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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상영작 소개

인물의 육체, 행위의 기입이 아닌 ‘말’을 찍은 영화

[영화읽기] 장 으스타슈의 <엄마와 창녀>

세르주 다네의 표현에 따르면 장 으스타슈는 '자신의 독자적인 현실의 민족지학자'다. 인류학의 방법론 중에 하나인 민족지학적 방법론은 오랜 시간동안 현지에 머물면서 그들의 삶의 방식들을 몸소 체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민족지학자가 현지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뜻하지 않은 우연적 사건들을 겪을 확률이 높아진다. 그만큼 현지인들의 삶과 문화에 더 젖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 으스타슈는 모럴리스트(moralist)다. 에릭 로메르의 말에 따르면 모럴리스트는 인간의 내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관심을 갖는 사람으로 정신과 감정의 상태에 관심이 있다고 한다. 이 '관심'이라는 말이 어떻게 영화로 표현되는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적어도 <엄마와 창녀>는 인간의 외부적 행위나 사고를 다루기보다는 내부적 세계를 다루는 모럴의 영화다. 즉 <엄마와 창녀>는 인간 군상의 집합적 우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라는 소우주의 개별적 삶에 카메라라는 민족지학자를 투입시켜 넣고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체험하며, 그들의 행위를 영화 안에 기입해 놓는다.

 

먼저, <엄마와 창녀>는 68혁명 이후 프랑스를 가득 메우고 있던 절망적인 분위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68혁명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문제인 성해방 운동과 관련된 사회적 분위기도 다룬다. 그래서 성해방과 관련된 이 (정신분석학적) 제목을 영화 속 인물들과 연관시켜 구태여 도식화를 시켜보자면, '엄마=마리', '창녀=베로니카'다. 하지만 인물들의 숱한 자기현시와 각 인물들과의 관계 양상이 변함에 따라 이런 도식화는 좌절될 수밖에 없다. 베로니카가 마리의 집에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프레임에는 세 명의 인물이 공존하게 된다. 이들은 프레임 안에서 끊임없이 충돌하고 화해한다. 마치 엄마와 창녀는 각각 하나의 개체가 아니고, 한 개체 속에 있는 두 가지 존재 양태인 것처럼 말이다.


극중 인물들은 몇 번에 걸쳐서 "의미가 없다"고 한다. 이것은 현재까지 어떤 고정불변의 의미를 지향하고, 그것을 발견하려고 했던 세대들에 대한 부정이기도 하며, 동시에 68혁명의 실패로 인한 좌절감의 표현일 수도 있다. 영화 속에서 언급되는 현학적인 대사들은 현란한 수사학적 표현으로 그쳐버리고, 또한 무르나우, 베르나노스, 사르트르, 기트리, 카르네 등을 언급하며 모방하는 알렉상드르는 현실의 무게감에 짓눌려 허구의 세계에서 맴도는 듯하다. 자꾸만 내뱉는 의미 없는(혹은 의미가 없어지게 될) 말들은 켜켜이 쌓여 그들을 더 짓누른다.

 

이런 좌절감의 표현은 영화가 택한 색상에서도 드러난다. 채색되지 않은 이미지,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이미지는 영화 속 시간과 날씨에 대한 판단을 모호하게 만든다. 거의 대부분이 클로즈업이라 풍경이 기입된 씬이 비교적 적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마와 창녀>에서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로 손꼽을 수 있는 알렉상드르와 베로니카의 첫 데이트, 즉 첫 산책 장면이다. 어둠 속에서 둘이 걷는 이 장면은 트래킹 숏으로 보여준다. 이 숏은 전 숏과 비교해서 시간의 경과를 알 수 없다. 산책을 시작할 때는 분명 저녁이었는데, 산책 후 집에 들어온 알렉상드르에게 마리가 밤새 뭐했냐고 신경질을 내는 것으로 보아 아침일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그 짧은 트래킹 숏과 전후 숏들과의 시간적 관계가 매우 모호하게 측정된다. 더군다나 거의 대부분의 씬들이 실내, 즉 방안이나 카페에서 시작되고 끝나기 때문에 밤낮 구분이 거의 불가능하다.

 

