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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버스터 키튼 특별전 - 퍼스트 액션 히어로

버스터 키튼과 영화의 관계에 대한 단상들



버스터 키튼과 영화의 관계에 대한 단상들

1.

버스터 키튼은 영화가 발명된 1895년에 태어났다. 물론 이는 작은 우연일 뿐이지만 버스터 키튼의 영화들을 보고 있으면 이 우연이 마치 어떤 운명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영화와 키튼이 특별한 관계를 맺었던 건 아니었을까, 라며 다소 낭만적인 상상에 빠져보는 것이다.

버스터 키튼은 걸음걸이를 겨우 땠을 무렵부터 부모와 함께 보드빌 무대에 섰다. 그리고 그 후로도 계속해서 무대에 오르며 특별한 ‘기술’을 익혔다. 바닥에 넘어지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각종 탈 것을 능숙하게 다루는 그런 기술들 말이다. 즉 그는 어린 시절부터 몸동작만으로 관객을 끌어당기는 법을 배운 준비된 배우였다. 22살인 1917년, 버스터 키튼이 영화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도 그때까지 갈고 닦은 기술 때문이었다. 그의 배우 데뷔작인 <푸줏간 소년>이 엄청나게 뛰어난 영화라고는 말하기 힘들지만 키튼은 이 영화에서 누구보다 가볍게 엉덩방아를 찧으며 웃음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카메라는 그의 그런 몸짓을 필름에 기록하였다.


결과적으로 버스터 키튼과 영화의 만남은 모두가 만족할 만한 성과를 이끌어냈다. 영화는 어트랙션 attraction, 즉 ‘볼거리’를 얻었고 버스터 키튼은 자신의 움직임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단을 얻었기 때문이다. 즉 서로가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관계였던 셈이다. 게다가 1910년대의 영화는 이미 단순한 볼거리 뿐 아니라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로서의 능력을 확립했고, 또 발전시켜 나가는 중이었다. 당시 관객들은 영화가 들려주는 가상의 이야기에 자연스레 몰입하는 것은 물론, 각기 다른 배경의 숏이 연이어 등장해도 이를 연결시켜 이해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학습되어 있었다.

영화와 만난 버스터 키튼은 이런 토양을 바탕으로 ‘이야기’라는 그릇에 액션을 담을 수 있었다. 몇 개의 동작만으로도 밀도 높은 감정을 만드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카메라맨>에서 버스터 키튼이 도로를 질주하는 장면을 보자. 여기서 키튼은 그냥 계속해서 달릴 뿐이지만 이 단순한 신체의 반복적 움직임에 사랑하는 여자를 조금이라도 일찍 만나야 한다는 맥락이 더해지자 큰 감동이 발생한다. 키튼의 액션이 영화의 화법과 이야기를 만나면서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키튼이 1895년에 태어났다는 사실은 어쩐지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그는 영화가 스토리텔링 매체로서의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한 뒤인 1910년대 후반부터 이십 대의 신체와 함께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키튼은 약 십 년 동안 이어진 전성기 동안 감독으로서도, 배우로서도 최상의 결과물을 선보이며 관객들을 웃기고 울렸다. 그리고 영화는 유성 영화 시기로 넘어갔지만 초기의 유성 영화 제작 환경에서는 기술상의 문제로 배우들이 마이크 앞에서 움직임의 제약을 받아야 했다. 상상해 보자.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버스터 키튼이 어떤 영화를 찍을 수 있었을까. 이후 알콜 중독 같은 개인적인 문제들까지 겹치며 버스터 키튼의 경력은 서서히 내리막길을 걸었고, 칠십 살의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전성기 때와 같은 활약을 다시 펼치지 못했다. 결국 우리가 버스터 키튼의 이름을 들을 때 떠올리는 모습은 그의 인생에서 그리 길지 않았던, 기적과도 같은 짧은 순간의 이미지였던 셈이다.



2.

버스터 키튼은 영화에 출연한 바로 그해에 <The Rough House>를 만들며 감독으로 데뷔했다. 비록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찰리 채플린이나 로이드 해롤드의 인기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키튼은 꾸준하고 왕성하게 창작 활동을 펼쳤다. 그는 1921년부터 1930년까지 단편을 포함해 35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그중 27편을 직접 연출했다(그 후로는 7편의 단편만 연출하였다).

