고 가 씻긴다. 류이칭을 또 다른 엄마로 포함하고, 그녀가 양배추라는 사물로 대체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인물과 공간의 관계는 좀 더 복잡해진다. 공간과 이것을 둘러싼 사람들의 관계는 변하는데 우리는 이것의 선후 관계를 생각할 수 없고, 다만 공간과 인물이 변하며 이때 공간과 인물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머무는 장소는 그것이 변화하기에 일시적인 것과 다를 바 없으며, 결과적으로 그들이 스쳐 지나가는 다른 공간들과 별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곳이 집이든, 마트든, 거리든, 폐허든, 모델 하우스든 어떤 장소가 인물에게 있어 혹은 영화 내부에 있어 더욱 가치가 있는 곳인지를 파악할 수 없다. 아니, 공간의 가치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드러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서사가 흘러나오는 하나의 장소를 탐색하는 대신 그저 한 숏, 한 숏을 서사적 장소처럼 찬찬히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차이밍량의 영화를 보는 데 중요했던 인간과 공간의 관계라는 하나의 지표를 잃었기 때문에 (혹은 이것이 확장되거나 분열되었기 때문에) 각 장면에 대한 해석이나 확정을 최대한 유보하면서 한 화면에서 다른 화면으로 넘어갈 때마다 공간과 인물에 대한 해석을 쉼 없이 교정해 나가야 한다.


장면의 연관 관계를 유심히 들여다봤을 때 마치 힌트를 주는 것 같은 지점이 눈에 띈다. 이를테면 샤오강(이강생)이 강가에 쪼그리고 앉아 오랫동안 흐르는 물을 보고 있는 시퀀스 이후 이전 숏의 대각선으로 흘러내리는 물의 흐름과 대조적으로 대각선으로 상승하는 에스컬레이터를 탄 딸 이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숏과 숏은 기하학적인 추상적 연관성을 띤다. 혹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자연의 흐름과 기계의 흐름의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양새를 나타낸다고 읽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장면 연결을 보자. 영화에서 샤오강이 비 오는 날 광고판을 들고 서 있는 장면이 반복되는데 이 중 한 숏에서 몰아치는 비바람에 샤오강이 넘어질 듯 잠시 비틀거리는 장면이 있다. 다음 컷에서 아들 이청은 화장실 핸드드라이어기 사이에 손을 집어넣어 말린다. 이 장면 연결에 대해서 무어라 구체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관객은 샤오강을 통해 세찬 비바람을 더욱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컷에 등장하는 인간이 손을 집어넣는 행위로 작동하는 기계의 바람은 자연의 바람과 대조적이면서도 유사한 연관성을 지닌다. 인공적인 바람은 인간의 작용이 선행되어야 하지만, 자연의 바람은 인간의 작용에 영향을 받는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차이밍량은 자연을 인식하는 지표로 인간을 세워두면서 그것의 선후 관계와는 무관하게 그 순간 인간과 자연, 혹은 인간과 기계가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 자체를 보여준다.


이런 관계의 변화는 숏과 숏의 연결뿐만 아니라 롱테이크로 지속되는 숏의 내부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타이틀 시퀀스 이후 첫 장면에 거대한 나무숲이 등장한다. 그러나 처음에 우리는 이 나무숲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카메라는 클로즈업을 통해 조그만 것도 얼마든지 거대한 것처럼 보여줄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무의 크기에 대한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 이윽고 나무 뒤에서 남매가 천천히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무숲이 어느 정도 거대한지 실감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물을 사물 그 자체로서 인식하기 힘들다는 점이 드러난다. 우리는 사물을 즉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지만, 그것을 언어화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언어라는 것은 그 순간의 인식이 이미 사라진 뒤에 어떻게든 그것을 붙잡으려는 인간의 노력이다. 극의 서사 역시 인간의 기억력을 좀 더 오래 지속시키는 기능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서사가 없다. 물론 이에 대해 부인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떠돌이 개>에서의 서사는 분절되어 있고 언어는 비주얼화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을 보이게 하는 것은 인간이다. 차이밍량은 기억을 붙잡는 언어의 자리에 인간이자 배우인 이강생을 세워 놓는다. <떠돌이 개>에서 이강생은 차이밍량의 언어이자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언어다.


<서유>


차이밍량은 우리가 살면서 지나쳐도 전혀 특별하게 인식하지 못했을 공간 속에 그의 샤오강, 이강생을 세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일시적으로 조각난 공간 속에서도 감정을 느끼거나, 그런 공간과 맺는 순간적인 관계를 긍정하게 된다. 앞서 예로든 세찬 비바람이 부는 가운데 우비를 입고 서 있는 이강생의 옆에는 또 다른 사람이 우비를 입고 광고판을 든 채 서 있다. 카메라는 이 장면을 오래도록 비추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강생 만이 아니라 이강생 옆의 사람에게도 시선을 돌리게 된다. 또 이강생으로 인해 그가 서 있는 도로의 건너편에 멀리 늘어선 또 다른 광고판을 든 사람들의 역시 눈여겨 볼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인식을 넘어 감정을 불러온다. 이것은 차이밍량의 다음 작품 <서유>(2014)를 예고하는 것 같다. <서유>에서 승려 복장을 한 이강생이 느린 걸음으로 일상적인 공간을 지나갈 때 그의 존재는 공간을 전혀 다른 곳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떠돌이 개>에서는 특정한 공간에서 벗어나 장소들을 일시적인 관계 위에 펼쳐 놓으면서 <서유>에서 펼칠 거리와의 관계 맺기를 앞서 실험한다.


차이밍량은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더는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렇다면 <떠돌이 개>는 영화관과 영화의 죽음에 관한 그의 선언일까. 영화의 처음과 중반 이후에 등장한 검은 벽은 차이밍량이 우리에게 보여준 마지막 스크린이다. 그 벽은 이미 검게 채워져 아무것도 영사할 수 없는 찢어진 스크린이다. 혹은 스크린은 마지막 장면에서 벽 한쪽에 그려진 벽화다. 차이밍량은 그림이 채워진 필름을 영사하는 대신 손전등을 들고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텅 빈 빛을 벽에 비춘다. 그러나 차이밍량은 벽을 비추는 롱테이크 이전에 손전등을 들고 선 사람(천샹치)과 그 뒤를 지키고 선 사람(이강생)을 오래 보여준다.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고 영화는 끝난다. 그들이 오랫동안 그곳에 있었다고 기억해야 할지, 그들이 결국은 떠나버렸다고 기억해야 할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차이밍량에게 그토록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과 그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그 어디라도 상관없으리라는 것만은 알겠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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