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9일, 브라이언 드 팔마의 83년작 <스카페이스> 상영 후 배우 박중훈과 함께하는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배우 박중훈은 관객들에게 인사를 전하면서 본인을 알파치노로 소개하여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또한 그는 <스카페이스>에서 알파치노의 쿠바 억양이 섞인 영어 대사를 완벽하게 외워 놀라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씨네21>의 주성철 기자와 함께, <스카페이스> 개봉 당시의 추억들로 시작하여 배우 박중훈의 연기관과 한국 영화에 대한 그의 생각까지 들을 수 있었던 그 현장을 전한다.


주성철(씨네21 기자): 바로 영화 얘기를 시작해보자. 이 영화를 언제 처음 봤는지 기억이 나는가.
박중훈(배우): 내 기억이 맞다면 고등학교 2, 3학년 때인 것 같다. 그때 봤던 극장이 종로3가에 있던 서울극장이었다. 나이 드신 관객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그 당시 극장개봉시스템때문에 서울 사대문 안에 있는 개봉단관 한 관에서 개봉했다. 한 관에 좌석이 1000석 정도였고, 하루에 다섯 번 상영하니까 5000천 명만 볼 수 있었다. 영화 표 사느라 장사진을 이룬다는 게 가능했던 때다. 좌석이 1000석이니까 굉장히 큰 화면으로 보면서 거의 실신을 했다. 연극부 생활을 할 때인데, 배우를 꿈꾸면서 살 때 알파치노를 큰 화면에서 마주하고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다.

주성철: 다시 보니까 음악이라든가 여러 가지로 장현수 감독의 <게임의 법칙>이 생각난다. 실제로 <스카페이스>를 많이 참고하셨다고 들었다.
박중훈: <게임의 법칙> 시나리오를 강제규 감독님이 쓰셨고, <스카페이스>의 시나리오는 올리버 스톤이 썼다. 시나리오를 받아보고서는 장현수 감독에게 제안을 했다. 카피를 하자는 게 아니라, 내가 브라이언 드 팔마와 알파치노를 좋아하니 혹시 감독님도 동의가 되신다면 알파치노와 브라이언 드 팔마에게 오마주 영화를 만들고 싶다, 해서 시작한 것이 <게임의 법칙>이다.

주성철: 50번 넘게 보셨다고 했는데, 그러면 매번 보실 때마다 좋아하는 장면이 바뀔 것 같다.
박중훈: 많이 봤다는 걸 강조할 때 100번도 더 봤다고 하는데, 나는 진짜로 50번을 넘게 봤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50번이고 실제론 한 70번 정도 본 것 같다. 대사도 거의 다 외웠다. 그런데 쿠바 억양이 강해서 영어 공부엔 도움이 안 됐다. (웃음) 어떤 장면이 좋으냐면, 토니가 성공해서 어머니한테 거드름피우고, 여동생은 오빠를 좋아해요, 하면서 오누이의 정을 나누고, 그런데 배경 뒤로는 노을이 지고, 주제음악의 멜로디가 피아노로 나오는 그 장면이 굉장히 가슴을 적셨다. 처음 봤을 땐 마약하고서 소리 지르고 쓰러지는 장면이 충격적으로 기억에 남았지만 자꾸 보면서는 정서적인 씬들이 기억에 남는다.

