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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시네바캉스 서울

[비평좌담]21세기 작가열전 Ⅳ : 마티아스 피녜이로

[21세기 작가열전 Ⅳ : 마티아스 피녜이로]


“이 영화들이 갖고 있는 자유로움이 좋다”

- 유운성, 김성욱 비평대담


“21세기 작가 열전”의 네 번째 주인공인 마티아스 피녜이로에 대한 비평좌담이 지난 8월 11일, <비올라> 상영 후에 있었다. 마티아스 피녜이로의 영화는 낯설고 난해했지만 쉽게 표현하기 힘든 자유로움과 활기가 있었고 배우들의 움직임과 말이 주는 쾌감이 있었다. 아르헨티나 영화의 최근 경향에 대한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었던 이날 비평대담 내용의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전주영화제를 통해 상영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마티아스 피녜이로의 영화 4편을 한꺼번에 상영하는 건 처음있는 일이다. 개인적으로 마티아스 피녜이로는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해 약간의 질투를 느끼고 있다. 심지어 1982년생이다(웃음). 최근 한 인터뷰에서 자신을 아르헨티나-코리안 감독이라고 소개를 하기도 했다. 전주영화제에서 자신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선 마티아스 피녜이로 영화의 특징들과 아르헨티나의 동시대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도 해보려 한다.


유운성(영화평론가)│감독이 25살에 만든 2007년의 <도둑 맞은 남자>가 그의 데뷔작이다. 그때 전주영화제 등에서 받은 상금으로 두 번째 작품인 <그들은 모두 거짓말하고 있다>를 만들었다. 그리고 <로잘린>은 전주영화제의 ‘디지털 삼인삼색’ 중 한 편이었고, <비올라> 역시 전주영화제에서 제작지원을 받아 완성한 영화이다. 그 인터뷰를 보면 아르헨티나에서 투자받은 금액보다 한국에서 받은 금액이 더 많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네 편을 만들었으니 감독의 경향을 벌써 말하는 건 이를 것이다. 그러나 상영시간이 갈수록 짧아지고 있는데, 이는 제작비가 제한적이라서 그런 것이다. 그러다보니 스탭도 소규모로 구성한다. 페르난도 로켓이라는 촬영감독과 계속 작업을 하고 있고, 마리아 빌라르를 포함한 배우도 그렇다. 편집, 사운드 스탭도 거의 같은 사람들이다. 친구들이 서로서로 작업을 도와주는 방식이다. \<비올라>에도 잠깐 등장한 배우는 알렌조 모길란스키라는 젊은 감독인데, 이 사람은 편집까지 맡았다.


마티아스 피녜이로는 지금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처음부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여러 분도 느꼈겠지만 한글자막으로 봐도 내용을 바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웃음). 아르헨티나의 최근 주목 받은 영화는 정적인 영화인데 이 영화는 반대로 ‘말의 영화’다. 그렇기 때문에 비영어권 국가의 프로그래머가 영화를 이해하기가 상당히 힘들다. 감독 본인도 영어 자막을 넣을 때 상당히 고민을 많이 하고 있고, 작업을 할 때마다 편집을 바꾸는 게 아니라 자막을 바꿀 정도이다.


김성욱│왜 이렇게 말이 많을까 생각을 한다. 나도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대사를 따라가기 힘들었다. <로잘린>과 

<비올라>에서 작가가 가진 형식적인 측면이 특히 두드러진다. ‘리허설의 영화’라는 생각도 했는데,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뭐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나중에야 이 사람들이 연극을 연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유운성│<로잘린>과 <비올라>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 하나를 골라 그 중 일부 장면을 영화 속에 삽입한다. <로잘린>은 『뜻대로 하세요』, <비올라>는 『십이야』를 가지고 왔는데, 이렇게 잘 알려진 희곡을 가져온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첫 번쨰는  감독 본인이 셰익스피어를 읽으며 이 작품을 어떻게 영화화할 것인지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를 준비하면서 실제로 친구들과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연극 공연을 준비할 때의 분위기를 영화에 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세 번째는 아주 실용적인 이유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영화가 자막 때문에 워낙 불편함을 줬기 때문에 잘 알려진 고전 텍스트를 영화화해 그런 낯섦을 미리 막은 것이다. 거기다 리허설을 하며 대사를 반복하다보니 뒤로 가면 자막을 읽지 않아도 인물들의 연기에 더 집중을 할 수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영화가 게임을 통한 언어적 유희에 초점을 맞춘다면 세 번째, 네 번째 영화는 본인이 영화를 작업하며 현장에서 느낀 쾌감이나 생생함이 작품 속으로 들어온 것 같다. 공동 작업에서 오는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생생함은 있지만 이야기가 순차적으로 진행된다거나 특정한 메시지가 있는 건 아니다. 또한 <로잘린>에서는 인물들이 준비하는 연극과 실제 관계 사이의 구분이 불명확하다. <비올라>에서는 연극 속 인물과 배우의 이름도 같다.

