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특별전/모스필름 90주년 특별전

[리뷰]상실의 시대 - 구로사와 아키라의 <데르수 우잘라>

[리뷰]


상실의 시대

- 구로사와 아키라의 <데르수 우잘라>




<데르수 우잘라>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유일하게 해외에서 합작으로 만든 작품이다. 1971년 구로사와는 <도데스카덴>으로 모스크바영화제에 참석했는데, 당시 모스필름이 러시아 영화계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그에게 영화 연출을 의뢰했다. 모스필름이 처음 제안한 작품은 고골의 『타라스 불바』였다. 이 작품을 <전쟁과 평화>의 세르게이 분다추크 감독이 이미 준비 중에 있었기에 의뢰는 불발로 끝났지만, 이번에는 구로사와 감독이 조감독 시절부터 연출에 관심이 있던 러시아 탐사가인 블라디미르 아르세니예프의 『데르수 우잘라』를 영화화할 것을 모스필름에 제안했다. 구로사와는 일찍이 홋카이도를 배경으로 원작을 일본판으로 각색해 연출할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시베리아를 대신할 자연을 일본에서 찾을 수 없었기에 연출은 성사되지 못했다.


<데르수 우잘라>의 제작 배경에는 당시 구로사와가 처한 개인적 사정도 있었다. 일본 영화의 불황기를 맞아 구로사와는 1965년 <붉은 수염>을 연출한 이후, 근 10년간 세 편의 영화를 만드는 데에 머물러야 했다. <붉은 수염> 이후 구로사와는 할리우드에서 <도라 도라 도라>의 제작에 관여하다 도중에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1970년에 <도데스카덴>을 만들었지만 흥행에 실패해 이후 일본 내에서 영화 제작이 어려워졌다. 그러던 차에 모스필름의 제안이 있었던 것이다.


영화의 원작은 탐사가 블라디미르 알세니예프가 1902년부터 10년에 걸쳐 정부의 명으로 코사크병과 당시 지도상의 공백 지대였던 시베리아의 지도 제작을 하던 중에 우연히 만난 사냥꾼 데르수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블라디미르는 1923년에 『데르수 우잘라』라는 책을 발간했다. 구로사와는 원작을 토대로 2부로 이야기를 구성했다. 1부는 블라디미르의 지질학적 탐사와 안내원인 데르수와의 첫 만남을, 2부는 2차 탐사와 데르수와의 이별을 그린다. 데르수는 가족도 없고 집도 없이 대자연과 함께 사는 고독한 인물로, 시베리아의 생물과 기후를 꿰뚫고 있었다. 블라디미르는 데르수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느껴 지질학적 탐사에 안내원으로 고용한다. 2부는 늙어서 쇠약한 데르수와의 재회를 그린다. 블라디미르는 데르수를 자신의 집에 데려오는데, 자연 속에서 살아온 그에게 도시 생활은 시베리아보다 적응하기 힘든 불모지였다. 데르수는 숲으로 되돌아가지만 어이없게도 불의의 사고를 겪는다.



원래 구로사와는 데르수 우잘라 역에 미후네 도시로를 캐스팅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2년에 걸친 장기 촬영에 난색을 보였기에 현지 러시아 배우를 기용해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캐스팅은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았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진정한 볼거리는 2년 동안 영하 37도까지 떨어지는 실제 시베리아의 가혹한 자연과 사계절의 아름다움이 담긴 영상에 있다. 특히, 영화의 한 장면에서 눈보라 속에서 야영을 하기 위해 블라디미르와 데르수가 풀을 베는 장면이 압권이다. 이들은 눈보라 속에서 발자국이 지워져 되돌아갈 길을 찾지 못하는데, 이때 갑자기 데르수가 필사적으로 풀을 베기 시작한다. 관객들은 블라디미르와 마찬가지로 데르수의 행동에 의아해 할 수밖에 없는데, 이윽고 밤이 되자 거대한 눈보라가 매섭게 불어오기 시작한다. 데루스가 자연의 미세한 변화에 대응하지 않았다면 둘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자연의 물리적 힘을 인물들의 경험했던 방식대로 묘사하려 했던 구로사와의 연출이 돋보이는 순간이다. 이 영화에 대자연을 보여주는 원경 쇼트가 거의 없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구로사와 감독이 포착한 데르수는 자연을 아끼고 존중하고 두려워했던(가령, 영화의 한 장면에서 그는 호랑이에게 엉겁결에 총을 쏜 후에 나쁜 짓을 했다며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대자연과 호흡한 마지막 종족에 가깝다. 그러므로 영화의 기본적인 정서는 상실감에 있다. 영화는 1920년 블라디미르가 데르수의 무덤을 찾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그가 묻혔던 곳은 개발이 진행되어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블라디미르는 절망적으로 ‘데르수’라며 읊조리듯 말하는데, 그 순간 영화는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아간다. 영화의 마지막에 데르수의 죽음은 그가 떠나는 장면이 부재할 만큼 갑작스럽게 도래한다. 우리는 단지 그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전보와 거적때기에 덮여 있는 그의 시체만을 볼 뿐이다. 블라디미르는 그의 무덤에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꽂는다. 흔적조차 남지 않은 데르수의 삶은 단지 블라디미르의 회상을 통해서만 기억될 수 있다. 구로사와는 이후 소련에서 에드거 앨런 포의 『붉은 죽음의 가면』을 <데르수 우잘라>의 스태프들과 함께 촬영할 계획이었지만 이 기획은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