주성철: 알파치노 얘기를 하고 싶다. 다시 봐도 대단한 것 같다. 이보다 앞서서 <대부>에서 마이클로 나올 때는 절제되어 있고, 차갑고 지적인 이미지였다면 여기서는 무모하고 충동적이고 본능적인 캐릭터를 연기했다. 그리고 드 팔마하고 <칼리토>를 할 때는 선량하고 바른 삶을 사는 푸에르토리코사람으로 나오기도 했다. 알파치노에 대해서 다시 보게 되는 것 같다.
박중훈: 배우와 관객들 사이에선 ‘일정 거리 유지 질량의 법칙’같은 게 있는 것 같다. 튀어나오는 배우한테는 관객들이 도망가면서 매력을 느끼고, 숨는 배우에게는 쫓아가려는 매력이 있다. 이 두 매력을 갖춘 배우가 알파치노라고 본다. <스카페이스>에서는 비교적 튀어나오는 연기를 많이 했는데, 알파치노가 나오는 다른 영화를 보면 숨어버리는 연기도 한다. 그런 두 가지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은 배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배우로서 존경하고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 얘기하자면, 여백과 공백은 큰 차이가 있다. 여백은 참아낸 것이지만 공백은 부족한 거다. 그림에서 여백과 공백이 있다면, 연기에서는 ‘포즈’와 ‘마’가 있다. 호흡을 못 쫓아가면 마가 뜨는 거다. 하지만 알파치노는 포즈가 근사한 배우다. 알파치노 연기 특유의 포즈가 있는데, 다른 영화에서도 많이 나온다. 그 포즈가 정말 매력 있다.(일어나서 연기를 보여줌) 알파치노를 보면, 키 작은 사람이 혼자 이렇게 걷는다. 레스토랑에서 자기 아내랑 파국을 맞으며 돌아다니는 장면에도 이런 게 굉장히 많다. 죽을 때도 마치 연극무대에서 배우가 돌아다니듯 서성거린다. 그런데 사실 그게 굉장히 위험하고 굉장히 보기 거슬리는 행동이다. 잘못해서는 겉멋 든 배우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알파치노는 배우 개인의 매력으로 ‘마’를 ‘포즈’로 바꿔버린다.


주성철: 알파치노를 떠나서 브라이언 드 팔마라는 이름 자체가 그 당시 굉장한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박중훈: 개인적으로 브라이언 드 팔마의 실패작까지도 마음에 든다. 백미는 <스카페이스>와 <칼리토>, 최근 <미션임파서블1>까지 포함해서. 드 팔마의 영화는 군더더기 없고, 저속한 표현이지만 한마디로 쌈박하고 힘있다.

주성철: “지금 관객들은 괴롭힘을 당하길 원하는데, 드 팔마는 여전히 관객을 유혹하려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기억난다. 말 그대로 장인 같은 감독이다. 빨리 신작을 보고 싶다. 또 <스카페이스>를 다시 보면서 생각이 난 건데, 코카인을 흡입하면서 콧잔등에 흰 가루 묻히고 있는 장면이 다른 영화들에게 많은 영향을 줬다. 그런 식으로 보면, 영화를 좋아하고 배우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모방하고 따라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것 같다.
박중훈: 사람이 누구를 좋아하고 마음속에 그리고 흠모하면 닮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나 같은 경우엔 브라이언 드 팔마와 알파치노가 특정 행동에 영향을 줬다기보다 영화인생을 사는데 있어 큰 영향을 준 사람임에 틀림없다.

관객1: <스카페이스>의 알파치노 연기는 일종의 과잉처럼 보일수도 있는데, 캐릭터와 동화가 잘 되어 영역을 넘어선 연기가 됐다. 그런 연기를 하기 위해서는 메소드 연기처럼 자기를 버려가면서 연기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행동 계획에 따라 철저히 계산을 해야 하는지 궁금하다.
박중훈: 말씀하신 전제를 보자면, 나는 알파치노의 연기가 과잉된 연기라고 보지 않는다. 다만 과잉된 인물이다. 과잉된 인물을 충실하게 연기한 것이지, 연기가 과잉된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여기 영화공부 하시는 분들에게는 충격적인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영화 연기나 연출엔 법이 없다. 대학교에 영화과가 있는 것이 모순적일 정도로 영화는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연기법이 따로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배우는 좋은 신체를 가지고 건강한 상태로 인물을 이해해야 한다. 연기의 사전적 정의는 ‘주어진 가상을 현실로 믿고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다. <스카페이스>에서 알파치노가 어떤 연기법을 썼는지 분석한 적도 않았고 분석할 수도 없는 거라고 생각한다. 연기 이론이나 연기법 같은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관객2:
배우로서 연기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혹은 배우관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지 궁금하다.
박중훈: 자기가 이렇다, 라고 배우가 보여주는 연기를 관객들이 믿는 순간, 공감하는 순간을 좋은 연기라고 한다. 배우가 그 상황을 믿지 못하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 클로즈업으로 확대하면 실제 크기의 3000~6000배가 확대된다. 관객들은 그걸 어두운 곳에서 선명하게 본다. 배우의 연기가 겉도는지, 거짓말인지 금방 알아내는 거다. 연기에 있어서는 배우가 그 상황을 믿어야 한다. 가끔씩 생각했던 것보다 떨어지는 감독들이 있다. 그때부터 참 미치는 거다. 내가 못 믿는데 어떻게 연기가 되나. 그때가 제일 곤혹스럽다. 그럼 애매한 상태에서 연기를 한다. 그렇게 되면 아주 고통스럽다. 그런 느낌을 많이 받은 영화일수록 안 됐다. 그런데 현장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믿기는 상황이다, 이러면 감독 말 들을 필요도 없다. 내가 느꼈으니까. 진짜는 그 마음을 가지고 있냐, 없느냐다. 물론 그걸 표현하는 방법은 배우가 찾아내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근본은 배우가 감정을 느껴야하는 것이다.