이 시기의 영화들은 모두 각자의 재미와 흥미로운 지점들을 갖고 있지만 그중 좀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건 ‘영화’ 그 자체를 소재로 삼은 작품들이다. 영화의 바깥에서 경력을 시작해 영화 안으로 들어온 키튼이 이제는 영화를 이야기의 소재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놀라운 건 그 작품들이 영화의 존재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영화를 어떤 특정한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영화가 가진 양가적 속성들을 번갈아가며 드러내는 쪽에 가깝다. 그는 영화를 현실의 결핍을 채워줄 어떤 환상적인 세계로 보는 동시에 자동 기계 장치의 냉정한 움직임으로도 보았다. 이를테면 <셜록 주니어>가 그리는 영화와 <카메라맨>이 그리는 영화가 서로 얼마나 다른지 한 번 떠올려보자. 하지만 키튼은 그 차이 앞에서도 특유의 무표정을 고수한 채 서로 다른 영화의 상像 사이를 아무렇지 않게 오고 간다. 그렇기 때문에 키튼의 정확한 생각을 읽을 수 없어 가끔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어쩌면, 키튼은 그 둘 모두가 영화의 고유한 성격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3.

<셜록 주니어>(1924)의 주인공인 키튼은 작은 극장의 영사 기사이다. 그리고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탐정이 되는 법”이란 책을 틈틈이 읽는 탐정 지망생이기도 하다. 키튼은 지금과는 다른 삶을 꿈꾸지만 그 꿈을 현실에서는 이루지 못하고 있다. 마침 범죄가 발생하자 기다렸다는 듯 탐정 흉내를 어설프게 내지만 우스꽝스러운 결과를 만들 뿐이다. 심지어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누명을 쓰는 서글픈 모습까지 보여준다.

그런데 키튼은 극장으로 돌아와 잠에 빠지는 순간 꿈속에서 자기 소원을 성취한다. 탐정으로서 맹활약을 펼치는 것이다. 이때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키튼이 단순히 꿈을 꾸며 소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꿈속에서 영화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한 번 더 거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키튼은 지금과 다른 삶을 살기 위해 영화라는 가상의 세계를 따로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일단 영화 안으로 들어간 키튼은 말 그대로 엄청난 활약을 펼친다. 그는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을 수도 있고, 오토바이에 탄 채 달려오는 기차를 피할 수도 있으며, 무엇보다 악당의 위협에 용감하게 맞설 수도 있다. 즉 키튼은 영화 안으로 들어간 다음에야 자신이 되고자 했던 인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셜록 주니어>가 그리는 영화는 현실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하지만 문제는 꿈과 영화가 언젠가 끝난다는 것이다. 키튼은 어느 시점에서 꿈에서 깨고 영화 밖으로 나와야 한다. 이때 <셜록 주니어>는 영화 안으로 들어가는 키튼의 모습을 공들여 묘사한 것과 대조적으로 꿈에서 깰 때는 단지 허우적거리다 바닥에 떨어지는 것으로 간단히 묘사한다. 전자의 과정이 신비롭기까지 했던 것과는 달리, 꿈-영화에서 빠져나와 현실과 마주할 때는 얼마간의 당혹과 씁쓸함까지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등장하는 <셜록 주니어>의 너무나 유명한 마지막 장면. 자신도 눈치 채지 못 한 사이 키튼의 누명은 벗겨져있었고, 여주인공은 사과하기 위해 키튼을 찾아온다. 그리고 키튼은 마침 상영 중이던 영화의 장면을 차례대로 따라하며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하지만 두 남녀의 키스 장면에 이어 아이를 키우는 행복한 가정의 숏이 등장하자 이를 따라할 수 없는 키튼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그 순간 <셜록 주니어>는 끝난다.


이 시퀀스에서 현실과 영화 사이의 넘을 수 없는 벽이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언뜻 주인공이 영화 안으로 들어가 이상적인 활약을 펼친다는 점에서 <셜록 주니어>는 낭만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냉정할 정도로 영화와 현실을 딱 잘라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에서 현실로 돌아온 키튼은 여전히 훌륭한 탐정이 아니며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영화 속 이미지를 동경하며 이를 좇아갈 뿐이다. 하지만 방금 보았듯 그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의 숏과 숏 사이에는 생략된 현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현실은 영화의 문법처럼 작동하지 않으며, 키튼의 말로 설명하기 힘든 마지막 표정은 그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은 자의 솔직한 반응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표정이 키튼이 보여준 다른 어떤 액션보다 더 마음을 뭉클하게 만든다. 영화에 매혹 당하지만 어느 순간 영화와 나의 좁힐 수 없는 거리를 확인하는 것. 영화의 관객에게 이보다 더 큰 공감을 이끌어내는 테마가 또 어디 있을까.