마티아스 피녜이로는 자신이 놓여있는 아르헨티나 영화사의 전통을 잘 알고 있다. 외국에서 아르헨티나 영화에 대해 선입견을 갖고 있다. 하나는 60년대부터 이어진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적인 영화들이고, 또 하나는 리산드로 알론소로 대표되는 정적인 영화들이다. 그런데 마티아스 피녜이로는 이런 전통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나려 한다. 그래서 이렇게 수다스러운 영화를 만들고 60년대의 프랑스 누벨바그를 많이 언급한다. 특히 자크 리베트를 많이 이야기한다. 그런데 피녜이로는 영화가 묘사하는 상황이나 인물들의 대사가 영화 밖의 현실을 지시하는 것에 반발을 갖고 있다. 그는 영화를 볼 때 설령 줄거리를 놓친다하더라도 매력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영화의 리얼리티는 영화 안에 묘사된 사건의 성격이 아니라 카메라 앞에 선 배우와 그들의 움직임, 말하는 방식, 읊조리는 텍스트에 있다. 그것 말고는 자신의 영화가 지시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즉 카메라와 붐마이크가 지향하는 것 외에 영화는 어떤 것도 지향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피녜이로의 반리얼리즘이자 자신만의 리얼리즘이다. 피녜이로의 영화를 즐기는 방법은 이 영화가 아르헨티나의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인간의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묻는게 아니라 이 영화가 하나의 텍스트를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도둑 맞은 남자>, <그들은 모두 거짓말 하고 있다> 와 <로잘린>, <비올라>가 다르다. 네 편의 영화는 모두 말을 서로 계속 주고 받으면서도 말을 중단시키는 제스쳐가 있다. 말을 할 때 무언가를 건낸다든지 하는 행동들 말이다. 그런데 <로잘린>과 <비올라>는 텍스트의 중단이 영화 속에 구조적으로 들어가있다. 왜냐하면 이건 리허설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배우들이 같은 대사를 반복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연기를 하다 틀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 영화들은 연극과 현실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


김성욱│네 편의 영화에 공통점이 있다면 변장과 위장의 영화라는 점이다. 배우들의 클로즈업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때 그들의 얼굴은 마스크에 가깝다. 게다가 영화가 차용한 셰익스피어의 텍스트는 그 중에서도 위장과 변신의 테마가 도드라진 작품이다. 반복적인 위장과 변신을 통해 무언가 변형되는 과정이 있다. 피녜이로 영화에서 말이 많은 것은 인물의 내면 자체가 텅 비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도 든다. 영화는 희극적인 분위기지만 이 인물들이 사회에서 격리 당했다는 느낌이 있다. 좋게 말하면 자신들의 공동체를 만든 거고, 나쁘게 말하면 자신의 위치가 불확실한 것이다. 그 때 자신의 위치를 확인시켜주는 유일한 것이 말이다. 자크 리베트 얘기도 했지만 동시에 장 으스타슈 생각도 난다. 특히 <엄마와 창녀>에서 주인공이 사회와 접점을 잃었을 때 유일하게 붙잡을 수 있는 것이 말이다. 매 국면마다 말을 통해 사람들의 아이덴티티가 변화하는데, 이 대사들은 메시지를 전달하는게 아니다. 대사 자체가 세계와의 연결점을 획득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유운성│피녜이로 영화의 보는 즐거움은 인물이나 카메라가 만드는 미세한 운동이다. <도둑 맞은 남자>에서 마리아 빌라르는 뛰어 다니고 <비올라>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그들은 모두 거짓말하고 있다>를 보면 대화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도 계속 부지런히 돌아 다닌다. <비올라>가 앞의 영화들과 다른 점은 촬영 방식이다. <비올라>는 거의 얼굴의 영화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클로즈업을 많이 한다. 그리고 포커스 변화가 굉장히 심해서 인물들이 제자리에 가만히 있어도 카메라가 왔다갔다 한다. 포커스가 움직이고, 카메라가 움직이고 인물들이 움직인다. 인물들이 멈춰 있을 때 그 침묵의 순간이 불안하게 느껴질 정도다. 마치 말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혹스나 리베트, 셰익스피어, 장 으스타슈 등에서 말의 영화라는 아이디어를 얻었다하더라도 피녜이로는 이를 극단적으로 활용한다. 말이 존재의 증거가 아니라 그냥 존재 자체다. 말이 중단되면 존재도 사라지는 것이다. 말을 계속 반복 하는 것도 텍스트가 최종적으로 중단되는 것을 지연시키기 위한 것,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한 시도인 것이다. 으스타슈나 리베트의 영화를 보면 그 시대의 무드를 느낄 수 있지만 피녜이로의 영화에서 그런 걸 포착하기는 힘들다.