관객3: 원작도 봤는데 브라이언 드 팔마의 <스카페이스>가 더 좋았다. 이런 영화를 좋아하면서 갱스터 영화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민이 있다. 폭력적인 면이 나오는 와중에도 기본적인 도덕관념이 있느냐의 문제가 있다. 그런 지점에서 이 영화는 어떤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나.
박중훈: <스카페이스>는 한 인간의 욕망의 끝을 굉장히 강한 서사로 그린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런 주제 의식이 선명하게 느껴지지 않는 경우에는 폭력적인 영화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의미전달이 잘 되어 폭력적인 묘사가 용인이 된다. 한마디로 선정적으로 이용하느냐의 차이다. 다른 예를 들면, 성인 남녀가 육체적인 관계를 갖는 것은 삶의 한 부분인데 그것이 확대되어 강조되는 경우는 에로 산업영화라고 하지 않나. 폭력도 개연성이 있다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스카페이스>에서는 토니 몬타나가 형벌을 받는다. 가족을 잃고 스스로 파멸의 길로 접어 들어간다. 권선징악을 당한 거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관객4:
영화를 공부하는 건 아니지만 영화 산업에서 일을 하고 싶다. 사소한 것들부터 시작해서 국내 영화 산업이 더 잘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박중훈: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한국영화를 사랑하지 말라는 것. 애국심으로 봐주면 얼마나 지겹고 귀찮은 일인가. 그걸 봐줘야 할 이유가 없다. 두 번째는, 재미없는 영화는 철저하게 외면해야 한다는 것. 조금만 잘못되면 바로 지적해야 한다. 영화인들을 그렇게 몰고 가야 한다. 한국 영화는 절대 애정을 갖고 보면 안 된다. 그냥 영화로 보면 된다. 물론 내가 나온 영화도 포함해서 자유롭게 채찍과 당근을 주길 바란다. 다만 배급에서 독과점이라든가, 제도에 대한 논의라든가 하는 것들은 애정을 가지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주성철: 정말 오랜만에 순도 100퍼센트의 영화를 본 것 같다. <뜨거운 오후>의 알파치노가 생각난다. 요즘엔 그런 연기가 없어서 그립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부탁드린다.
박중훈: 스무 살에 배우로 데뷔해서 27년 동안 40여 편의 영화를 찍었다. 그 긴 세월동안 가장 많이 내뱉은 단어가 ‘관객’이다. 영화는 관객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관객이 있어야 존재하는 게 영화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 중 <스카페이스>가 궁금해서 오신 분들, 옛날 향수를 다시 느끼고 싶어서 오신 분들, 저에 대한 관심이 있어서 오신 분들, 어느 분들이든지 전부 다 감사드린다.

정리|송은경 관객 에디터 사진|최용혁 자원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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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s 2012.02.24 15: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984년 피카디리극장에서 50분정도 분량을 삭제한 채로 개봉했어요


브라이언 드 팔마의 <스카페이스>는 “이 영화를 하워드 혹스와 벤 헥트에게 바친다”는 자막으로 끝난다. 드 팔마의 <스카페이스>는 하워드 혹스가 연출한 동명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것이다. 하지만 올리버 스톤이 쓴 각본은 원작의 골격과 일부 디테일을 따라갈 뿐, 어두운 시카고의 거리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마이애미로, 금주법과 마피아의 시대였던 1920년대는 불법 마약 거래가 횡행하던 1980년대로 바뀌었다.