4.

<셜록 주니어> 속 영화가 마법적인 상상력을 동원해 이상적 현실의 지향점을 이미지화 한다면(그리고 그 이미지를 통해 역설적으로 실제 삶의 현실적 조건을 드러낸다면), <카메라맨>은 지극히 물질적인 조건을 기반으로 현실 속에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는 영화의 성격을 드러낸다.

단적으로 말해 <카메라맨>의 영화는 필름이 없거나 삼각대가 부서지면 만들어질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또한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 사람이 거꾸로 움직이거나 두 개의 이미지가 겹쳐지는 사고가 벌어지기도 하는 매체이다(그런데 이 ‘실패’의 이미지는 이야기와는 별개로 이상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카메라맨>의 영화는 계속해서 필름을 감아야 하는, 즉 기계 장치의 지속적 움직임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결과물이다. 키튼은 몇 가지 유머러스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영화의 이런 기계적 특징을 자연스럽게 강조한다.


이 점이 가장 잘 드러난 장면은 물론 클라이막스 장면이다. 악당과 여자가 탄 보트가 물에 빠지자 악당은 혼자서만 헤엄쳐 나온다. 이 장면을 목격한 키튼은 용감히 여자를 구하지만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여자는 깨어나고, 자연스레 악당을 자신의 은인으로 착각한다. 뒤늦게 여자에게 돌아온 키튼은 허망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하지만 이 오해는 원숭이의 활약 덕분에 곧 행복하게 마무리된다. 알고 보니 키튼이 여자를 구하는 모습을 원숭이가 카메라로 찍었던 것이다. 이 인상적인 반전은 영화가 어떤 조건 가운데서 만들어지고 작동하는지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원숭이는 아무 생각 없이 카메라를 작동시켰을 뿐이다. 그러나 카메라는 묵묵히 기계적으로 필름을 감으며 렌즈 앞의 풍경을 충실히 기록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상영되는 순간부터 독자적으로 세상의 일부를 구성한다. 여자는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고, 악당은 자신이 숨긴 진실이 다시 드러나는 걸 보아야 한다. 또한 키튼은 다시 자신의 명예를 회복한다. 하지만 이 해피엔딩에는 영화에 대한 어떤 신비주의도 간섭할 여지가 없다. 단지 카메라의 비인간적 시선과 기계 장치의 자동적 움직임이 있을 뿐이다.


5.

버스터 키튼은 1921년에 <극장 The Playhouse>이라는 매우 아름답고 흥미로운 단편을 연출했다. 특히 첫 장면을 보자.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한 키튼은 어떤 공연을 보러 가는데, 그 공연 무대에 오르는 사람은 모두 또 다른 버스터 키튼이다. 여기서 키튼은 지휘를 하고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드럼을 치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그 무대를 보는 관객들 역시 모두 버스터 키튼이 분장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키튼은 6분 남짓한 시퀀스 동안 모두 25명의 키튼(들)을 연기한다. 그리고 우리는 곧 이 장면이 공연을 준비하다 잠깐 잠이 든 키튼의 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론적으로, 이보다 더 아름다운 꿈 장면을 만나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영화적 눈속임을 통해 만들어진 이 환상적인 장면은 키튼이 영화에 대해 갖고 있던 소망을 있는 그대로 영상으로 옮긴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키튼은 자신이 공연을 펼치고 자신이 그 공연을 보며 즐거워한다. 자신을 완벽하게 반영한, 극단적으로 개인적인 무대를 만들어낸 것이다. 여기엔 타인의 이미지가 개입할 여지가 애초에 없으며 키튼은 누구의 방해도 없이 즐거운 나르시시즘의 세계에 빠진다(먼 옛날 나르시시즘에 빠진 소년은 결국 죽음을 맞았지만 키튼은 꿈이란 장치를 방패삼아 퇴행적 결말을 차단한다). 비록 영화가 아닌 공연장을 배경으로 했지만 이 무대가 키튼이 지향했던 영화에 대한 이상적 이미지처럼 보인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비록 야속하게도 누군가가 그 꿈을 거칠게 깨우긴 하지만 그 6분의 시간은 말 그대로 꿈처럼 아름답게 느껴진다.


김보년ㅣ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팀