김성욱│말이라는 게 존재의 변형을 만들기도 한다. <로잘린>에서 여자가 남장을 할 때 카메라가 그 모습을 주의깊게 담는다. 그런데 그때 대사를 하는 순간 인물은 정말 연극 속의 인물로 변화한다. 그런데 그걸 너무 투명하게 보여주니 오히려 애매하고 혼란스러운 점이 있다. 그런 혼란스러움이 매력적이다. 으스타슈나 리베트의 영화는 말이 현실과 관계 맺을 때의 위력이 있었다면 피녜이로의 영화에서는 현실과의 접점에서 갖는 위력이 별로 없다.


유운성│<비올라>나 <로잘린>은 매우 명확한 텍스트를 갖고 시작한다. 아는 사람은 아는 익숙한 내용이지만 이 단단한 텍스트가 영화가 진행될 수록 점점 흩어져 완전히 존재감이 사라진다. 그렇게 밀고 가다보면 흔적과 인용만 남아 심지어 셰익스피어의 텍스트와는 무관한 지경이 된다.


김성욱│이 영화가 부러운 이유 중 하나는 친구들과 하나의 극단처럼 영화를 운영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파스빈더나 리베트도 그랬다.


유운성│파스빈더 처럼 가학과 피학은 없는 것 같다(웃음).


김성욱│가학은 없고 돌아가며 키스를 한다(웃음). 공동성을 전제로 만드는 영화인데 최근 이런 영화가 많지 않다. 코뮌 같은 느낌을 준다. 프리메이슨 같기도 하고(웃음). <로잘린>을 보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연 속에서 일종의 게토를 이루고 연극을 연습한다.





유운성│묘하게 데뷔작부터 남자배우들은 변해도 여자배우들은 계속 출연한다. 변장이란 얘기도 했는데, 이 영화들을 보고 있으면 네 명 정도 되는 여자배우들이 2, 3년 단위로 남자친구를 바꿔가며 살아가는 묘한 커뮤니티를 기록한 영화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이들은 항상 무슨 일을 하고, 또 그 안에서 만났다가 헤어졌다가 다시 돌아온다. 영화에 등장하는 연극의 리허설들은 그 자체로 영화 속에서 완벽한 세계로 성립한다는 생각도 든다. 리베트의 영화를 보면 배우가 리허설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런데 피녜이로의 경우 리허설에서 실제로 넘어가는 변형의 단계가 명확하지 않다. 리허설인 동시에 그 자체로 하나의 퍼포먼스이다. 게다가 이 리허설 중인 연극은 외부의 관객을 염두에 둔게 아니라 자신이 배우이자 관객이다. 그러다보니 폐쇄적인 커뮤니티라는 느낌을 준다. 이 영화가 무대 바깥의 무엇을 지시하는지 물어보면 답하기가 힘들어지는 이유다.


예전에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영화에서 소리를 기록하는 건 사실 마이크가 아니라 배우의 얼굴이라는, 독특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소리가 들려올 때 그 사람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즉 그 소리가 배우의 얼굴에 부딪쳐 어떤 반향을 일으키는지 관찰하면 소리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감독이 어떻게 작업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영화들이 커뮤니티 없이는 나올 수 없는 영화라는 건 확실하다. 이 감독의 영화는 이야기로 구축된 영화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작위적으로 만들어진 영화도 아니다. 대신 어떤 영화들을 얇게 잘라서 붙였다는 느낌을 준다. 어쩌면 다른 형태의 스토리텔링도 가능한 영화. 우리가 쉽게 캐치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 흔적들이 주는 암시를 통해 다른 영화를 재구성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장 마리 스트라우브가 파베세의 원작을 하나씩 옮겨 

<레우코와의 대화>를  만드는 걸 보면서 자신은 셰익스피어로 비슷한 작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김성욱│아르헨티나 내에서 피녜이로가 어떤 위치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최근 아르헨티나 영화에 주목할 점은 어떤 부분인가.