영화는 실제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에서 출발한다. 영화는 미국이 아닌 쿠바에서 시작한다. 1980년 카스트로는 마리엘 항구를 개방하면서 미국 선주들에게 쿠바의 범죄자들을 싣고 떠나기를 요구했다. 드 팔마는 영화의 서두에서 시대적 상황을 설명하는 자막 이후, 카스트로의 연설, 환호하는 대중, 그리고 망명자들의 모습이 담긴 기록 영상을 보여준다. 이어 주인공인 토니 몬타나가 등장한다. 즉, 현실의 단편들을 따라가다가 보게 되는 것은 드라마틱한 삶을 사는 허구의 영웅이다. 그러나 허구의 영웅은 픽션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부터 빚어져 나오는 것임을 드 팔마의 <스카페이스>는 보여주고 있다.


드 팔마의 토니 몬타나는 원작의 주인공보다 더 심각하지만 보다 인간적이기도 하다. 적재적소에 유머를 배치했던 혹스의 <스카페이스>와 달리, 드 팔마의 <스카페이스>에는 시종일관 비장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원작에는 없었던 토니 몬타나와 아내의 파국, 그리고 목표물의 가족 때문에 토니 몬타나가 청부받은 살인을 포기하는 설정 등은 그의 가족애를 굳건히 하면서 그를 더욱 낭만적으로 그린다. 이는 혹스의 <스카페이스>의 가혹한 분위기와 대조되어 토니 몬타나라는 캐릭터의 ‘인간다움’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토니 몬타나를 욕망만을 쫓는 단순한 살인 기계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돈과 여자와 권력을 전부 차지한 후의 토니 몬타나는 곧 몰락할 듯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후반부의 절정에 다다르면 위태롭던 영화의 에너지는 모두 폭발하고 분출된다. 약 20분간 지속되는 마지막 총격 씬은 가히 충격적이다. 이 시퀀스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스카페이스>를 볼 이유는 충분하다. 아메리칸 드림의 좌절을 단지 코카인에 얼굴을 묻어버리는 것 하나만으로 표현한 알 파치노의 연기 또한 명불허전이다.

(송은경 관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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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드 팔마의 <스카페이스>는 “이 영화를 하워드 혹스와 벤 헥트에게 바친다”는 자막으로 끝난다. 드 팔마의 <스카페이스>는 하워드 혹스가 연출한 동명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것이다. 하지만 올리버 스톤이 쓴 각본은 원작의 골격과 일부 디테일을 따라갈 뿐, 어두운 시카고의 거리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마이애미로, 금주법과 마피아의 시대였던 1920년대는 불법 마약 거래가 횡행하던 1980년대로 바뀌었다.

영화는 실제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에서 출발한다. 영화는 미국이 아닌 쿠바에서 시작한다. 1980년 카스트로는 마리엘 항구를 개방하면서 미국 선주들에게 쿠바의 범죄자들을 싣고 떠나기를 요구했다. 드 팔마는 영화의 서두에서 시대적 상황을 설명하는 자막 이후, 카스트로의 연설, 환호하는 대중, 그리고 망명자들의 모습이 담긴 기록 영상을 보여준다. 이어 주인공인 토니 몬타나가 등장한다. 즉, 현실의 단편들을 따라가다가 보게 되는 것은 드라마틱한 삶을 사는 허구의 영웅이다. 그러나 허구의 영웅은 픽션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부터 빚어져 나오는 것임을 드 팔마의 <스카페이스>는 보여주고 있다.


드 팔마의 토니 몬타나는 원작의 주인공보다 더 심각하지만 보다 인간적이기도 하다. 적재적소에 유머를 배치했던 혹스의 <스카페이스>와 달리, 드 팔마의 <스카페이스>에는 시종일관 비장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원작에는 없었던 토니 몬타나와 아내의 파국, 그리고 목표물의 가족 때문에 토니 몬타나가 청부받은 살인을 포기하는 설정 등은 그의 가족애를 굳건히 하면서 그를 더욱 낭만적으로 그린다. 이는 혹스의 <스카페이스>의 가혹한 분위기와 대조되어 토니 몬타나라는 캐릭터의 ‘인간다움’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토니 몬타나를 욕망만을 쫓는 단순한 살인 기계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돈과 여자와 권력을 전부 차지한 후의 토니 몬타나는 곧 몰락할 듯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후반부의 절정에 다다르면 위태롭던 영화의 에너지는 모두 폭발하고 분출된다. 약 20분간 지속되는 마지막 총격 씬은 가히 충격적이다. 이 시퀀스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스카페이스>를 볼 이유는 충분하다. 아메리칸 드림의 좌절을 단지 코카인에 얼굴을 묻어버리는 것 하나만으로 표현한 알 파치노의 연기 또한 명불허전이다. (송은경: 에디터)



