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특별전/주앙 세자르 몬테이로와 친구들

<특집>주앙 세자르 몬테이로와 친구들 - 페드로 코스타의 퇴거의 영화

페드로 코스타의 퇴거의 영화

 

90년대 말에 페드로 코스타는 리스본의 폰타이냐스 지구에 관한 두 편의 영화, <>(1997) <반다의 방>(2000)을 만들었다. 이 지구의 거주민들 대부분은 과거 포르투갈의 식민지령이었던 서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다. 2006년에 만든 <행진하는 청춘>도 동일한 거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데, 상황이 이제 달라졌다. 한창 개발이 진행되어 거주민들이 근대적 집합주택으로 강제이주 당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퇴거 지구를 떠도는 아프리카계 초로의 남자 벤투라의 (행진하는) 발걸음을 따라간다. 그는 망자처럼 떠돌고 방황한다.



흥미로운 것은 벤투라의 여정 중에 의외의 방문지가 있다는 것이다. 영화의 초중반부 무렵에 그는 리스본의 칼루스트 굴벤키안Calouste Sarkis Gulbenkian 미술관을 방문한다. 아무런 맥락 없이 그가 미술관의 벽 한구석에 서 있기에, 그가 딱히 회화에 관심을 보였던 것도 아니기에 이 장면은 마치 꿈처럼 보인다. 이 장소가 유별난 임의적 배치라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허나, 공간의 성격만으로 보자면 꽤 의외이긴 하다. 설명의 실마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코스타는 이 연결을 두고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이 있다. “그것은 명확하다. 벤투라가 이 장소에 오고 싶었던 것은 그림에의 정열 때문이 아니라 그가 석공이었던 때에 그림이 걸려있는 벽을 건설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벤투라에게 미술관은 회화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장소성으로 의미를 갖는다. 그는 미술관 건설에 참여했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벤투라는 미술관에서 쫓겨나고, 바깥의 숲 속에서 자신의 과거를 술회한다. 1972, 8 19. 벤투라는 아프리카를 떠나 400명의 이민자들과 함께 포르투갈에 도착했고, 곧바로 미술관 건설현장에 보내졌다. 벤투라의 기억은 폰타이냐스 지구 이민자들의 역사의 한 단면을 회고하는 것이다. 코스타는 이미 1995년에 이런 주제로 <용암의 집>이란 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이민자들의 고향, 즉 과거 포르투갈령이었던 서아프리카의 카보베르데 쪽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기억의 여행을 다룬다.



벤투라가 미술관에서 추방되는 장면에는 회고 이상의 다른 함의가 있다. 미술관에의 경멸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장면은 자크 랑시에르가 코스타의 정치학과 관련해 말했던 것처럼 예술적 표상과 관련이 깊다. 벤투라는 이중적인 퇴거 명령을 받은 셈이다. 그 하나가 폰타이냐스 지구에서의 쫓겨남이라면, 이번에는 예술적 퇴거 명령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삶을 담아내지 못하는 예술적 상황에 대한 은유. 박물관의 문턱을 낮추고 문을 개방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이들의 경험을 담아내는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다. 그들의 생을 카메라에 근접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내심과 긴 호흡이 필요하다. 코스타는 한두 달에 완성하는 영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법을 시도한다. 매일 그들의 말과 제스처를 기록하고 발걸음을 담아내야만 한다. 단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비밀에 접근하는 실천을 위해서다. 그럴 때, 영화는 그들의 노동, 경험, 감각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에 가까워질 것이다. 낮의 미술관에서 배제된 이들을 위한 밤의 미술관으로서의 영화가 필요하다. 퇴거당한 이들을 위한 거주지로서의 영화


<행진하는 청춘> 촬영 현장에는 디지털 카메라와 녹음기, 삼각대 등의 최소한의 기자재가 전부였다고 한다. 조명은 사용하지 않았고 거의 자연광으로만 촬영됐다. 촬영 기간은 15개월. 6일간의 촬영과 반복된 테이크들. 기록된 영상은 60분 테이프 분량의 320. 출연자들은 주인공 벤투라를 포함해 기성의 배우는 한 명도 없었다. 카메라에 담긴 현실은 가족을 포함한 공동체의 붕괴와 더불어 귀속할 곳을 찾지 못했던 이들이 타인과의 관계를 새롭게 모색해야 하는 곤란한 경험의 순간들이다.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처럼 영화의 장면들 또한 시간적 전후관계나 공간적 위치가 불분명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불완전한 연결은 전체성을 상실한 그들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반영한 결과다.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150분간을 아주 느릿하게 걸어온 이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있다. 벤투라가 침대에 누워 잠깐 잠이 든다. 한 여인(그녀는 <반다의 방>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반다이다)이 그에게 아이를 봐 달라고 부탁하고 집을 나선다. 침대 옆의 아이는 옹알거리고 벤투라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린다. 모든 것이 나른한 상태에 놓여 있다. 이야기의 필요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가장 관조적인 순간이다. 코스타 영화의 정물성을 지적한 제임스 퀀트는 이 마지막 롱테이크가단지 부동성과 탈진감, 과거에 그쳐버린 인생의 감각을 모으고 있다. 그것은 조용한 힘으로 사람의 가슴에 와 닿는다라고 말했었다. 우리는 이 순간 그의 영화 제목이기도 한 브레송의 이 말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것도 바꾸어서는 안 된다. 다만,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김성욱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