유운성│한국에 소개된 아르헨티나 영화는 주로 파블로 트라페로와 같은 감독의 영화이다. 깐느영화제 경쟁부분에 진출했고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 편이다. 심지어 한국이 공동제작을 했다. ‘예술영화씬’에서 가장 주목 받는 루크레시아 마르텔, 리산드로 알론소 같은 경우는 깐느영화제 등에서 많이 소개를 했고 한국에서도 많이 보는 걸로 알고 있다.


마티아스 피녜이로의 세대에 대해서만 말씀드리자면, 아까 말했던 ‘말의 영화’ 즉 텍스트 자체를 영화가 활용하는 방식을 드러내는 감독들이 많이 등장했다. 이 감독들이 언급하는 자신들의 계보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아르헨티나의 계보이고, 하나는 유럽영화 - 그 중에서도 리베트, 으스타슈, 필립 가렐과 같은 감독들의 계보이다. 자국내에서 이들이 영화적 계보를 찾을 때 꼽는 감독은 페레난도 솔라스, 남미 영화 운동의 글라우베 로샤, 또는 리산드로 알론소,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영화도 아닌 우고 산티아고라는 60년대 감독이다(지금도 활동을 하고 있다). 그가 만든 <인베이전>이란 영화는 기묘하게 정치적이며 ‘말의 SF’인 영화이다. 이 감독들은 이 감독과 이 영화를 자기 세대의 정신적 아버지라고 한다. 2007년 이후 등장한 이 감독들은 자국 영화의 계보를 놓지 않으면서 유럽영화에서 미학적 방식을 수혈 받았다. 주로 영화대학 출신이 많고 대학에서부터 만나 함께 작업했고, 지원제도의 수혜자가 되는 것보다 초저예산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 로테르담영화제, 베를린영화제에서 알려졌고 그후 영미권에도 널리 알려졌다. 이렇게 아르헨티나에서는 리산드로 알론소, 루크레시아 마르텔 같은 주요 작가가 여전히 활동하고 있으며, 피녜이로 세대의 감독들도 말의 영화를 만들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우리는 오늘 그 중 한 명의 감독의 영화를 본 것이다. 국제영화제에서 정적이고 미장센 중심적인 아르헨티나 영화들이 주목 받을 때 이런 영화가 나온 것은 흥미롭다.


김성욱│이 영화들이 갖고 있는 자유로움이 좋다. 다른 방식으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또한 <비올라>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어처구니 없는 노래, 핸드폰 벨소리 같은 노래들이 주는 찡함이 있다. 그런가하면 비애감도 있고, 리베트처럼 4시간 짜리 영화를 안 만들고 60분에 끊는 것도 인상적이다. 영화가 픽션의 세계를 그릴 때 큰 거짓말의 영화가 있고 작은 거짓말의 영화가 있다. 전자가 <설국열차>라면 이 영화는 후자인 것 같다. 큰 거짓말의 영화는 기차가 무한히 달린다는 것과 같은 약속을 관객과 해야 한다. 그런 약속을 공유하지 않으면 픽션이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피녜이로의 영화는 약속 없는 거짓의 세계이다.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 점이 매력적이다., 약속 없이 거짓을 따라갈 때 주는 매혹과 흥미로움이 있다. 게다가 82년 생이라니, 굉장히 주목할만하다(웃음).


유운성│아까 언급한 아르헨티나의 젊은 감독들은 한국보다 더 제한된 환경에서 영화를 보고 있다. 아르헨티나-부에노스아이레스는 영화보기 좋은 도시가 아니다. 하지만 이곳엔  부에노스아이레스 영화제가 있다. 이 영화제는 자크 리베트나 장 마리 스트라우브, 필립 가렐의 대규모 회고전을 하면서 한 달 동안 거의 전작을 상영한다. 이 감독들은 그때 그 영화를 보았고, 영화제가 감독들을 지원했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프리미어 상영을 한 뒤 해외로 나갔다. 시네필의 커뮤니티를 만들어냈고, 그 안에서 이들은 모두 관객이자 프로듀서이자 연출자, 배우들이다.




정리 ㅣ 김보년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팀 

사진 ㅣ 곽혜원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