1.18(수) 15:10
1.29(일) 14:30 상영 후 배우 박중훈 시네토크
2.3 (금)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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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드 팔마, 희생자의 비명

‘2011 시네바캉스 서울’이 한창인 지난 8월 14일 오후 브라이언 드 팔마의 <드레스드 투 킬> 상영 후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현대성’이란 제목의 영화사 강좌 세 번째 시간이 이어졌다. ‘브라이언 드 팔마, 희생자의 비명’을 주제로 열린 이 날 강좌에는 김성욱 프로그램 디렉터가 나섰다. 그는 드 팔마는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과감성과 저열함을 끝까지 끌고 온 감독으로 체질적으로 와닿는 부분이 많다고 설명했다. 그가 말하는 드 팔마 영화와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현대성에 대한 흥미로운 지점들을 여기에 옮겨 본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두 종류의 영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보는 사람들의 궁금증을 유발하고, 무엇인지를 따라가게 만들고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이다. 개인적으로는 처음 텔레비전으로 중학생 무렵에 봤었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과 <태양은 외로워>가 그런 작품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오늘 보신 <드레스드 투 킬> 같은 류의 영화로, 고등학교때 보았다. 일종의 체질적으로 몸에 와닿았던 영화다. 영화의 리듬 자체가 몸에 딱 달라붙는 것 같은 느낌이다. 브라이언 드 팔마는 개인적으로 아메리칸 뉴 시네마 감독 중에 체질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나 조지 루카스, 마틴 스콜세지 역시 뛰어나지만 체질적으로 몸에 달라붙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른 작가들보다 드 팔마를 좋아하는 건 이 사람이 갖고 있는 일종의 B급스러운 저급함 때문인 것 같다. 오늘 이 영화를 보면서는 마지막에 리즈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때 했던 말들의 상당수가 드 팔마의 심중을 대변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굉장히 더러운데 너는 내게 매력을 느끼냐’는 식의 말이다. 일종의 도발로, 드 팔마가 자신의 영화로 사람들에게 했던 도발과 비슷한 뉘앙스로 느껴졌다. 7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감독들은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정할지를 두고 고민하게 되는데, 이들은 주로 두 가지 경향을 보였다. 보통의 경우는 할리우드 제작사들이 추구하는 제작방식을 따라가면서 스스로가 갖고 있던 60년대적인 모던한 경향들을 추가해가며, 일종의 고급화를 해가는 방식을 택한다. 드 팔마의 경우, 똑같이 상업적인 세계로 들어가려 했고 <캐리>나 <퓨리> 이후에 실제로 그런 세계로 진입하기도 했지만,당시 할리우드 영화사에서 저열하게 평가되던 하위성들을 끌어당기며 나아갔다. 저급함과 하위성을 정치적 함의가 담긴 언더그라운드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팜므 파탈>을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과감성과 언더그라운드 성격을 이렇게 까지 끌고 온 사람은 드 팔마가 유일하다는 생각이다.