영화는 매우 경제적인 방법을 채택했다. 길을 걸어가는 장면들은 정말 간소화해서 보여주거나,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초반에 질베르트와 걷는 장면, 카페에서 베로니카의 번호를 따기 위해 걷는 장면 등). 길 잃음, 혹은 길 없음은 답답한 느낌으로 다가오며 어떤 풍경으로 통할 수 있는 경로를 차단한다. 심지어 공간의 이동 시에 조차도 이동하는 숏은 누락되어 있어서 장소가 바뀐 사실을 알 수 있는 지점은 문을 닫고 나가거나, 열고 들어오거나 하는 행위들에서가 전부다. 경로나 통로는 제거되어 버리고, 권태로움이 창출되는 곳들에서만 안주하는 이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인물의 움직임이 주는 운동성, 혹은 행위가 만들어 내는 역동성과는 거리를 두고, 인물들의 클로즈업과 대화를 택한 것이 <엄마와 창녀>가 그토록 관객에게 절실한 느낌을 주는 하나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얼굴의 육체화. 그래서 <엄마와 창녀>는 비록 그들이 나체로 등장하고 있다고 해도 전혀 외설스럽지 않게 느껴진다. 나아가 클로즈업에서의 눈동자의 움직임, 입모양의 변화 등이 더 관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한편 <엄마와 창녀>에는 인물들의 시선의 이동을 담아내는 독특한 방식이 있다. 카메라가 인물이 쳐다보는 곳을 따라 이동하는 숏이다. 시선의 경로를 담아낸다는 것이다. 가령, 오프닝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방문을 나서기 전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는 알렉상드르의 측면을 잡는다. 그리고 그 알렉상드르의 시선을 따라 카메라가 천천히 움직인다. 그리고 그 시선이 닿는 곳에는 마리가 자고 있다. 이렇게 시선의 이동을 카메라가 스스로 설정하는, 관객들에게 카메라를 통해 시선의 이동을 만들어내는 몇 개의 숏들이 <엄마와 창녀>에서 독특한 카메라 움직임이다. 카메라가 담아내는 이 시선의 대상, 즉 영화 속 인물이 보는 대상은 그 인물을 보고 있지 않다. 마리처럼 자고 있거나, 베로니카처럼 뒤돌아 걸어가고 있거나, 빈 공간 혹은 사물이다. 이처럼 시선의 불일치는 쌍방향의 조응이 안 되기 때문에 허무하고 허탈한 느낌을 주며, 영화의 불안한 기운과 어우러져 밤과 낮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상황처럼 영화적 세계를 어긋나게 하고 틈새를 만들어대는데 일조하고 있다.

 

그리고 <엄마와 창녀>는 말(word)을 찍은 영화다. 인물의 육체, 혹은 그 육체의 행위(운동)를 기입하는 영화가 아니라 말을 찍은, 말을 기입한 영화다. 말이 영화의 존재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담배 연기처럼 흩어지는 말들의 과잉, 그리고 그 말들이 가라앉으면서 불러일으키는 침체된 분위기.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엄마와 창녀>는 말이 이미지를 대체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만큼 수 없이 오고가는 말들은 때로는 현학적이기도 궤변적이기도 하며, 귀엽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다. 그리고 물질화된 말들(신문, 책, 음악, 라디오 연설)도 인물들의 말과 함께 계속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다. 심지어 알렉상드르는 일어날 때조차 전화라는 매개를 통해 말을 들으면서 깨어난다. 그래선지 가끔 기계적으로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도 준다. 알렉상드르가 타인의 대사까지도 자신이 생각한데로 읊어주길 바라는 장면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것은 알렉상드르가 전축에서 나오는 음악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장면, 질베르트와의 이별에 대해서 베로니카에게 이야기 하는 클로즈업 장면, 영화 후반부 베로니카의 발언 클로즈업 장면(이 두 클로즈업은 얼굴의 클로즈업, 감정의 클로즈업이기도 하지만 시간의 클로즈업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시간에 밀착되어진 그 느낌이란!) 등의 장면은 전혀 반대다.


또한 몇 차례의 페이드인과 페이드아웃은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시간의 경과를 알려주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영화 자체가 지쳐서 쉰다는 느낌을 준다. 베로니카의 클로즈업의 경우 그러한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창녀는 없다"라는 말을 한 후, 잠시 영화는 눈을 감았다 뜬다. 다른 한편 끊임없는 말들 속에서도 프레임에 잡히는 사람은 청자의 경우가 종종 있다. 쉴 틈 없이 재잘거리는 알렉상드르를 카메라는 잡아주면서도 베로니카가 그의 말을 경청하는 모습을 담아낸다. 어쩌면 둘이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장면은 알렉상드르의 말을 경청하는 베로니카의 표정을 보면서 일 것이다("이렇게 너를 쫓아오다니 너를 정말 사랑하나봐"라는 대사를 할 때도 아련하게 느껴진다).

 

<엄마와 창녀>는 신비롭고 기이한 작품이다. 알렉상드르가 질베르트와의 결혼에 실패하고 베로니카에게 청혼하고 승낙을 받는 긴 과정을 담아 낸 영화지만 좌절감을 끝끝내 떨쳐내지 못한다.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를 들으며 정적을 지키던 마리가 울음을 참지 못하고 무릎에 얼굴이 묻듯이, 알렉상드르가 결혼이라는 현실의 제도에 순응할 불안으로 주저앉듯이, 베로니카가 구토를 하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서 허탈한 웃음을 짓듯이 세 명의 주인공들이 모두 좌절한다. 분명 끊임없이 재잘대고, 장난을 치고, 술을 마시며 놀고 있는 이미지들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끝난 후 좌절감과 피로감에 휩싸인다(220분이라는 러닝타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혁명의 실패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청춘들, 가치관들이 전복되고 의미를 상실한 시대 속 세 명의 인물들의 정신과 감정의 상태는 <엄마와 창녀>가 말을 전면에 내세우며 장시간 동안 아름답지만 슬프게 담아내고 있다. 자신의 내부적 감정적 상태를 아무리 외부적 물리적인 것들로 감추려고 해도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부적 세계의 표출. 그래서 베로니카의 눈물의 독백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지만, 알렉상드르가 독백 중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위해 선글라스를 끼는 장면이 더 기억에 남는다. (최혁규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