<드레스드 투 킬>은 여러 가지 문제들을 양산했으며 영화가 개봉했을 때 페미니스트들의 상당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흥미롭게 만드는 몇 가지 지점들이 있다. 드 팔마로서는 80년대에 들어 나름대로의 전략을 세웠던 첫 번째 작품이다. 전략이라는 건 이 영화가 왜 히치콕의 영화를 가져왔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드 팔마가 히치콕을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할리우드 고전영화 세계 안에서 끌어올 가장 적절한 대상을 히치콕으로 설정했다는 점을 중요하게 봐야 한다. 히치콕 정도의 작가를 자신의 영화 안에 가져오면 비판이나 비난을 받을 위험이 조금 덜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히치콕을 완전히 패러디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가령, 이 영화에서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살인 장면에서 볼 수 있다. 드 팔마 영화에는 언제나 살인이 등장하며 그 장면들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몇 가지 특징들이 있는데, 첫 번째는 특징적인 도구를 사용한 살인이라는 점이다. 총을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를테면 <바디 더블>에서는 드릴이, <스카페이스>에서는 전기톱이, <자매들>에서는 식칼이, <드레스드 투 킬>에서는 면도칼이 등장한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도구성, 어떤 것이 매개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도구들 때문에 살인의 시각적 표상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비교해보자면, 칼의 종류는 다르지만 <싸이코>의 살인 장면에서도 <드레스드 투 킬>과 마찬가지로 칼로 여자를 찔러서 살해한다. 그러나 <싸이코>에서는 실질적으로 몸에 상처를 만들지는 않는다. 직접적인 피부 손상을 정확히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60년대 무렵까지만 해도 미국영화에서 신체 손상이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드 팔마의 경우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몸에 대한 손상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살해되는 순간의 시각적 표상성의 변화들을 만들어 간다. 다시 말해 편집이나 미장센의 변화를 만드는 것이다. 엘리베이터 살인 시퀀스에서 면도날에 의한 손상은 몸의 상처뿐만 아니라 필름의 프로세스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또한, 드 팔마 영화의 살인 장면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언제나 살인에 증인이 입회한다는 점이다. 드 팔마의 모든 영화들, 특히 오늘 보신 <드레스드 투 킬>에서 살인과 관련된 모든 장면에는 살인자와 피해자 외의 제 3의 인물이 입회하게 된다. 이를테면 이 영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일종의 꿈 시퀀스는 정신병자 같은 사람들이 공연을 보는 것처럼 구성되어 있다. 엘리베이터 살인 시퀀스에는 리즈가 입회해있고, 기차에서의 살인 시퀀스에도 여러 명의 흑인들이 있다. 이는 굉장히 흥미로운 점이다. 살인 장면을 살인자-희생자-관객의 3자 게임으로 구성하지 않는 것이다. 그랬을 경우에 발생하는 감각적인 쾌락을 증인을 경유해 비켜가고 있는데, 여기에는 드 팔마라는 감독에게 영화사적 영감을 준 역사적 건들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그가 언제나 스스로 이야기 하는, 드 팔마의 영화를 특징짓게 된 몇 가지 사건들이 있다. 첫 번째는 베트남전이다. 드 팔마는 베트남전 반전 투쟁의 기운이 있었던 시기에 영화를 시작했던 베트남의 자식이다. 실제로 초기 드 팔마 영화는 굉장히 정치적이었으며, 그가 실질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작가는 고다르다. 물론 안토니오니나 혹스, 히치콕 등을 언급할 수도 있겠지만 드 팔마와 고다르를 연관 지어 생각하는 것은 영화사적으로나 시기적으로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는 정치적인 암살들, 특히 존 F 케네디의 암살이다. 특히 JFK의 암살이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단순히 사건적인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 사건 자체가 미디어를 경유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JFK의 암살 순간은 소리도 없는 8mm 영상으로 촬영되었다. 나중에 파솔리니 역시 이 제프루더 필름에 대해 이야기한 바이지만, 사람의 죽음의 순간이 필름에 기록되었으며 그것은 심지어 한 테이크인 롱테이크이다. 그러나 그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컷들이 필요하게 된다. 이해하기 위해서 그 장면을 분석해야 하는데, 그 분석의 도구로서 영화적 도구들이 필요하게 된다. 그것은 몽타주라 할 수 있다. 이 점은 나중에 <블로우 아웃>에서 명백히 볼 수 있으며 동시에 <드레스드 투 킬>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나고 있다.

<드레스드 투 킬>은 결국 드 팔마 자신에 관한 영화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피터라는 인물은 드 팔마와 거의 동일 인물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 인물을 통해 드 팔마가 이 영화를 만들 즈음의 정신사가 어떠했는지 추측할 수 있다.  피터는 일종의 발명가로, 드 팔마 역시 뭔가 새로운 것을 창안하고 창조하려 했던 사람이고, 스스로 명칭을 정할 수 없는 영화들을 만들어 내었다. 극 중에서도 피터가 기계에 이름을 붙이지 못하고 있자 어머니가 ‘이름은 붙여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는데, 그 때 피터는 그 기계에 피터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 부분은 드 팔마의 자의식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드레스드 투 킬>은 드 팔마가 연출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전권을 구사한 첫 번째 영화였기 때문에 그의 자의식이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피터는 자신의 발명품에 스스로의 이름을 붙여줌으로서 그것을 자신이라고 여기는데, 이를 바꾸어 말하면 자신의 더블로서 기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드 팔마는 영화에서 언제나 더블을 만들어 낸다. <바디 더블>, <캐리>, <퓨리> 모두가 그 예라고 볼 수 있는데, <드레스드 투 킬>에도 수많은 더블들이 존재한다. 피터와 리즈의 대화 장면에서 피터는 ‘컴퓨터 만드는 것을 중단하고 내 안에서 여자를 한 명 만들어야겠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여자를 창조한다는 것이 이 영화에서 드 팔마가 보여주는 더블의 세계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 영화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엘리엇과 바비 간의 더블 관계는 히치콕의 <싸이코>에서 빌어 온 것이기 때문에 드 팔마 스스로 창조한 부분은 없다고 볼 수 있다. 고로 그 둘 간의 더블 관계에 집중해 전체적인 내러티브를 해석했을 때 <드레스드 투 킬>은 단순한 <싸이코>의 재탕이며 드 팔마는 뛰어나긴 하지만 결국 히치콕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메리칸 시네마의 작가 정도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안이하다. 이 영화에는 그외에도 수많은 더블들이 있으며, 이들을 다 연관 지어 전체적인 영화를 되돌아보아야만 한다. 떠오르는 대로 이야기 해보면, 먼저 피터는 드 팔마의 구현체로서 더블을 이루고 있고, 극중에서 자신이 만든 기계와도 더블을 이루고 있다. 이는 영화를 만드는 작가의 무의식과 영화 이미지 간의 더블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드 팔마는 지속적으로 이런 관계를 영화에 등장시키곤 한다. 또한 케이트는 당연히 리즈와 더블을 이루고 있다. 이 점 또한 <싸이코>와 다른데, <싸이코>에서 마리온과 그 여동생이 일종의 짝을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여동생의 존재성은 미미할 뿐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케이트에서 리즈로 전이되는 과정이 굉장히 중요하며, 이는 엘리베이터 시퀀스가 보여주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살해당하는 케이트가 내미는 손을 잡는 또 다른 손이라는 설정은 리즈가 단순히 하나의 목격자를 넘어서 케이트의 더블로 형성됨을 보여준다. 동시에 리즈 역시 더블을 갖고 있다. 이런 수많은 관계들을 통해 반복되는 장면들이 나타나며, 영화가 전체적으로 순환성을 갖게 되기도 한다. 결국 이 더블이라는 부분들을 어떻게 적극적으로 읽어나가는가, 또 더블의 관계가 가장 집중적으로 표현된 피터라는 인물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부분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는 또한 <캐리>에서부터 기원한 영화들의 궤적에서 보자면 일종의 홈무비다. 즉, 가족에 관한 영화라는 말이다. 이 영화 바로 직전에 드 팔머는 <홈 무비>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영화의 마지막에 리즈와 피터가 함께 하는 것, 이 둘의 결합은 중요하다. 리즈는 악몽 속에서 깨어나 비명을 지르는데, 그 순간 피터가 달려온다. 앞서 말했지만, 영화의 카메라는 소리를 담아내지 못한다. 거기에는 영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케네디의 죽음의 순간을 담아낸 영상도 마찬가지로 소리는 담겨있지 않다. 비명소리를 담아내는 것, 그것이야 말로 드 팔머가 추구했던 것이다.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알랭 레네의 <밤과 안개>의 마지막 말은 이 영화와도 연결된다. '폐허를 보며 괴물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통의 절규에 귀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다. 희생자의 비명소리를 듣지 못하는 한 역사의 끔찍한 사건은 반복될 것이다. 드 팔머는 다음 영화로 <블로우 아웃>을 만들었고, 거기서 녹음기사인 존 트라블타는 희생자의 비명소리를 영상에 넣게 된다. 물론 그것은 대단히 비극적인 미국의 초상이다.

(정리: 박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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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릴없이 미술관에 앉아 있었다. 무슨 전시였는지는 가기 전에도 몰랐지만 보면서도 잘 몰랐다. 사람이 크게 붐비지 않은 걸 보니 인기 있는 작가는 아니었지 싶다. 그림체가 일관되지 않았던 걸 보면 개인전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단지 나는 섹스를 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미술관에 앉아 있었던 거니까. 매일 집에서 집밥 같은 섹스가 있기는 있어 왔다. 허나, 엄밀히 말하면 그건 성행위를 모사한 집안일에 불과했다. 성감도 뭣도 없이 마냥 고단한 노동일 뿐. 어쩌면 내 팔자의 섹스는 고작 이런 식으로 끝나버릴지 모르겠다는 상실감에 명상삼아 머리도 씻을 겸 세 시간쯤 벽을 보고 있고 싶었는데, 벽만 마냥 봐도 미쳤다 소리 안 들을 공간이 미술관 말고는 딱히 떠오르지를 않았다. 그래서 나는 미술관에 마냥 앉아 있었다. 한참 그렇게 있으니 현실 감각도 좀 되돌아왔다. 집에 가는 길에 칠면조를 사가야 한다는 사실도 떠올랐던 걸 보면. 그런데 그 순간, 정말이지 기적처럼. 나는 ‘세상이 두 쪽 날지라도 지금 당장 섹스를 해야만 할 것 같은’ 낯선 이를 만났다. 미술관에서 섹스를 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다니 도무지 말이 되지를 않지만, 그보다 더욱 비현실적이었던 건 그 다음이었다. 눈이 마주친 우리는 서로 몇 차례 더 시선을 교환하게 됐고, 합승을 가장한 택시 뒷좌석에서 마른하늘의 날벼락보다 더 기막힌 섬광처럼, 섹스를 하게 됐다. 택시 기사의 노골적인 염탐질도 아랑곳 않고 계속 되던 행위는 그 사람의 집까지 이어졌고, 밤새 우리는 맺힌 욕망을 짐승처럼 풀고 털고 뱉었다. 그건 눈물이 쏙 빠질 정도의 근사하고 우렁찬 섹스였다. 자, 여기까지만 보면 이건 꽤 완벽한 엔딩이다. 허나 그 후의 에필로그는 말하자면 별로 유쾌하지 않은 쪽이었다. 제정신이 돌아온 후 황급히 그 사람의 아파트에서 빠져나오던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면도칼로 난자되어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목격자들이 있었던 와중에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 한 채 말이다.”


<드레스드 투 킬>의 초반 30분을 대략 정리하자면 이런 식일 것이다. 글로만 읽으면 개연성과 진부함의 경계 위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는 듯 보인다. 무엇보다 단선적이지도 않고 미묘하고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캐릭터의 감정을 어떻게 영화로 풀어낼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를 않는다. 이 감정들을 커트 단위로 썰어 내다보면 얼마나 많은 뉘앙스들이 휘발되겠는가. 자칫하면 그냥저냥 졸속 제작되는 에로물들과 차별점 하나 없이 딱 그 짝이기 십상 아니겠는가. 이런저런 의구심과 의혹이 가짓수 많게 펼쳐지기 마련인데, 구태여 그걸 스스로 누를 필요는 없다.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 모든 기우들은 순식간에 부서져버리기 때문이다. 30분짜리의 거대한 오프닝 시퀀스는 단 한 호흡으로 휘몰아치며 쉼 없이 질주한다. 지독히 처절한 상실감부터 우아하고 짜릿한데다가 손에 잡힐 듯 구체적인 성감, 보는 사람의 뇌와 가슴에까지 반드시 생채기를 내고야 마는 살인까지. 그게 전부, 쉼표 하나 없이 덩어리 딱 하나로 그냥이다. 프레임 바이 프레임으로 잘라 뜯어보더라도 연출의 섬세함과 치밀함은 부실한 구석을 찾기 힘들다. 영화 속 여성의 가슴 노출 횟수, 베드신 등장 횟수, 살인 음모 반전의 타이밍 맞춘 플롯 포인트까지, 투자자의 요구에 모범답안을 정확히 제시하는 와중에도 감독 스스로 끝까지 유희하는 밸런스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이건, 깎아지른 완벽이다. ‘모름지기 이런 것이 상업영화’라는, 다음 세기가 되더라도 명증한 레퍼런스의 하나로 남을 작품임에 틀림없다.

글/이해영(영화감독 <페스티벌> <천하장사 마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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